짭짤 고소한 김혜경의 사는 이야기, 요리이야기.
제게 가장 소중한 그릇
새로 마련한 그릇장, 두께가 불과 5cm 깊어졌는데 얼마나 수납력이 놀라운지... 싱크대 수납장에 들어있던 그릇들까지 모두 새집으로 이사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어요. 그리고도 남은 자리가 있어 뭘로 채우나 하고 있는데...
오늘 친정에 갔다가 낯익은 접시들을 발견했죠.
"엄마 이거 이담에 저한테 물려줘요."
"뭘?"
"이 접시들..."
"그거 사연있는 접시들인거 알지?"
"그럼, 아니까 갖고싶다고 하지"
"그걸 뭘 이담에 물려주니, 당장 가지고 가라, 그런데 집에 좋은 그릇많으면서 그건 왜..."
"엄마의 사연이 담겨있으니까..."
친정어머니 마음이라도 변할세라 당장 싸갖고 와서 우리 그릇장의 새식구가 된 애들이 바로 위의 접시 4장이에요.
이 접시들 나이가 저랑 비슷하다고 하면 믿으실래요? 60년생인 제 남동생의 누나들이에요, 이 접시들이.
저희 친정아버지 군인 출신이라고 말씀드린 적 있죠?
엄마와 아버지는 저 낳기 전과 제가 코흘리개 시절 진해에 사신 적 있어요.
진해에는 육군대학이 있었는데(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네요) 먼저는 육군대학의 학생으로, 나중에는 육군대학의 교관으로 아버지가 전근가셨기 때문이죠.
저희 친정어머니와 아버지는 나이차이가 10살이나 나요. 아버지는 중령때, 엄마는 정말 꽃처럼 예쁠 때 결혼하셨어요. 이 나이어린 신부는 남편이 영관급 장교이다보니 손님 치를 일이 잦았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40,50년 전이야 혼수로 그릇 잘 꾸며서 보내주던 때가 아니니까, 그저 밥이나 끓여먹을 정도의 양은그릇이나 있을 때죠.
누구하나 도와줄 사람없는 객지 진해에서 20대 중반의 어린 나이에 연년생 남매를 키우며 살던 저희 친정어머니는 박봉을 쪼개고 또 쪼개서 그릇을 하나씩 둘씩 장만하셨대요. 손님 초대할일은 자꾸 생기고 음식담을 그릇은 없고.
당시 정식 수입품이라도 있나요? 그렇다고 50년대 후반 국산품 질은 형편없고...
밀수품이 흘러나오는 곳을 기웃거리며 접시며 볼이며 찜기며 하나둘 모은 거죠.
제가 아주 어릴 때부터 아주 특별한 날 꺼내쓰시던 이 접시들, 같은 무늬를 겨우 2장씩 장만하셨어요.일본산은 일본산인데 노리다께는 아닌 것 같고, 하여간 지금봐도 여전히 예쁜, 그야말로 앤틱접시죠.
엄만 아버지 생신이며, 대령진급 턱 내실 때, 특별한 이 접시에 탕수육이며 닭강정이며 해파리냉채며 이런 저런 맛난 음식들을 듬뿍 담아내셨어요.
요즘이야 좋은 그릇 너무 많지만 제가 아주 어릴 때 이런 그릇이 흔치않았어요. 전 우리집에 이렇게 예쁜 장미꽃 접시가 있다는게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그런데 그 접시가 바로 오늘 제 차지가 된 거죠.
저 이 접시 잘 모셔두면서 특별한 날, 그날 메뉴 중 제일 맛난 음식을 담아 먹을거예요.
그리고 이담~에 제가 늙어서 더 이상 그릇을 관리할 능력이 없을 때 누군가에게 물려줄거예요. 제 딸을 주든가, 아니면 할머니라면 죽고 못사는 중3짜리 조카 형석이의 색시에게 주든가, 아니면 제 아버지보다 더 늙은 접시라며 조카딸 예림에게 주든가...
언제 이 접시에 맛난 음식을 담을까, 지금 머릿 속에 궁리가 가득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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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체리
'02.12.11 12:27 AM웬지 가슴이 찡한 느낌이에요.
