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가 네 살이 되어 다니던 발레 교실에서 만난 아이가 있었는데 인연이 깊었는지 유치원을 보내고 보니 거기서도 같은 반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아이의 엄마와 허물없이 드나드는 사이가 되며 가족 사항을 알게 되다보니 재미있는 가정사가 있었다. 아이 엄마가 설흔 여덟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아들, 두 아이를 데리고 열 살이나 연하의 총각과 재혼을 했다고 한다. 아무리 자유로운 미국이라 해도 남자 쪽에서는 반대가 말도 못했고 외아들을 키워 온 시어머니는 몸져 눕기에 시아버지와 누나도 반대가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남편은 아내에게 이미 전남편과의 사이에 아이가 있으니 더이상 아이를 낳지 말자고 했다고 한다. 이제 스물 여덟의 새파란 총각인 남편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하니 아내는 많이 미안했지만 자신의 아이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0 여년 만에 실수로 아이가 생겼는데 그 애가 바로 우리 딸의 친구인 아이였다. 마흔 일곱 노산이기도 했지만 남편이 그다지 반가워하질 않아서 임신 내내 마음이 편칠 않았다고 하는데 이유는 남편이 전남편의 아이들이 혹시라도 상처를 받으면 어쩌냐고 코가 빠질만큼 걱정을 하더란다. 그래도 막상 아이가 태어나니까 좋아하고 예뻐하면서도 그 때 이미 스무 살을 훨씬 넘은 큰 아이들의 마음을 항상 배려해주는 모습에 주변 학부형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아빠였다.
몇 년이 지나 늦둥이와 스물 세 살이나 차이가 나는 큰 딸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결혼식 때 자신을 낳아준 친아버지가 아닌 새아버지와 함께 입장을 하겠다고 해서 우리를 한번 더 놀라게 했다. 그 말을 들은 새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더 받을 선물이 없다면서 아무리 그래도 낳아주신 아버지를 서운하게 하면 안된다고 타일렀다고 한다. 결국 결혼식에는 친아버지와 입장을 했지만 불과 열 몇 살 밖에는 차이가 나지 않았던 젊디 젊은 새아버지의 사랑은 아이들에게 충분한 상을 받은 것이라는 생각에 주변의 많은 이들이 눈시울을 적셨다.
처음에 이 가정의 사연을 들었을 때에는 나도 사람인지라 다른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아내 쪽이 재산이 많은 집안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 쪽이 오히려 준재벌이었고, 아내는 간신히 고등학교를 나와 그다지 높은 보수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그야말로 삶에 찌든 이혼녀였다고 한다. 어찌보면 영화에나 나올 법한 얘기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새삼 낳은 정 못지 않은 기른 정을 직접 목격하는 귀한 기회를 가졌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우리 학교 물리학교 교수님 중 한분도 비슷한 사연이 있으셨다. 유학 시절에 아이 셋과 아내를 남기고 요절한 학교 선배로 인해 그 아내와 재혼을 하고 선배의 세 아이를 너무나 훌륭하게 키워낸 분이었다. 자신의 아이는 아마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남의 자식이지만 아이들이 잘 자라준 것을 얼마나 자랑하고 감사하게 생각하던지 학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했던 은사님이다.
두 번의 만남을 통해 남의 자식도 사랑으로 키워내는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나는 사춘기 중학생 때 만나서 지금까지 나를 딸로 품으신 아버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했다. 친아버지와의 안타까운 이별 이후 내 마음의 문을 닫고 엄마만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새아버지의 등장은 커다란 위협이었다. 아버지가 생겨서 기쁜 것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을 빼앗아가려는 사랑의 경쟁자로만 여겨졌다. 엄마의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라고 믿었는데 배신감도 느꼈다. 이전까지 나는 엄마의 전부였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엄마에게는 나만큼이나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에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았고 나를 낳아 주신 아빠가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당신 자식들과 나를 비교도 하시며 내 눈에는 당신 자식들만 편애를 하시는 것으로 보였고, 무엇 하나 내가 꿈꿔온 아버지의 모습과는 하나도 닮지 않았다고 애써 외면만 해왔던 나의 아버지. 무엇보다도 내 마음 속으로는 친아버지를 줄곧 기다리고 있었으니 새로운 사람을 마음에 들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수많은 갈등과 미움과 원망, 그리고 회한 속의 지난 삼십 여년의 세월 동안...아버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계셔주셨다.
