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살아보니]미국식 가치의 붕괴 소리
입력: 2008년 09월 19일 17:39:52
내가 한국에 온 지 20년이 지났다. 귀화한 것도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5년째다. 한국에 살면서 큰 일이 터지지 않고 지나간 해가 별로 없었던 것 같고, 나는 그것이 한국의 특징인 것 같았다. 한국에 살기 시작한 후로 엄청난 대형 사고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비롯한 소위 부실공사로 인한 대형사고, 국내선 비행기 추락사고 등이 이어졌다. 성수대교가 붕괴한 후 몇 년간 나는 한강 다리를 건널 때면 그 일이 떠올라 어서 빨리 지나가려고 서둘렀다.
그 다음은 거대한 액수의 비자금 사건들이었다. 모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이 4000억원이라는 뉴스에서 ‘일본 정치인들과는 금액의 자릿수가 두 개 정도 더 많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어떤 면에서는 두둑한 배짱에 감탄했다. 일본의 뇌물 수수 최고 액수는 다나카 전 총리가 미국의 록히드사에서 받은 5억엔(약 50억원)이었는데, 비자금 스케일이 100배 정도 차이가 났다.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심판이 내려진 후, 노사 분규가 심화되어 대기업의 도산과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이어졌다. 아무리 큰 일이라 해도 이 IMF만큼 큰 사건은 없었다. 1997년 9월쯤까지 달러당 800원 정도였던 환율이 두 달 정도 한때 1700원까지 솟아올랐다. 많은 주식이 휴지조각이 되고 부동산 급매물이 쏟아졌다. 금융위기는 아시아를 강타하여 일본도 많은 은행들이 도산하여 금융 빅뱅이 시작되고 있었다. IMF사태는 모든 국민들에게 크고 작은 피해를 가져왔다. TV에서 정부 고위당국자가 “이제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맸고…” 운운할 때면 그 무책임한 태도에 대다수의 국민들은 화를 낼 힘조차 없었다. 금 모으기 운동에 나도 동참하여 아이들의 돌 반지를 모두 내놓았다.
그리고 이 IMF에 이어 도래한 카드파산 사태는 한국인의 전통 가치관을 뿌리째 흔들었다. 먼저 한국인의 이혼율이 미국 다음을 차지했다. 경제적 이유로 헤어지는 신종 이혼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동안 출산율은 세계 최저수준으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굉장히 큰 변화는 자살률 급증이다. 내가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자살률이 매우 낮았던 이 나라가 금융위기 등을 통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가장 자살률이 높은 나라로 변했다. 대가족주의가 붕괴하여 결혼에 대한 가치관도 크게 바뀌었다. 대학을 졸업할 정도의 나이가 되면 ‘국수는 언제 먹어요?’라는 인사를 받았던 여성들은 지금 20대 후반을 넘어서도 미혼인 경우가 많다.
한국의 전통가치는 금융위기와 함께 사라져가고 있고, 소위 ‘보편적 가치’로 여겨지는 미국식 사고방식과 생활스타일이 이 나라의 것으로 정착해서 미국식 가치가 한국인의 생활을 지배하기 시작한 지 오래다. 이런 현상은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5년5개월이나 집권한 고이즈미 정권은 일본의 체질을 미국 스타일로 바꿔놓았다. 그 득과 실이 현재 심판대에 올라 있다. 그러나 이런 미국식 ‘보편 가치’는 최근 금융은행들의 연속 파탄 사태로부터 소리내어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 사태를 초대형 사건 속에 하나 더 추가할지 여부는 우리의 과제이다. 지혜롭게 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한다.
<호사카 유지|세종대 교수·일본학>
출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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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살아보니]미국식 가치의 붕괴 소리
리치코바 조회수 : 733
작성일 : 2008-09-20 16:3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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