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시도 아니고 쿠데타도 아닌데 뜬금없이 '지하벙커'라는 말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여러분들도 그러했으리라).
어륀쥐에서부터 전봇대, 톨게이트 그리고 지하벙커에 이르기까지… 매일 매일 웃을 거리를 이렇듯 전해주시는, 또 소재빈곤으로 시달릴 사람들에게 글거리, 말거리 - 실제로 오늘 하루 종일 농담주제는 '지하벙커'였다 - 를 만들어주시는 이명박 대통령님 각하께 우선 경의를 표함이 마땅하다.
돌이켜 보건대, 지하벙커 하면 언뜻 떠오르는 게 있다. 2차 대전 때의 처칠(이하 벙커 1호)과 히틀러의 워룸(벙커 2호)이다. 닮은 점도 있지만, 이 벙커들은 다른 점이 훨씬 많다. 가령, 한 곳은 지금 유명한 관광지가 됐지만, 다른 한 곳은 철저히 파괴되어 표지판만 간신히 세워져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 두 벙커를 지배한 정신이 확 달랐다. 벙커의 공기 속에 들어 있는 역사적 경험도, 벙커에 일한 사람들도 전혀 달랐다. 이명박의 최신 지하벙커는 이 둘 중 어느 것을 닮았을까.
2.
런던 관광 책자에는 '전시내각의 방'이 있다.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있는 이곳은 바로 처칠이 수상으로서 전쟁을 지휘한 곳이다. 특히, 처칠은 이곳에서 대전 초기 영국 전투(Battle of Britain)의 극적인 승리를 이끌어낸다.
지금도 영국 사람들은, 비록 고달팠지만, 이 '배틀 오브 브리튼' 시기를 가장 '좋았던 때'로 기억한다. 이 전투는 영화의 고전적 소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가, 현재 '전시 내각의 방'의 시계는 2차대전 어디쯤에 멈춰져 있다고 한다.
나치즘을 결정적으로 패배시킨 것은 영국전투와 독소전이었다. 두 전투 모두 오늘의 주제, '지하벙커'와 관련 깊다. 영국이 홀로 - 당시까지 미국은 중립이었다. - 히틀러와 싸웠던, 배틀 오브 브리튼은 파죽지세의 독일군에게 첫 패배를 안겨준다. 아직 세계 최강이었음이 분명한 영국 해군을 두려워했던 히틀러는 차마, -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처럼 - 도버해협을 횡단할 엄두를 내지는 못하고, 영국의 전쟁능력을 불구로 만들기 위해 폭격기를 띄우기로 한다. 하늘에서의 싸움이 불가피했다.
괴링의 폭격기들은 영국이 새로 개발해낸 신무기 레이더와, 인류 최초의 본격적인 공중전에서 대활약한 영국공군(RAF)의 에이스 스핏파이어 전투기 - 시민들의 모금으로 만들어진 - 에 결국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승부를 결정 낸 것은, 워룸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난, 전쟁을 대하는 자세 내지 '정신'이었다.
런던 폭격은 무자비한 것이었다. 바로 이때 전시 내각이자 최고 사령부, 곧 지하벙커가 만들어진다.
시민들은 지하철역으로, 내각과 사령부는 지하벙커로 내려갔으나 사기는 높았다. 시민들은 단결했고 범죄율은 급감했다. 소총수에서부터 군수공장 노동자, 소방대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자발적이었다. 폭격으로 수만 명이 죽어 나갔지만 패배주의는 전혀 없었다. 전시의 '궁핍'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제대로, 오히려 평시보다 잘 돌아갔다. 국민들은 정부를 도와 위기를 극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좋았던 시절'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해가 지지 않았다.'던 국민의 자존심은 이렇게 마지막으로(전쟁 후 '대영제국'은 사라졌다.) - 그러나 우아하게 - 지켜졌던 것이다. 이 분위기는 지하벙커에도 그대로 전달된다. 처칠은 자신감이 넘쳤고, 워룸은 차라리 여유가 있었다. 지하벙커의 사람들이 행하고 말하는 것에 국민들은 신뢰했다. 애초부터 성공할 벙커였다. 시민들은 런던을 지켜냈고 벙커는 영국 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극복해냈다.
3.
처칠이 완강히 버티자 히틀러는 동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거기에는 '동방에서 온 야만인'들이 버티고 있었다. 유명한 독-소전이 개시된 것이다. 히틀러는 또 패배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의 악명 높은 겨울에 무너졌다면, 히틀러에게는 여기에 신형 전차가 더해졌다. 광활한 평원에서 러시아 T-34는 종횡무진했다.