내 기억 속에는 그토록 찬란한 나를 낳아주신 친아버지는 겨우 열 두 해를 내 곁에 있어주었지만, 내가 그토록 아버지로 받아들이기 싫어했던 나의 아버지는 내 나이 열 다섯에 만나 30 년을 나의 아버지 자리를 지켜주셨다. 이제는 사별하신 아내보다 엄마와 함께 사신 세월이 더 길다며 엄마의 손을 잡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느 해인가 반항으로 가득 차서 아버지와 말도 안하고 싶어했던 나에게 눈물 머금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었다. "이 눔아, 낳은 정만 정이 아닌 법이야, 기른 정도 가슴이 무너지는 거라구!" 아, 나는 어쩌자고 그렇게 철이 없었던 걸까.
기억도 안나는 어린 나이에 집을 나간 어머니와 부유했어도 술과 여자에 빠져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아버지 사이에서 방황했던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어려서는 그렇게 원망했던 술을 평생 벗 삼아 살아오셨던 가엾은 나의 아버지를 나의 마음에 아버지로 품게 된 지가 몇 해가 되지 않는다. 술로 인해 생겨났던 수많은 갈등들, 그 속에서 엄마의 고통...모든 것이 어우러져 아버지를 미워한 시간이 나와 아버지의 인연의 시간의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미워하기만 했던 아버지가 남편의 사업이 기울어져 우리 가정이 그야말로 풍지박산이 날 정도가 되었을 때에 엄마와도 의논하지 않으시고 그나마 남아있던 아버지의 가장 마지막 재산을 나에게 주셨다. 당신 자식들에게도 주지 않으시고 움켜쥐고 계셨던 아버지의 전 재산을 받고 나와 남편은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혹시라도 내가 먼저 죽으면 네 엄마 얼마라도 있어야 천덕꾸러기 안되니까 엄마 주려고 했던 건데...마누라보다는 자식이 먼저다. 자식이 먼저 살아야지 않겠니? 나도 사업 실패한 게 숱했어. 그래도 젊으면 다시 일어나는 거다. 남편 사업 안된다고 괄시하면 못 쓰는 거야" 장모님 속 썩이고 술 드신다고 알게 모르게 눈치를 주던 남편도 아버지 앞에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 없이 자라난 남편에게 껄끄럽기만 한 장인이 아닌 아버지가 생긴 순간이었다.
부모는 신이 세상에 내려보낸 아이들을 하나하나 다 지켜볼 수 없으니 보낸 천사라고 한다. 낳은 부모도 기른 부모도 아이에게는 그저 천사처럼 곁에서 그들을 지켜주는 고귀한 존재인 것이다. 내 아이들을 키우면서 부모의 사랑은 내리사랑임을 새삼 느낀다. 흐르는 물처럼 그저 내려만 갈 뿐 다시 돌이켜 올라오지는 못하는 애달픈 사랑인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남의 자식을 내 살과 피처럼 귀하게 끌어안고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기른 정의 부모들에게 무한의 존경을 보낼 뿐이다.
육아&교육
내 아이를 더 밝고 건강하게 키울 수 있는
정보교환과 질문의 장
낳은 정 기른 정
동경미 |
조회수 : 1,853 |
추천수 : 150
작성일 : 2009-09-22 22:37:02
- [키친토크] 엄마보다 훨씬 더 나은.. 32 2013-12-28
- [줌인줌아웃] 어두운 터널에는 반드시.. 20 2013-01-03
- [줌인줌아웃] 뜻이 있으면 반드시 길.. 24 2012-06-12
- [줌인줌아웃] 아줌마 로스쿨 장학생 .. 56 2012-04-03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햇살
'09.9.30 3:18 PM저에게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이..내 부모도, 남편의 부모도 아닌..
