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에는 천경자님의 그림이 기증된
방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 가면 늘 한 번씩은 둘러보지요.
그런데 금요일날 콩바스전을 보고 있는 중에
안내방송이 나옵니다.
3시부터 천경자전의 설명이 있다고요.
설명이라면 귀가 솔깃한 반쪽이님이 콩바스전 다 보고
그 곳까지 둘러보자고 하네요.
아직 점심을 못 먹고 그림을 보던 중이라 어쩔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흔지 않은 기회이니 그러자고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도슨트가 콩바스전에서 설명을 잘 해주어서
기분좋게 감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 바로 그 도슨트네요.
그렇다면 이 방에서도 새롭게 볼 수 있는 것이 많겠다 싶었는데
역시 도움이 상당히 많이 되었습니다.
지난 해 현대갤러리에서도 천경자전 일종의 회고전 형식의
전시가 있어서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설명이 더 귀에 잘 들어오네요.

그녀의 자전적인 것을 설명하면서 도슨트가 한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일본에 공부하러 가고 싶어하는
당시의 딸을 선뜻 보낼 부모가 없었겠지요.
그녀는 하다 하다 가능성이 없자 미친 사람 흉내를
냈다고 하네요.
그렇게되자 결국 손 든 부모는 일본행을 허락했다고요.
그런 간절함이 있었기에 그림으로 평생을 살 수 있었겠구나
지금도 아닌 그 시대에 하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돕니다.
내 인생에 그런 간절함이 있었나 하는 비교하는 마음이
들어서이기도 하고 그녀의 삶이 갑자기 가슴을 후려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일요일 아침에 찾아보는 천경자 갤러리에서 만난
40년대 작품입니다.

생태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전시장에서 만난 작품입니다.
볼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림이기도 하지요.
이번에는 그녀의 개인사와 얽힌 이야기를 듣고 나서
바라보는 캔버스가 이전에 그 그림을 보는 것과는
다른 마음으로 보게 하더군요.


50년대 작품으로 올라와 있는 세 점입니다.
그 중 두 번째 그림의 제목이 내가 죽은 뒤이더군요.
혼자서 4명의 아이를 키우면서 살아야 했던 화가에게
삶은 상당히 힘든 그래서 죽음에의 유혹을 견디기 어려웠을
그런 고역일 수도 있었겠지요.
그것을 이기는 힘이 바로 그림에서 나온 것일까
누구에게나 삶의 고통을 이길 수 있는 그런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이 있으면 그것이 강한 무기가 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작품을 그냥 스쳐 지날 때는 몰랐습니다.
그저 색감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제목이 자살의 미라고 되어 있었고
도슨트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다시 보니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다가오네요.
신체의 한가운데 그려진 믹서기의 날카로운 칼날이
한 인간을 갈아대는 상황이라니
갑자기 몸에 고통이 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이
많이 있겠지요.
우리가 함께 사는 공간이라고 해도 과연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무력감에 도망만 다니면서
사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많이 하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마그리뜨 전에서도 얼굴이 잘라져서 따로 떠 있는
그림을 보았는데
오늘 인터넷 갤러리에서도 이런 그림을 보게 되네요.
화가가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보여주는
그런 그림과 맞닥뜨리고 있으려니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입니다.

이 작품은 길례언니라는 제목으로 전시장에도 걸려 있는
것인데요
그녀의 인물에게는 머리에 꽃이 달린 여자들이 많더군요.

그녀의 자화상인 모양인데 제목이 외로울 고입니다.

저는 그녀가 다닌 여행,그 결과로 태어난 그림들에
관심이 많이 가더군요.
여행 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그 여행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 다 다르겠지요.
그녀는 그림과 글이 다 가능한 관계로 글로 그림으로
여행에 대한 반응이 남아 있고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그림을 통해 글을 통해
이차적인 반응을 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여행 그림은 너무 많아서 천천히 시간나는 대로
더 보아야 할 모양입니다.
스팅의 음반을 걸어놓고 그림을 보는 일요일 아침의
한가한 시간을 즐기고 나가는 발걸음이 가볍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