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처음으로 역사모임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강남에서 한 달에 한 번 종횡무진 서양사를 읽기로 정하고
그리스부터 읽어가기로 했거든요.
어제밤 늦게 공부하러 온 한 여학생이 신기한 듯이
쳐다보더군요.
제가 포스트 잇에다가 글씨를 써서 여기저기 붙이는 것을요
그래서 이야기를 했지요.
어디다 쓰려고 이렇게 붙이는 것인가 하고요.
그러면서 이것을 해서 밥이 나오는 것도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더 즐거운 일이 있다고
여러 번 읽은 책이라서 그냥 가서 이야기한다고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겠지만
이상하게 처음이란 설레는 마음이 있어서일까요?
그리스에 관한 글을 여러 권 찾아읽으면서
오랫만에 참 여러 날 공부를 했습니다.
점점 늘어나는 노트를 바라보는 일이 가슴 뿌듯하네요.
아침에 길을 나서기 전에 everymonth에 들어갔더니
버지니아의 클레어님이 다시 박물관에 가서 본 조각과
그림을 올려주셔서
조금 짬을 내어 그림을 더 보려고 들어와 있습니다.
해금 연주를 틀어놓고 그림을 보는 이 시간이
고요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네요.


공동체의 삶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소외감을 잘 보여주는
화가이지요.
그렇다고 공동체의 삶이 다 행복하다 그런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근대가 우리에게 선물한 것과 비례해서
우리에게서 뺏어간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네요.

화가의 자화상입니다.
공동체라고 말하고 나니
닥터 고토의 진료소란 제목의 일본 드라마가 생각납니다.
오키나와에 있는 한 섬이 배경인 이 드라마에서는
바로 그런 공동체의 정서가 아직 많이 남아있어서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서 방황하던 도시인들이 들어와서
처음에는 당황하면서 살다가 여기가 마음의 고향이라고
느끼게 되는 그런 곳으로 그려지고 있더군요.
그런데 그것은 장소의 문제만은 아니겠지요?
자신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무엇으로 설정하고 살아가는가
자신이 마음의 주인이 되어서 살고 있는가도
중요한 부분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추석 전 날 보람이랑 외출을 했었습니다.
마침 공연 티켓을 선물받은 것이 있어서요.
그런데 공연을 보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종로에 있는 제과점에서 좋아하는 케익 한 조각을 먹고 싶다고
해서 들어가서 먹던 중 아이가 말을 하네요.
엄마,나는 이런 곳에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고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면 좋을 것 같애.
그래서 제가 말을 했지요.
어떤 사람을 만나면 좋을 것 같아라고 생각해도
실제로 사람을 만나보지 않으면 그것은 알 수 없으니
미리 규정해서 이런 사람,저런 사람 그렇게 정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기회가 생기면 사람을 사귀고
아직 일학년이니 너무 다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그 날의 대화가 생각이
나네요.



아들이 기숙사로 들어가고 나니
집도 덜 어질러지고 더 조용하지만 어째 이상한 기분입니다.
사람이 한 사람 들고 나는 것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구나
이 아이들이 다 커서 집을 나가서 살게 되면
어떤 기분으로 나는 살아가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아주머니가 어느 날 이야기를 하네요.
승태가 기숙사에서 돌아오는 날이 역시 사람사는 집
같지요?


호퍼의 그림은 한 점 한 점이 굉장한 이야기를 담고 있군요.
소설가가 한 편의 소설에서 담으려고 하는 것들이
화가의 붓으로 한 점에 압축되어 담긴 느낌
그렇다고 그가 일부러 작정하고 이야기한다기 보다는
그림에 우리 스스로 반응하게 만든다고 할까요?


클레어님과의 인연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녀가 처음 리스폰스 페이퍼에 관해서 말하면서
보내온 쪽지로 인해 서로 연락하게 되고
실제로 대전에 가서 함께 백제의 흔적을 찾아서
여행을 여러번 하기도 했었지요.
글로만 만나던 사람을 실제로 만나서 함께 한 시간들
그 시간의 흔적이 쌓여서
서로 교감을 나누고
멀리 떠나기 전에 일부러 챙겨서 들고온 박스에 감동했던
기억,
그리고 버지니아에서도 그녀의 미술관에 가면
일부러 기록을 남겨서
우리들에게 올려주는 덕분에
버지니아가 우리들 삶의 일부로 스며들게 되는 것
그녀의 그림에 촉발되어 앉아서 다시 그림을 찾아보게 되는
그런 인연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아침
이제 나갈 시간이 되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림 보기를
접어야 하지만 마치 향을 피운 기분으로
일어날 수 있는 아침이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