아이들이더군요..
아이들이 아프면 어느 누가 아픈것보다 더 아프고..
아이들이 화가 나면 어느 누가 화난것보다 더 마음이 쓰이고..
아이들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어느 누가 기뻐하는것보다 내가 더 기쁘고 그렇더라고요...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움직이는 이런 사랑이 내리 사랑아닌가 싶어요^^2. 동경미
'09.10.1 12:49 PM햇살 님, 너무나 공감합니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쏟아붓고 가는 게 우리의 삶인 것같아요.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N
번호 | 제목 | 작성자 | 날짜 | 조회 | 추천 |
---|---|---|---|---|---|
2785 | 5살 남자아이.. 요즘 부쩍 발에 쥐가난다네요. 2 | 졍이 | 2009.09.24 | 3,031 | 223 |
2784 | 건강원에서 다린 녹용 먹여도 될까요? | 예지예원맘 | 2009.09.24 | 1,789 | 173 |
2783 | 고등학교 배정은 어떤 방식으로 결정되나요? | 제이맘 | 2009.09.24 | 1,706 | 228 |
2782 | 분유끊으려고 하는데 음료용으로 먹일만한것 없을까요? 49 | 밍가밍가 | 2009.09.24 | 2,120 | 119 |
2781 | 아이사랑카드 1 | 은빛 | 2009.09.24 | 1,371 | 144 |
2780 | 5살여아..어린이집 앞에서 아침마다 웁니다 5 | 유빈수현맘 | 2009.09.23 | 1,778 | 98 |
2779 | 한솔 기관용 ort 많이 물어보셔서.. | 올리 | 2009.09.23 | 9,910 | 284 |
2778 | 새벽에 일어나서 우유먹는것 49 | 은영 | 2009.09.23 | 1,862 | 93 |
2777 | 초등학생 재미있게 한자,영어공부시키기 ^^ 2 | 지후맘 | 2009.09.23 | 2,367 | 96 |
2776 | 낳은 정 기른 정 2 | 동경미 | 2009.09.22 | 1,853 | 150 |
2775 | 키 작은 아이,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요 2 | 비니양 | 2009.09.22 | 2,265 | 94 |
2774 | 아기가 잠을 자지를 않아요.. 6 | 처음처럼 | 2009.09.22 | 1,786 | 109 |
2773 | 아이 미술 교육은 어찌하나요 3 | 샴페인 | 2009.09.22 | 2,122 | 87 |
2772 | 어린이집 통신문이나 식단표 프린트해 주나요? 6 | 알콩 | 2009.09.22 | 1,640 | 132 |
2771 | 초3,연산실수가 잦은아이.. 5 | 워니후니 | 2009.09.22 | 3,226 | 134 |
2770 | 독서지도에 관심있는 엄마들 강의 신청하세요..무료 온라인강의 3 | 봄햇살처럼 | 2009.09.22 | 1,836 | 225 |
2769 | 건강한 아이로.. | 무공해 | 2009.09.22 | 1,353 | 117 |
2768 | 부부싸움 2 | 동경미 | 2009.09.22 | 1,918 | 130 |
2767 | 치과데려갔다오니 우울해영... | 푸르른 나무 | 2009.09.21 | 1,573 | 152 |
2766 | 육아가 넘 힘들어요. 3 | 포카 | 2009.09.21 | 1,840 | 96 |
2765 | 내 아이의 마음에 심는 나무 4 | 동경미 | 2009.09.21 | 1,907 | 121 |
2764 | 이런내복 어디파는지아시나요?? 6 | 미소쩡 | 2009.09.21 | 2,405 | 114 |
2763 | 아이가 강아지키우고 싶다고 하는데 2 | 나무 | 2009.09.21 | 1,628 | 107 |
2762 | ADHD 아이의 괴롭힘을 참아야 하나요.. 5 | 진진마 | 2009.09.21 | 2,770 | 89 |
2761 | 울고 악쓰면서 나중에 토하는아기 때문에 너무나 속상해요 4 | 11월27일출산 | 2009.09.19 | 8,575 | 2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