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교육
내 아이를 더 밝고 건강하게 키울 수 있는
정보교환과 질문의 장
우리는 재벌 부부
"We are finally back home!!!"
두 돌이 지나고 한국에 가서 미국에 대한 기억이 없던 막내를 제외한 세 아이들이 깡총거리면서 좋아했다. 아, 아이들의 고향은 이 곳이구나. 나는 지금 막 고향을 떠나왔는데, 이 아이들은 고향에 돌아와 이렇게 기뻐하는구나. 나도 모르게 코 끝이 시큰하고 가슴이 뭉클했다. 남편과 나, 네 아이들, 그리고 한국에서부터 데리고 온 멍멍이 한 마리, 우리 집 일곱 식구는 이렇게 '고향'에 돌아왔다.
미국에 돌아와 일주일을 호텔에 머물면서 오전에는 살 집을 찾아 구경을 다니고, 오후에는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쉬면서 바쁜 일정을 보냈다. 아이들이야 아무 것도 모르니 그저 여름 휴가를 온 것처럼 즐거운 하루 하루였지만, 우리 부부는 집을 찾는 일로 머리가 아프고 날마다 쌓여가는 호텔비와 렌트카 비용으로 답답한 나날들이었다. 집을 보러 다니는 것도 관광인듯이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고 밤이면 나란히 누워자는 아이들을 보면서 불투명하기만 한 우리 가족의 미래가 두렵기도 했다.
처음에는 새로운 곳으로 가보자고 집을 보러 다녔는데,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가기 전부터 살던 쪽으로 돌아오자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개학이 가까워지니 시간에 쫓기고 돈도 여유가 없는 가운데 우선은 집이 마음에 들고 가격도 적당해서 이사를 감행했다. 막상 아이들의 학교를 등록하면서 보니 학군이 그다지 좋은 곳이 아니었다. 그다지 선택의 폭이 넓은 상황이 아니었기에 눈 딱 감고 보내보자 하면서 마음을 비웠다.
그 곳에서 꼬박 2 년을 살면서 참 많은 것을 겪었고 우리 부부는 진정한 어른이 되는 과정을 또 한번 더 지나갔다. 한국에서 돌아 올 때 이미 사업도 기울만큼 기울었고, 나는 미국에서 다닐 직장도 제대로 구하지 못한 채 맨손으로 돌아왔지만, 그래도 설마 굶어 죽기야 할까 하는 생각으로 돌아왔다. 나름대로 한국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겪을 만큼 겪었으니 더이상 고생할 것이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나 보다.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하면 뭐든 잘되려니 하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낮아지는 길은 참 길고 험한 것을 우리 부부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한번 낮아지는 훈련을 시작한 사람들은 아주 납작하게 엎드리는 법을 배우기 전에는 절대로 그 훈련을 졸업하지 못하는 법이다. 기왕 엎드리기로 작정했다면 남보다 더 낮게 엎드릴수록 현명한 것이라는 것도 미처 몰랐다. 어떻게 해서든지 더 내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삶은 더 아래로 치닫게 마련이고 고통은 커질 뿐이니 말이다.
꼬박 두 해를 남편은 그래도 사업을 다시 살려보려고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나는 나대로 이리저리 하루에도 수 십통씩 이력서를 내며 안간힘을 썼지만 단 한 군데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경기가 나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크게 좌절이 되었고 서서히 앞날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나의 퇴직금 등의 돈들은 조금만 더 있으면 바닥을 드러낼 것이고, 남편의 사업은 일어설 기미가 안 보이는데, 나갈 돈들은 점점 밀려가고, 아무 것도 모른 채 학교 생활을 즐기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가슴이 찢어질 것같았다.
