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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거운 이야기(심심하신 분만..^^)

가을밤 조회수 : 891
작성일 : 2004-09-02 22:16:21
모처럼 큰맘먹고 이사갈 때마다 지고 다니던 묵은 책들을 버리기로 했어요.
끄집어 내다보니 처녀시절에 쓰던 일기장이 나왔어요.
잠깐 쉴겸해서 10년도 더 된 옛 일기장을 읽어보기 시작했는데..

헉, 남편이 봤으면 큰일나겠다 싶은 내용들이 막 나오네요.
예전에 사귀던 사람, 그냥 잠깐 만났던 사람, 정말 짝사랑했던 사람...
실명이 마구 등장하는 겁니다.
게다가 내용이 어찌나 유치하고 조악한지...

확 내버릴까도 싶었지만
이조차도 없으면 요때 1,2년의 추억은 상당부분이 그냥 사라져버릴 것 같은거예요.
차마 그 추억을 다 버리기 싫어서 남편 못볼 곳에 꼭꼭 넣어두었습니다.

다시 정리를 하는데
이번에는 남편의 노트가 나옵니다.
깔끔하고 단정하게 괜찮은 시를 적어놓은 노트.
그냥 시만 써 있는게 아니라 색한지로 장식도 하고-.-(한 때 유행했던...)
노트 끝에는 몇줄 글과 날짜와도 남겨두었더군요.
누가 이런 걸 줬을까 한 세번쯤 읽어보니 알겠더군요.
저 만나기 6년 전에 만났던 여자가 헤어지면서 줬던 건가봐요.
물론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저는 몰랐죠..-.-;;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 나이가 서른이었으니
당연히 사귄 사람이 많이 있겠죠.
또 그건 저와 관계없는 일이라 생각해서 지난 사람에 대해서는 한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요.
남편도 마찬가지구요.
하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어요.
15년동안 이걸 끌어안고 이사를 다녔다니...

버릴까하다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생각해 다시 꽂아두었습니다.
퇴근 후 돌아온 남편이 텅빈 책장을 보더니 바로 찾는군요.
"그것도 버렸어? 공책인데..."
시치미를 떼고 물었어요.
"무슨 공책인데?"
"...시 같은게 써 있는..."
좀 머뭇거리며 대답하더군요.

공책을 꺼내주며 장난스럽게 말했죠.
"이게 뭔데..이제 버리지? 별거 아닌것 같구만.."
다시 제자리에 꽂으며 남편의 좀 멋적은 대답
"아직...좀 더 있다가..."

상쾌한 기분은 아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어요.
나도 버리기 싫은 일기장이 있는 것처럼 이 사람도 차마 버리기 아까운 추억이 있을 수 있으니까.
기억까지 다 차지하고 싶은 욕심은...버려야겠죠?

서늘한 기운이 좋아 잠도 안 오고 해서 늘어놓은 수다입니다^^
IP : 222.99.xxx.27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마농
    '04.9.2 10:32 PM (61.84.xxx.22)

    남편분이 장가를 잘 간것같네요..^^..
    맞아요. 참 잘하셨네요.

  • 2. 김혜경
    '04.9.2 10:59 PM (211.201.xxx.139)

    그럼요...남편분의 추억도 소중한거죠...

  • 3. 레몬트리
    '04.9.3 12:42 AM (211.199.xxx.192)

    저도 남편의 고등학교때 썼던..그러다 중간생략하고 군제대하고의 생활이 이어지는 그런 일기장있어요.
    뒤늦게 발견한 저도 얼마나 웃음나오던지.
    특히 고교때꺼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답니다.
    스케이트장에서 이쁜 여학생 만나서 사귀게 된 이야기. 그 여학생과 빵집에 간거..
    그 여학생 생일날..그 여학생 집에서 ..그 엄마가 해주시는 밥 얻어 먹은 얘기.. 이런거요.
    쓴 내용이 정말 미소짖게 하는 순수함이 깃들어 있었다죠.
    그리구 또 아버지가 힘든 일 시켜서 하기 싫은데 한 얘기.

  • 4. 모래주머니
    '04.9.3 11:29 AM (220.85.xxx.167)

    ㅎㅎ..저도 저희 신랑 중학교때 일가장을 봤는데요.

    얼마나 순진하고 귀여운지...

    지금도 먹는걸 좋아하는데 중학교때 일기장에도 먹고싶은 것만 적어 놨더군요.

    내일은 엄마한테 만두를 해달라고 해야지...하는식으로...

    타임머쉰을 타고 돌아가 신랑의 어릴적 모습을 모고 있는듯 하더군요,

  • 5. 유로피안
    '04.9.3 12:23 PM (221.168.xxx.70)

    모래주머니님...순간 너무 웃겨서 막 웃어버렸어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신랑 분 귀여우세요

  • 6. 하늬맘
    '04.9.3 2:54 PM (203.238.xxx.234)

    모래주머니님땜에 저도 막 웃엇어요..
    일기에.. 내일 엄마한테 만두해달래야지...는 좀 심하게 귀여운데요....

  • 7. 야옹냠냠
    '04.9.3 3:26 PM (222.99.xxx.27)

    만두 해달래야지...정말 귀여워요.ㅋㅋㅋ

  • 8. 아름다운그녀
    '04.9.4 12:28 AM (221.153.xxx.98)

    저에게는 남편 초등학교 때 일기장 있어요. 심하게 귀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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