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익명이란 영화를 볼 때의 일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화가이지만 독창적인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유명 화가의 그림을 모사하는데
너무 잘 모사하여 전문가의 눈을 속일 정도의 솜씨를
보이고 있지요.
그가 모사한 그림중 렘브란트를 모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압권이었지만 제게 더 인상적으로 남은
대사는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프라도가 최고의 미술관이라고 생각한다는 아버지가
아들의 그림이 프라도에 걸리는 것을 볼 수 있다면 하는
그런 비슷한 말을 했었거든요.
그 당시만 해도 프라도가 어떤 미술관인지 잘 몰랐던 제겐
그 말이 참 이상한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루브르나 대영박물관이 아니라 프라도가 그렇단 말인가
그게 무슨 말이지?
벨라스케스의 라 메니나스 (시녀들)이 비평가들이 뽑은
제일 중요한 그림이란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고요.
그러다가 한 십년 이상 미술사 책을 공부하다 보니
아하,그래서 하는 말이 나오게 되네요.
엘 그레꼬,수바란,리베라,벨라스케스,그리고 고야의 그림을
볼 수 있는 프라도에 가기 전에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더 해보고 싶어서
책을 찾는 중에 이상하게 고야에 관한 책은 상당히 자세한
설명으로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할 만한 책이 있었지만
제가 찾은 정도로는 벨라스케스에 관한 책이 없어서
실망하고 있던 중에 도서관에서 시공사에서 번역한
벨라스케스-인상주의를 예고한 귀족화가란 책을 찾게 되었습니다.
단행본이라서 아주 풍부한 정보가 들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하고 읽었는데요
벨라스케스를 다시 볼 수 있는 끈은 만들어주는 책이로군요.

간단한 책소개글도 나와있습니다.
책 소개
17세기 에스파냐 미술을 대표하고,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의 주요 선구자였던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4세의 뛰어난 궁중화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디에고 로드리게스 벨라스케스는 16세기 베네치아의 회화를 연구하면서 사물의 특성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으로부터 당대로서는 독특하게 시각적 인상을 강조하는 걸작들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후 그는 화려하고 다양한 붓놀림과 미묘한 색의 조화를 이용하여 형태, 질감, 공간, 빛, 분위기의 효과를 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소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화가 프란시스코 파체코로부터 필치의 능란함과 완벽함을 배웠으며, 정물화와 초상화를 그리면서 자연의 완전한 모방을 향한 길을 열었다. 귀족적 신분을 완벽하게 이용하며 화가로서의 재능을 실현한 벨라스케스는 광선에 비치는 사물의 본질을 포착함으로써 인상주의를 넘어 20세기 예술의 대담성을 열어 주었다. [엘리트2000 제공]
세빌리아의 이발사란 제목의 오페라 덕분에
세빌리아란 지명이 귀에 익지요?
바로 그 세빌리야가 세비야인가 궁금해할 일이 생겼습니다.
이유인즉 벨라스케스가 세비야 출신이네요.
16세기말에는 아메리카와의 무역으로 세비야가
에스파냐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고 합니다.
그 도시에서 인두세를 면제받는 특권을 누리던 소귀족의
아들로 벨라스케스는 태어났다고 하네요.
아들이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화가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집 근처로 이사갔다고 하는데
일부러 책에서 이런 사항을 명기한 이유는
그가 나중에 벨라스케스의 회화 스승이자
장인이 되고 그를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이라서 그런 모양입니다.
12살 나이에 6년간 계약을 맺고 도제로 그의 공방에 들어간
벨라스케스는 발군의 실력을 보였고
17살에 화법시험에 통과한 후 세비야의 화가조합이 요구하는
면허증을 받은 다음 화실을 차려서 도제를 가르치고
그림 주문을 받게 되었다고 하네요.
스승으로부터 아카데미즘의 교육을 착실히 받았음에도
그는 카라바지오의 영향과 당시 유행하던 악당문학에서
보여주는 자연주의적 경향에 친화감을 느꼈다고 하고
민중 가운데서 모델을 구하는 일에 서슴이 없었다고요.

물론 이 그림을 오래 전부터 보아서 알고는 있었지만
연도를 살펴보니 1618년 18살의 나이에 이런 능숙한 그림을
그리다니 입이 떡 벌어지네요.
성경에서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마 나라면 마리아처럼 행동했겠지만 손님이 왔을 때
마르타의 역할이 없다면?
이런 비유가 과연 옳은가,남성의 입장에서 쓴 것이라
그런가, 교회에서나 성다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강론을 할까 궁금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이 그림을 처음 본 것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그림에 관해서
설명해주는 DK출판사의 그림을 통해서였습니다.
벨라스케스란 화가를 그 때 처음 제대로 보게 되었던 것같아요.
이름도 제 마음대로 벨라스케즈라고 발음하면서 읽었고요.
할머니와 손자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왜 서로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 것일까? 그런 궁금증도 있었던 그림인데
오늘 자세히 보니 조금 더 다양한 것이 보이네요.
할머니의 두 손이 차이가 나서 한참을 바라보게 되기도
하고,부엌에서 사용하는 그릇에 비치는 빛을 잡아낸
화가의 솜씨에 감탄하기도 하고요.

이 그림의 제목은 헤로니마 데 라 푸엔테 수녀의 초상이라고
하는데 그녀는 66세의 나이에 마닐라로 떠나
그 곳에 산타클라라 수도원을 세우고 초대 수도원장을 지낸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제까지 읽은 어느 책의 도판에서도 못 본 엠마오의
저녁식사를 만났습니다.
벨라스케스가 이런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는 것을 물론
몰랐는데요 그것보다는 구성방식이 독특해서 흥미가
느껴지네요.
처음 그림을 보았을 때는 도대체 어디에 주인공들이
있는 것인가 어리둥절했었는데 다시 보니 그림의 전면에는
일하는 여인이 그리고 오히려 뒤쪽 그것도 정면이 아닌
왼쪽 구석에 사람들이 앉아있네요.
화가는 이런 구도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많이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고 신선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외에도 같은 제목의 다른 그림이 한 점 더
올라와 있는데 그린 연도가 똑같이 1620년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 번 보고 나면 잊기 어려운 인상의 초상화가 드디어
탄생을 했군요.
1622년 에스코리알 방문을 위해 마드리드 여행을 하던 중
파첸코의 부탁으로 이 사람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하는데요
이 사람은 펠리페 3세의 국왕 전속 신부이면서 동시에
위대한 에스파니아의 시인이였다네요.
이 그림을 본 가스파르 데 브라카몬테가 은밀히 궁중으로
들여갔는데 그림을 본 필리페 4세와 왕자들은 이 그림에
푹 빠지게 되었다고 하네요.
펠리페 4세는 16살 나이로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된 상태인데
그를 불러들여서 궁중화가로 임명을 합니다.
그리고 변함없이 그를 총애하여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될
무수히 많은 그림들이 마드리드의 왕궁에서 탄생을 하게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