전기세를 못 내어 전기가 끊어지기를 두어 번, 수도세를 못 내어 수도물이 끊어지기를 또 두어 번, 쌀독에 바닥이 보이기를 또 몇 번, 집 값을 못 내고 밀려서 쫓겨날 것을 두려워하며 밤잠을 못 이룬 것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 때마다 아이들과 모여앉아 우리 가정의 경제적 상황을 정직하게 털어놓았다. 한 치도 더 보태거나 빼지 않고 우리가 처한 상황을 그대로 들려주고 아이들의 고사리 같은 손을 함께 맞잡고 기도를 하곤 했다. 지금 이 상황도 우리가 살아있으니 겪는 상황이니 생명에 대해 감사하고,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상황을 헤쳐갈 수 있게 도와주실 것이 분명한 하나님께 간구하는 예배를 드리곤 했다. 아이들과 함께 기도하자고 하고 아이들이 눈을 감으면 내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멈추질 않아서 막상 내가 기도를 할 차례가 되면 목이 메어 기도가 나오질 않았다.
신기하게도 아이들과 기도를 하고 나면 기적처럼 그 상황이 해결되고 또 얼마간 살아갈 여유가 생기곤 했다. 무심코 열어본 우체통에 정성스럽게 봉투에 넣은 현금이 전기세 액수였고, 꼭 만나고 싶다고 해서 나가보면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수도세 액수만큼의 돈을 궂이 쥐어주고 가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도 저도 아닐 때에는 더이상 희망이 없겠다 싶은 남편의 사업을 통해 생각지 않게 부족한 것이 채워질 때도 있었다.
우리 부부가 늘 해오던 농담이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주어진 축복의 식탁에 수저 두 벌만 더 놓고 아이들 덕에 사는 것이라고. 그 때처럼 이 말이 실감이 났던 때는 없는 것같다. 아이들의 기도는 신기하게도 다 응답이 되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의 믿음은 그저 글로만 읽고 귀로만 듣는 믿음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하나씩 경험을 통해 단단하게 쌓여가게 되었다. 막연한 지식의 신앙이 아니라 자신만의 삶의 간증이 있는 신앙인 것이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두 멕시칸 아이들이 대부분인 학군에 학교의 평균 성적은 다른 학교들에 비해 하위에 머무는 상황이니 아이들의 학교를 생각하면 어떻게 해서든 집을 이사해야 하는데 당장 하루 하루가 풍전등화이니 좋은 학교들이 있는 지역으로의 이사는 꿈도 꿀 수 없는 소망이었다.
어차피 바꿀 수 없는 환경이라면 차라리 그것을 사랑하자.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늘 가르쳐왔던 것을 이제는 내가 실천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욕심을 버리지 않으니 참 어려운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곳에서 이사를 나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서,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도 최선의 것을 얻을 수 있을까로 생각의 각도를 바꿔보기로 남편과 결심을 했다.
미국의 어느 통계를 보면 아빠와 저녁식사를 자주하는 아이들일수록 학교 성적이 올라간다고 했다면서 남편이 그럼 우리 집은 그 통계에서 말하는 너무나 이상적인 집이 아니냐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이 사무실을 얻지 따로 얻지 않고 날마다 집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은 날마다 아빠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곁에서 보는 내 마음은 타들어갔지만 아이들은 수 년 만에 독차지하게 된 아빠와의 시간을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아빠가 학교에 데려다 주고, 아빠가 학교에서 데려오고, 아빠와 방과 후 다함께 아이스크림도 먹으러 가고, 저녁도 온가족이 다함께 먹고, 아빠가 자기 전 축복기도도 방마다 찾아가서 해주고...아빠의 넘쳐나는 시간이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부어지는 것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라는 것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기에 때로는 그런 남편의 모습이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저럴 시간에 이력서라도 써서 취직이라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두 해를 더 바닥을 경험하고서야 우리 가족은 이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이 생각지 않게 안정된 회사에 취직을 하게되었고 나도 거의 공짜로 일해주다시피했던 가정폭력 비영리재단에서 나와 아동학대방지위원회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간신히 끼니만 연명하는 듯했던 우리 가정의 경제에도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작년 봄 이런저런 이유로 집을 이사해야만 할 상황이 생겼을 때, 아직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형편도 아닌데 이사를 해야하는 상황이 또 무섭고 두려워서 온가족이 또 눈물로 기도하면서 준비를 했다. 그 얼마 후 어머니학교 자원봉사를 마치고 Daly City 에서 내려오는 길에 운전을 하며 기도를 하는데 문득 망치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네가 살 집을 내가 다 공사하고 손 보아서 준비해놓았다. 사랑하는 딸아, 무엇을 걱정하느냐..."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귀하다고 하는데 나는 늘 그게 어려운 사람이었다.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 우리 가족은 과분한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우리의 실력에 몇 백 배가 되시는 좋은 곳으로 새로 이사를 하고 아이들도 다 학교를 옮겨주고 이사짐을 정리하면서 기쁨에 겨워 하던 기억이 새롭다. 언덕 위에 있는 우리 집 창문에서 내다보면 멀찌감치 골프장도 보이고, 도시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집이다. 방문하는 사람들마다 야경에 감탄을 하고 구태여 분위기 좋은 커피숍에 갈 필요가 없다고들 한다.