어머니 대한 글은 뭐든지 그래요(저만 그런가요?)
오늘 돈까스 했어요(상에 내기 전에 자르니까 진짜 냄새가 안 나대요.감사합니다.다른 책에는 없는 비법(덤)이 많아서 좋아요).
엄마표 닭튀김,시즈닝솔트 닭구이 할려고,
닭 (중닭 잘라서),닭봉 샀는데
시즈닝 솔트가 E마트에는 없었어요.
백화점에 가면 있겠죠?2. 임미영
'02.12.11 10:26 AM정말 예쁜 접시로군요..
어머니의 손길과 추억이 묻어있는, 소중한 그릇!
잘 가져오셨어요. ^^
저희 아버지도 직업군인이셨어요. 덕분에 저는 초등학교 다섯번 전학이라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가 되었답니다. 동생들은 기껏해야 한 두 번에 그쳤지만 제가 맏이이다 보니 ..
육군대학에서 공부도 하셨구요. 젊은 머리들 따라가기 힘들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나는군요.
군복이 잘 어울리셨는데... 세월은 그 아버지를 할아버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언제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셔서 건강하시죠. (만보 걷기 아시죠?)
조만간 나도 친정가서 잘 살펴봐야지~!3. 김혜경
'02.12.11 10:31 PM체리님 시즈닝솔트 백화점에 가도 없어요.
까르푸에 가니까 웬 모자쓴 영감님이 그려진 Magic이라는 게 있던데 이게 시즈닝솔트 비슷한 거예요, 폴튜리 매직이라고 쓴 걸 사다가 해보세요.
미영님 동지를 만났네요. 미영님도 진해에 사셨나요? 그 까막득하게 높은(물론 아기가 봐서 그랬겠지만) 곳에 위치한 관사 생각나세요??4. 김미라
'02.12.12 8:53 AM저두...관사의 추억이 있죠. 산안에 폭 쌓여있던...^^
저희 엄마도 멋모르던 어린나이에 손님을 치르며 겪었던 추억(?)을 간직하고 계시고...
자존심이 무지 강하셔서 요리를 많이 배우셨어요.
덕분에 전 보조를 많이 하게 되었고 덕분에 어디가도 요리 못한다는 소린 안 듣는다는...^^
괜히 반가워서 글남깁니다...5. 꽃게
'02.12.12 9:27 AM제 아버님도 군인... 전역후 공무원....
제 기억엔 없는데 엄마는 진해 육군대학 얘기 가끔 하시구요...광주 상무대...춘천, 원주...대구...
우리 오남매가 출생지가 다 제 각각이랍니다.6. 김혜경
'02.12.12 10:33 PM저흰 전 서울, 오빠와 남동생은 진해 출생.
제가 방학 때 가본 곳은 경기도 일동, 경남 진해, 대구시, 전남 광주 등지랍니다. 군인치고는 아버지가 비교적 서울 근무를 많이 하셨죠.
전 전학은 못다녀봤어요. 외할머니댁에 맡겨져서..., 대신 오빠와 투쟁의 역사였어요. 그래도 그렇게 자란 탓인지 오빠랑 전화통화도 잘 안하고 얼굴도 자주 못보지만 늘 마음은 가깝게 있어요.7. 잠비
'05.4.1 9:19 PM제가요 그릇을 하도 잘 깨먹어서 결혼 때 장만한 거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튼튼한 나뭇잎 접시(투명하게 비치는 거), 무거워서 조심하게 되는 두꺼운 도자기 그릇, 그리고 깨져도 아깝지 않는 막그릇을 썼는데, 제발 예쁜 그릇 좀 사용하라더군요. 반성 많이 하고 이제는 안깹니다. 저 위의 어머니 그릇.... 어디선가 봄직도 하고, 예쁩니다.8. 아름엄마
'07.5.27 1:34 PM초등학교때 가출을 한다고 꾸린짐이란 것이 집에 있던 이쁜 색의 유리그릇들이었습니다. 저도 님처럼 그릇을 물려받으면 좋겠지만, 사정이 있어 남아있는 그릇이 하나도 없네요. 님 글로써 아, 우리 엄마도 그릇을 참 좋아했었구나 짐작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