桐紋
五七桐
内閣総理大臣紋章桐紋も参照
桐紋が皇室御用達の紋になったのは元寇襲来の少し前の鎌倉時代中期と言われる。家紋としてよく見られる五三桐やそれにまるで囲ったものは、太閤記や伝承などで農民出身とされている豊臣秀吉が用いたことから「家紋のないほどの一般庶民がなんらかの事情で家紋を必要とする場合(紋付袴の着用等)に用いる家紋」としても使用され、上流階級とは逆の理由で庶民の間で一般的に流布した。また、現在では貸衣装の紋としてよく使われる[2]。
明治政府が建てられ、菊紋の法的規制が布かれる中、桐紋については、菊紋と同じような法的規制などの対処は採られなかった。室町から続く将軍家の家来に対する桐紋の譲渡が頻繁にあり、家の家紋として使用しているものもいたため、それを配慮したためだと考えられている。しかしながら、権威が失墜したわけではなく、五七桐が内閣・政府の紋章として事例書などを下付する場合など慣例的に用いられ、最近では、海外において日本の総理大臣の紋章として定着しつつある。桐紋はもともと政府を表す紋章としての性格があり、小判などの江戸時代の貨幣や明治以降の貨幣、現在の最高額硬貨である500円玉にもその刻印が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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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오동나무 문양)
57동(桐)
내각총리대신(수상) 문장인 동문(桐紋)도 참조
오동나무 문양이 황실 납품업자의 문양이 된 것은 원구(원나라)내습의 조금 전의 가마쿠라 시대 중기라고 말해진다. 가문(家紋)으로서 잘 볼 수 있는 고산노키리나 거기에 마치 둘러싼 것은, 다이코키나 전승등에서 농민 출신으로 되어 있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용한 것으로부터「가문이 없을 만큼의 일반 서민이 하등의 사정으로 가문을 필요로 하는 경우(문부과<관리들이 입는 문양이 새겨진 옷> 의 착용등 )에 이용하는 가문」으로서도 사용되어 상류계급과는 반대의 이유로 서민의 사이에 일반적으로 유포했다. 또, 현재는 빌려주는 옷의 문양으로서 잘 사용되고 있다[2].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고 국문(국화문양)의 법적 규제가 펴지는 중, 동문(오동나무 문양)에 대해서는, 국문과 같은 법적 규제등의 대처는 채택하지 않았다. 무로마치로부터 계속 되는 막부의 하인에 대한 동문의 양도가 빈번히 있어, 집안의 가문으로서 사용하고 있는 것도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배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렇지만, 권위가 실추한 것이 아니고, 57동이 내각·정부의 문장으로서 사례서등을 하부 하는 경우등 관례적으로 이용되어 최근에는, 해외에서 일본의 총리대신(수상)의 문장으로서 정착하고 있다. 동문은 원래 정부를 나타내는 문장으로서의 성격이 있어, 엽전등의 에도시대의 화폐나 메이지 이후의 화폐, 현재의 최고 금액 동전인 500엔에도 그 각인이 있다.
출처:야후저팬
번역:리치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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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치노기리(57동<桐>)의 일본 자료 번역--세우실님의 이명박 친일파란 글과 관련
리치코바 조회수 : 417
작성일 : 2009-01-18 13:13:40
IP : 118.32.xxx.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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