옛날의 철없는 우리 부부였다면 이 집이 내 집도 아니고 잠시 빌어 세를 사는 집인데 뭐가 그리 좋을 게 있을까 하고 집을 사고 싶은 욕심에 가슴앓이를 하면서 즐기지 못했을 것이다. 남들이 좋은 집을 산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배앓이도 함께 했을 것이다. 무엇을 해도 어차피 내 집도 아닌데 하면서 그다지 감사한 마음도 들지 않았을 우리 부부이다. 하지만 초고속 초고난이도의 고난의 학습과정을 마쳐가는 우리 부부는 이제는 바닥에 엎드리다 못해 아주 붙어서 지내라 해도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바닥에 붙어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방이 많고 마당은 운동장같은 비싼 집을 소유하지는 못했어도, 방마다 내 아이들이 천사처럼 잠들어있고, 내 손때가 묻은 싸구려그릇들이 부엌에 가득하고 고난의 과정을 함께 수료하느라 나만큼 주름이 깊게 패여가는 남편이 함께 있으니 우리는 감당할 재산의 양이 이미 넘치는 재벌부부 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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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hua
'09.10.19 10:38 AM혹시나 해서 육아코너로 오니 반가운 글이...
하나님을 믿어야만 모든 것이 이루어 진다고(반드시 교회에 나가야만 하고..)
비장한 자세로 말하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동경미님의 글을 읽으면서
얼씨구나.. 할 것 같아서 마음이 쫌.. 그렇습니다.2. 동경미
'09.10.19 11:29 AMphua 님,
걱정해주시는 따뜻한 마음에 감사를 드리고요.
저도 신자이지만 극단적인 사고방식에는 저도 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사람이네요.
요즘 여러가지 어려운 분들도 많을 것같아 함께 나누고자 올렸으니까 그저 저희 가정에 생긴 따뜻한 경험으로 보아주심 좋을 것같아요.3. hshee
'09.10.19 9:24 PM아직 아이는 없지만 이글을 자유게시판에서 읽고나서 참 많이 반성하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의외의 댓글들에 놀라게 되었습니다.
저도 기독교인이라 구하면 주신다는. 새한마리 먹을 것도 미리 준비해주신다는 이야기가 너무나 자연스러웠는데, 그게 익숙하지 않은 분들에게는 지금의 이기적인 기독교인들의 행동과 유치한 기복신앙과 겹쳐 거부감이 드는가봅니다.
교회에는 처음 와본 남편과 찬송가를 부르는데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벗은 형제여' 라며 씩씩하게 부르던 찬송가 가사가 갑자기 어찌나 섬뜩하게 느껴지던지.. 생경함은 곧 거부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때처음하게 되면서부터, 모태신앙이나 다름없던 제가 남편의 입장에서 설교말씀과 성경말씀을 대하며 많은 부분 새롭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낮뜨거워지는 장로님들의 기도들.. 정치와 신앙을 구별하지 못하는 어른들을 보며 한국교회가. 한국인의 기독교가 가야할 길이 참 멀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경미님의 이 글은 다른 내용인데 갑자기 기독교에 대한 화두로 떠오르게 되었네요.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좋은 글 올려주세요.4. 동경미
'09.10.19 10:32 PMhshee님,
저도 앳글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네요.