그러나 히틀러를 결정적 파국으로 몰아간 것은, 동방에서 온 군대에 쫓겨 지하벙커로 숨어들 때 함께 들고 들어간 정신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 가짜로든 진짜로든 - 지지했었다. 1945.4월, 베를린 시내에 T-34가 가득했을 때, 독일 국회의사당 건물에 마지막까지 남은 독일병사들도 수도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울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독일병사들은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 포위 전에서 (러시아의 '대지'를) 닮아 영웅적이지만 낙천적인 소비에트 병사들과 부닥쳤다. 후방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빨치산들을 만났다. '야만인'들의 저력 앞에 '문명국' 독일군은 의욕을 잃어버렸다. 독일군 원수 파울루스가 러시아에 항복했다.
히틀러가 지하벙커에서 라디오를 통해 '우리는 이기고 있다'고 말했을 때, 국민들은 더 이상 속지 않았다. BBC 라디오를 더 믿었다. 나치는 신뢰를 완전히 상실했고 벙커는 고립됐다. 파멸의 와중에서도 벙커에서는 계속해서 음모가 꾸며졌고 불신과 권력다툼이 반복됐다. 애초부터 패배할 벙커였다. 히틀러를 따르는 듯했던 국민들은 한번 불신하기 시작하자, 나치즘과는 독일의 위기를 함께 극복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시민들은 베를린을 버렸고 벙커는 비극으로 끝났다.
4.
두 벙커의 정신은 이렇게 달랐다. 벙커 1호의 주인은 시민들이었지만, 2호는 <권력에의 의지>에만 찌든 자들이었다. 벙커 1호의 힘은 오랜 민주주의 전통으로부터 나왔지만, 2호의 정신은 돌격대와 친위대로부터 나왔다. 한쪽은 토론과 소통으로 상호 신뢰 - 비록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 를 쌓아온 반면, 한쪽은 파시스트의 일방적 속도전만 있었다.
폭격을 피해, 위기를 구하러 벙커에 들어간 것은 똑같았지만, 벙커로 들고 들어간 정신은 서로 달랐다. 한쪽은 역사를 구하기 위해 싸웠고, 다른 한쪽은 총통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히틀러를 자꾸 닮아가는 어떤 사람(?)도 - 지하벙커 얘기가 안 나왔으면 당분간 히틀러와 비교되지 않았을 텐데;; - 최근 벙커에 들어갔다. 벙커에 드나드는 거야 쥐 맘이니 그렇다 치고, 대체 이명박은 그 벙커에 무슨 정신을 들고 갔을까. 그 벙커에서는 어떤 분위기가 지배적일까. 무슨 말들이 오고 갈까. 벙커에서 나오는 말들은 과연 신뢰할 수 있을까. '위기'에 맞서 국민들을 하나로 만들 수 있을까…. 아, 질문들이 너무 진지하다.
쉽게 하자. 왜 하필이면 지하벙커에 처박히는 걸까? 경제 살리려 지하에 들었다는 말을 믿을 수야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지하벙커지?? 거기 숨어서 무신 짓 하려고?? 현재 인구에 회자되는 썰들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지하벙커 요원들은 난무하는 추측과 루머에 대한 대책 마련을 서두르라!!). 어느 것이 정답일까.
별거 없다. 이명박이 전쟁영화를 너무 봤기 때문이다. 그냥 할리우드 액션이다.
경제위기가 핵폭발보다 더 큰 충격을 몰고 올 것이기 때문에.
국민과 소통을 완전히 단절하고 자기들끼리 다 해먹겠다는 것이다.
수십만 촛불이 몰려올 때를 대비하여 미리 숨어 있겠다는 작전.
막판에 몰린 이명박이 뭔 짓인들 못 할까.
컨테이너 산성 다음에 지하벙커는 당연한 수순 아닌가.
심리적 국민 협박용이다.
제2롯데월드 때문에 서울공항 무시했듯이 군대 미필한 이명박이 워룸이 뭐 하는 곳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즉, 오해다.
귀 닫고 눈 감기 위해서다.
지하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다.
스스로 최후가 다가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그랬듯이?)……
맞긴 맞는데 백 점짜리는 아니다. 정답은 이거다.
안 하겠다던 '대운하' 재개 작전을 짜면서 자기 주머니로 얼마 들어올지 몰래 숨어서 계산하려고, 두더지 모냥 땅속으로 기어들어간 것이다.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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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벙커의 추억
서프[펌] 조회수 : 565
작성일 : 2009-01-08 22:59:51
IP : 218.156.xxx.229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서프[펌]
'09.1.8 11:00 PM (218.156.xxx.229)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1&uid=19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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