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월요일 오후스터디까지 다 마치고 집에 들어오니 everymonth에 좋은 음악이 올라와있습니다.
음악을 틀어놓고 있으려니 다른 집중해서 할 일은 곤란하고,그래서 마음이 자연히 미켈란젤로의 못 본 작품으로
흘러가네요.
아침 수업에 참여한 도서관의 이해정씨에게 피렌체시기의 미켈란젤로 책을 빌려주면서 이왕이면 영어책이라서
읽기 불편해도 도판이 좋은 책도 함께 가져가라고 제가 소중히 여기는 책 한권을 빌려주었습니다.
이 책은 꼭 돌려받아야하는 것이라고 단서를 붙이고요.
그 책안에 캄피돌리노 언덕의 광장을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곳을 저녁에 찍어놓은 사진이 있는데
그 느낌에 감동해서 로마에 갔을 때 찾아갔더랬습니다.
그런데 대낮이라 사진이 주는 느낌처럼 멋있지만 않았지만 대신 그리고 올라가는 계단이 독특해서
역시 하면서 감탄한 기억이 나네요. 팔랑 팔랑 넘기면서 다시 사진만 보고 나서 책을 건네주면서
꼭 돌려받아야 된다고 생각할만큼 귀한 책처럼 그렇게 살고 있는가 ,나는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오늘 새로 찾은 싸이트에서 그의 조각,그림,건축,드로잉을 그것도 시대순으로 정리해서 올려놓은 것이 있네요.
어제는 일부러 시대순을 찾아서 애를 먹으면서 보았는데 그러니 같은 일을 해도 이렇게 다르게 접근할 수 있네
신기한 마음,고마운 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이것은 초기 작품인데요 와 소리가 절로 나는 작품이로군요.
계단의 성모라는 제목입니다.저부조의 느낌이 나는 그런 작품,대리석에 새긴 성모자상도 그렇지만 저는
뒤쪽으로도 시선이 자꾸 가네요.

책을 빌려간 이해정씨는 딸이 프랑스의 대학에 가려고 지금 입시를 치르는 중입니다.프랑스에서
그래서일까요?
이탈리아에 가고 싶다고,그것도 피렌체와 베네치아,그리고 로마에서 이틀정도 그렇게 마음먹고
준비하고 싶다고 하니 자신도 그곳에서 딸과 만나 동행하고 싶다고 하네요.
비행기 표를 구입하기 전까지는 그저 구두선에 그칠지 모르지만 그래도 처음 로마에 갔을 때 로마에만도
볼 것이 너무 많아서 고민고민하다가 다음 해에 가면 되지 베네치아와 피렌체는 그렇게 마음먹고
여행일정에서 빼고 말았습니다.그리곤 아직까지 못 가고 있지요.
국내외 상황이 너무 복잡해서 작년말에도 한 해 동안 준비한 여행을 못 가고 말았지요.그래도 제주도에서 보낸
연말의 귀한 시간,덕분에 좋은 인연도 생겼고 가서 살고 싶은 지역도 생겼으니 그다지 아쉬울 것은 없지요.
그래도 가끔은 그 때 갔더라면 무엇을 만났을꼬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작품도 가고 싶다는 마음을 먹고 바라보고 있으니 아,피렌체의 카사 브오나로티에 있구나 그렇다면
하고 갑자기 공상모드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보니 관심이 촉발하는 힘에 대해 생각을 아니 할 수 없군요.

성 마태의 조각상이네요.1503년작이고요.연도를 표기하는 것은 그가 어떤 식으로 변화하는가를 알아보고 싶어서
이기도 하고 읽은 책에서 다루는 시기가 1504년까지라 우선은 그 시기까지의 작품을 먼저 살펴보고 싶어서이기도
하고요.
성 마태하면 제겐 카라바지오의 그림속에서 만난 마태가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있습니다.
사실 그 시기를 살았던 예수의 제자들은 그림속에서 미끈하게 다듬어져서 실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존재로
보여지지만 그래서 오히려 실재감이 모자란다고 할까요?
카라바지오의 경우 그런 거리감을 확 줄여버린 그림이라 제겐 더 의미있게 다가오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둥그런 형상으로 그리거나 조각한 것을 톤도라고 한다는군요.
톤도 형식으로 그린 그림을 본 적이 있는데 그 그림속에서는 그가 나중에 성취하게 될 그런 놀라운 기량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그러니 아무리 대가라도 그가 성숙하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겠지요?
우리 눈에는 그의 전성기의 작품들이 주로 보여지므로 그만 기가 죽어서 역시하고 감탄하고 돌아서면서
실제로 그가 작품을 하기 위해서 고민하고 노력한 시간들은 보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은 조금 더 후에 조각된 것인데 주인공은 동일하지만 뭔가 더 움직임이 있어서 시선을 끄는군요.
피렌체의 정치는 여러번 변화를 겪게 됩니다.
메디치가의 수장 로렌초가 죽고 나서 아들 피에로는 아버지만한 역량이 없었고 결국 도망을 가게 되지요.
당시 피렌체 사람들의 마음을 반은 외경심에서 반은 공포심에서 사로잡은 인물이 있습니다.
사보나롤라라는 이름의 수도사인데요 그의 주도로 일종의 신정체제가 이루어지나 그는 교황과 대립을 하게 되고
결국 교황에게 파문을 당한 다음 죽음을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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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피렌체는 공화정의 체제로 돌아가고 시의회에 장식할 상징적인 인물 조각상이 필요해서
다비드상을 미켈란젤로가 맡게 되는데 이 조각상을 조각하기 위한 대리석은 처음 가져온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대리석에 작업을 하다가 실패하여 구석에서 뒹글고 있었던 대리석이라고 하더군요.
그 일화는 아주 많이 여기저기에서 언급되고 있어서 한번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을 것 같네요.




미켈란젤로 이전에도 도나텔로나 베로키오의 다비드 상이 있었습니다,그러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완성되자 물질에 생명을 불어넣어서 생명을 느끼게 만든 작품이란 평을 받으면서 그는 젊은 나이에
대가의 반열에 올라서고 이제 다비드상하면 누구나 미켈란젤로를 떠올리게 되었다고 하네요.
피렌체 공화국,그 뒤 다시 메디치가가 돌아온 피렌체공국,그 나라는 소멸하고 이제 이탈리아의 한 도시에 불과한
피렌체이지만 한 시기 천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서 새로운 기운을 쏟아붓고 문화의 진열장이 된 그 도시는
그 곳에 있는 예술품으로 인해 관심있는 사람들에겐 언제가 꼭 가고 싶은 곳이 되고 있지요.

시의회에 벽에 두 대가에게 그림을 그려달라는 소데리니의 청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동의를 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앙기에리 전투를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카시나 전투를
그리기로 했다고 하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새로운 기법을 연구하다 실패하고 밀라노로 떠나고
미켈란젤로는 스케치단계를 마무리하던 중 교황의 부름으로 다시 로마로 가게 되었다고요.
그런데 그는 카시나 전투 현장을 그린 것이 아니라 병사들이 목욕을 하던 중 갑자기 부름을 받고 서두르는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문학적 상상력이 뛰어난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더군요.




이 스케치들은 후배들에게 소중한 자료가 되어서 일종의 학습을 위한 교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서로 찢어서 나누어 가졌다고요.
안타까운 일인데,다행히 누군가가 모사를 해 놓은 것이 남아있었다고 하는군요.
여기까지가 미켈란젤로 피렌체 1492-1504의 after인데요 역시 그림이나 조각을 함께 보고 있으니
좋구나 저절로 기분이 즐거워지는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