기독교인들의 많은 각성과 회개가 많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 그리고 저부터라도 남을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 행동 하나 하나를 조심하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의 현실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너무나 혼란스럽고 신앙생활에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여기 저기에서 힘을 쓰는 위치에 있는 부작용으로 종교 자체까지 욕을 먹으니 너무나 안타깝네요.
저희 집 얘기인데, 갑자기 종교논쟁의 소재가 되어 저도 송구합니다.5. 행복
'09.10.20 7:59 AM동경미님,
미국에 사신다니, 핼로우~~~ 하하...
저는 오늘 처음으로 여기 육아/교육 뜨래드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애도 없지만, 키친 하고 자유만 관람(?) 하고 있는데, 오늘의 최고 인기글, 지웠습니다 를 보다, 내용이 궁금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어요.
이 글이 그 지우신 글 같은데요...
여기 윗 분 들은 기독교인 이신 것 같고, 많은 분들이 단지 기독교 인이기에 이 글을 읽고 싫어(?) 한다고 생각 하시는 듯 한데, 저는 이렇게 생각 합니다.
폴리티칼리 코랙트니스... 아시죠? 종교/정치/인종 이런 이야기는 원래 민감하기에, 끼리 끼리 모인 자리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미덕 이라 생각 합니다. 아무대서나 종교 이야기 하는 사람, 아무 대서나 정치 이야기 하는 사람, 아무대서나 인종 문제 이야기 하는 사람들에게는 동의 하지 않는 이상 반감이 있게 마련인지라, 안하시는 것이 좋고, 미국에서는 법으로도 금지 되어 있는 것 아시죠?
저는 학교에서 일합니다. 한국 학생회 어드바이져를 하고 있는데, 학생들 대부분은 입양아들입니다. 몇년전 추석 행사겸 한국 음식 파티를 했는데, 총장/부총장 등 몇 사람들도 오고, 한국인 교수들도 왔더랬어요. 그런데, 거기서 나이 많으신 한국인 교수님이 음식 먹기 전, 갑자기 일어나셔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저도 그리고 모두다 당황해서 그냥 조용히 기도 했는데요, 이거 불법 이거든요. <--학교나 공공기관에서 종교 행사 안됩니다.
많은 재미 한국 분들이 직장 생활을 제외 하고 사회 생활이라고는 거의 종교 생활이 대부분이라, 당연히 밥먹기 전에 기도 하는 것이 법이라 생각 하셔서 그리 하셨을 거라고, 나중에 총장 이하 한테 불려가서 떠벌 떠벌 하고 학생들에게도 대충 이해 하라 떠벌 떠벌 했는데요....
저는 종교인에게 안 좋은 감정 없습니다만, 윗 이야기 처럼 한번씩 허걱 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자유게시판의 많은 분들도 그런 점을 지적 하신 것 아닌지 생각 됩니다. 혹시 네가티브 반응에 섭섭 하셨겠지만, 제가 보기엔 아주 흔한 "허걱" 표현이 아닐까 싶어요.
끝으로, 많은 사랑이 듬뿍 있는 가정에 더 큰 행복 가득 하세요!!!6. 행복
'09.10.20 8:24 AM좋은 의미로 들으신다니 감사 합니다. 써 놓고 나서, 에이 괜히 썼나 하고 아직 안 읽으셨으면 지우려고 왔는데.... 하하..
그런게요. 많이 틀린 비유 같지요? 그런데, 기독교 인이 아니면, 그게 그렇게 틀린 비유가 아니지 않나 하는 것이 또 하나 콕 찝자면 찝어질 수 있는 뽀이트 인 것 같아요. (한글이 서툽니다. 용서 하세요.) 그래서, 아무리 친해도 정치/종교/인종 이야기 안 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여하튼, 아동 학대 지위원회라... 그럼 혹시, 얼마전에 거기 칼리에서 있었던...19년 동안인가 인세스트 되었다가 풀려난 여자랑 두 딸들, 그런 일 담당 하시나요? 거기 카운티인가요, 혹시?
