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초이틀,,,큰 맘먹은 거었는데 아쉬움이 남았다.
종주하고도 백운대를 못오르다니.....
그래,또 가자! 일요일 늘어지게 자고 초입에 이르니 오후1시~
하산 행렬을 속을 난 거슬러 올라간다.
누구의 글씨일까?
북한산에 계곡물이 흐른다.
초서체로 편안하다.
오늘 코스는 우이동 종점~하루재~인수산장~북한산장~위문~백운대~위문~대서문~구파발이다.
백운대 최단 코스다.
도선사 길을 버리고 하루재를 넘는다.
도선사??
도선이 삼각산 정상에서 개경을 바라보며 새 왕조의 탄생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하루재 고개를 넘으니 딴 세상이다.여전한 겨울~
인수봉이 보인다.
하루재??
할아버지,할머니들은 미아리~송추를 오갈 때 이 고개를 넘었다.
딱 하루 걸린다 해서 하루재(嶺)이다.
인수산장~
암벽인들의 영원한 고향 인수봉(仁壽峰),,,,의 동사면~
독수리 머리같다.
부리는 MLB 모자 같기도.
ㄷㄷㄷ~
백운산장에서 인수봉~
백운산장서 백운대~
드디어 백운대 턱밑 위문(衛門)이다.
위문은 일제 때 불린 이름이니 '백운대 암문'(暗門)이 옳다.
총연장 13키로인 북한산성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만경대~백운대 움푹 패인 사이를 돌로 쌓은 후 암문을 냈다.
만경대~위문~백운대 구간은 성벽 복원 중이다.
검은 돌은 초기 성벽돌.
정상 향해~
인수봉(仁壽峰)~~~~
봐도 봐도 모던한게 질리질 않는다.영적인 분위기도.
엎어 놓은 범종 같다.
울리면,제우스 천둥 번개도 이기겠다.
인수봉은 강토의 산증인으로 영적인 존재였다.
백제의 한성 5백년 역사가 여기서 시작되었는데, 김부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이리 적었다.
/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아들인 비류·온조 형제가 졸본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한산(漢山,지금의 북한산)에 이른 후,도읍지를 물색하기 위하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펴보았다/
부아악(負兒岳)은 백제 때 불린 이름으로 인수봉 봉우리에 작은 바위가 애처럼 덧붙어 있어서다.
+
백운대 정상이다.
서라벌說로 배웠지만 서울 유래도 삼각산에 있다.
삼각산이란 이름은 백운대,만경대,인수봉의 세(三)개의 뿔(角)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세뿔->서울~~設이 생겼다.
이하는 정상서 굽어 보니~~
아래로 원효능선이 이어진다.
원효능선 따라 내려가면 북문(北門)이 나온다.
멀리는 고양시,송추~~
하산은 저 아래 계곡을 따라서~~~
멀리 향로봉,비봉,보현봉,문수봉,,,,북한산 주능선이 꼬리를 문다.
백운대가 S자로 두번 구비치면 도봉산(멀리 끝)을 만난다.
북한산은 삼국시대에는 횡악(橫岳)이라고도 불렀다.
횡악(橫岳)???
산세가 한강수를 따라 동서(횡)로 길게 이어져서이다.
횡악이란 명칭엔 백제의 생존 의지가 담겨있다.
백제가 고구려 남진정책을 막기위한 전진기지로 북한산에 산성을 쌓았기 때문이다.
한성 백제는 남으로 남한산성,북으로 북한산성을 쌓았다.
멀리 보이는 길은 북한산 북쪽 사면을 따라 이어진 구파발~송추~일영~의정부 길이다.
앞이 만경대(萬景臺)~~
만물상의 형태여서이다.
신라 말기 풍수의 비조 도선이 강토를 주유하다 삼각산에 올랐다.
만경대에 올라 북쪽을 보니 개경 송악산 아래에 서기가 서린게 아닌가.
이후,북한산은 국망봉(國望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도선(道詵)은 왕건의 부친 왕융을 만나 새 왕조 출현을 일러줬다.
왕융은 기뻐,새 왕조가 얼마나 갈 수 있는지를 물었다.
도선은 천년! 하고 말하려는 순간 송악산 앞에 떡하니 버티고있는 삼각산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황급히 /아, 아니오.삼각산에 막혔으니 500년 가오리다!/ 했다.
5백년 후 역사는 다시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지는데,
정도전은 삼각산에 올라 남쪽 한강을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새 도읍지로 정하고 있었다.
도읍지를 바라 보았기에 망경대(望京臺)로도 불린다.
인수봉 너머 도봉구,노원구가 일대.
정상 바로 아래 반석 위에선 수백명이 소풍을 즐길수있다.
백운대에서 바라본 인수봉~~
인수봉,아니 부아악에 오른 이들은 정상에 있는 저 아기 바위 밑에서 휴식을 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