지난 금요일
화성에서 꿈꾸다를 보기전에 로비에서 기다리던 중
우연히 눈에 띈 연극 열하일기만보 표를 예매하고 나서
토요일부터 오늘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18세기의 조선에서 살고 있는 중입니다.
어린이용 책으로 나온 열하일기
그리고 소설 박지원,영조와 정조의 나라를 통독하고 나니
그동안 밀쳐두었던
열하일기,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 생각났습니다.
저자 고미숙은
수유 공간 너머를 만든 사람으로 제가 생각하는
공부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람이라서
늘 주목하고 있는 사람인데요
일전에 그 책을 읽을때만 해도
제게 연암은 마음을 활짝 열고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마 그래서 책뒤에 참고서적이 여러 권 적혀있었어도
후속으로 더 읽어본다든지
그녀가 연암 박지원을 소개하기 위해서 선택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여러 개념들에 대해서도
더 알아보고자 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었지요.
그러나 그 책을 읽은 이후에
정민선생의 소개로 알게 된 18세기의 새로운 지적인 풍토
그리고 방각본 살인사건을 필두로 한 김탁환의 소설에서
만난 백탑파의 인물들에 대한 관심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독서를 자극한 이후라 그런지
오늘 다시 읽는 그 책은 몇 년 전 제가 읽던
같은 책이 아니었습니다.
수유 공간 너머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노마드적인 삶과
글읽기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드디어 감자캐기를 하는 기분이 드는 날이었습니다.
꼭 누구여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살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새로운 곳으로 끌려가거나
마음이 저절로 동해서 가보다가
그것이 뜻밖의 길을 보여주고
고민을 수반하면서도 길이 만들어지는 기쁨을 누리는
그 한 순간의 깨달음이 있다면
그것으로 그 순간을 누리고 기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날이었습니다.

그가 만난 사람들,홍대용,유언호,이덕무,박제가
이서구,백동수
그리고 그 이외에도 그를 중심으로 만났던 사람들사이의
깊은 교류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18세기
동,서양을 막론하고 변화의 물결이 거셌던 시기라고
하더군요.
18세기학이란 학문이 있다고 그래서 학회가 열린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변화의 한가운데서 살면서도 그것이 변화인지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더 많겠지요?
그 속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 늘 편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매일의 삶속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면서 삶의 주체성을 세워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슴 뭉클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내일 연극을 보고 나면
아마 고미숙의 눈으로가 아니라
내 눈으로 열하일기를 전체적으로 다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네요.
제대로 번역된 책의 3권 분량의 두께 자체가 장난이 아닌
책이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