와~~ 아주 힘드시겠지만, 큰 일 하시네요. 워낙 사이코들이 많아 놔서 많은 일 하셔야 겠지만, 좋은 일 많이 하시고 큰 복 받으세요. :)7. 동경미
'09.10.20 8:25 AM행복님,
친절하고 명쾌한 조언 아주 감사드립니다.
저도 카운티 정부 공무원으로 아동학대방지위원회에서 일을 하고 있지요. 학교를 관장하는 County Office of Education 과도 함께 일을 합니다. 모처럼 비슷한 분야의 한국분을 만나니 반갑네요.
황당한 경험을 하셨군요. 저의 경우와는 다소 다른 비유인 것같긴 하지만 좋은 의미로 듣고 갑니다.
저에 대해 반감을 표시하셨다고 해서 섭섭한 감정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고요.
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니 오히려 감사하지요.
관심이 없다면 아무 표현도 할 필요가 없는 게 보편적이니 부족한 글에 그동안 많은 관시을 가져주시고 사랑해주시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나오면 또 쓴소리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또 제 입장에서는 전문 작가가 아니니 모든 분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글을 잘 써나갈 재주꾼은 못되니 서로 틈이 생기는 게 아닐까 하네요.
사실 제가 그동안 올린 글들은 처음에는 공개용으로 쓴 글들은 아니었고 저희 아이들은 위한 엄마의 육아서 정도로 시작을 했는데, 이런 저런 인연으로 글을 올리게 되었지요.
어쨌든 전문성도 없는 글인데 많이 관심 가져주시고 제 글이 리언 저런 사연으로 베스트까지 올라가서 저도 쑥스럽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하고 그랬네요.
제가 있는 곳은 캘리포니아입니다. 어디신지는 모르지만 좋은 오후 되세요.8. 행복
'09.10.20 8:32 AM거기는 오후군요. 여기는 팬실베냐 입니다. 벌써 깜깜하네요.
밥 먹고, 내일은 뭐 해 먹나...하고 여기 키친 함 보러 왔어요. 오랜 만에... 그러다, 자유로 뽕 가서, 최고 인기글 읽고, 음.... 뭐지? 하고 여기 까지.... 하하...
저는 자유 글 읽다가 정말 이해 안될 때 많아요. 교포라서 그런가 보다 생각 하고 그냥 외워요. 그런데, 오늘은 동경미님도 이민 오셨다고 하고 해서, 한번 써 봤습니다. 헤헤..
언제 한번 동부 오시면 연락 주세요. :) 제가 뉴욕/팬실베니아 커버 하는 왕발 입니다. 헤헤...9. 동경미
'09.10.20 8:37 AM동부에 계시는 분이군요.
지금쯤 가을 단풍 참 이쁘겠네요^^
종종 오셔서 얘기 나누면 좋겠네요.10. 소릉
'09.10.21 5:14 PM항상 동경미님 글을 신랑한테 말해주는데..이번글은 신랑이 참 놀랄것 같습니다. 저희는 애기 갖기전에..고생을 조금해서 지금은 조금 안정적이라도 항상 아낄려고 노력하는데 님글을 보면서 아주 안정적이라고 생각을 했었거든요.다시한번 저를 반성하게 됩니다. 좋은 글 고맙고 또 계속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_^
11. 동경미
'09.10.21 11:48 PM소릉님,
작년 초까지 참 힘든 시간이 있었어요.
그 이전에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이었기에 더 힘든 부분도 있었구요.
겪는 동안에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생각에 많이 힘들었지만...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저희 가정에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고난 이전과 이후의 우리 가족들이 많이 달라졌으니까요.
편안할 때에는 이런 저런 분란도 있었지만 막상 위기 상황이 되니 처음에는 원망과 불평의 시간들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서로 힘을 합쳐 잘 지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하나가 되는 귀한 경험을 했네요.
가족이라는 게 그래서 필요하구나...하며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