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연휴 침묵을 지키며 고향 이곳 저곳을 다니며 디카로 사진도 담고 내 어린시절을 회고 하며 아이들과 아빠 시골아이때
이야기도 들려주며 비우는 것을 행했습니다. 비우고 나니 조금 멍 해지는 것 같더니 또 새로운 이야기가 샘솟는 기분입니다.
내어린시절 참 가난했었다. 하지만 가난을 부끄럽거나 분하게 여긴적이 없다. 그 가난을 지혜롭게 이겨 내는 것과
스스로 공부하는 것 그리고 농촌이 곧 희망이라는 생각을 어린시절부터 해 왔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공부를 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농대, 농대 대학원 석사, 농대 대학원 박사까지 마치고 대학생도 가르치고 농업인들과 기업인들, 소비자 단체,
공무원, TV특강, 현장 농부, 현장 농업CEO가 될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내 머리는 샘솟는 지혜의 공간이라
생각을 해 본다. 그 이유는 내가 농촌에서 공부를 강요 받지 않고 내 스스로 창의적 발상을 갖게 된 것이 지금 내겐 큰 희망이고
힘이 되고 있다. 내 아이들도 그래서 농촌에서 스스로 공부하고 놀고 느끼고 행하길 바랄뿐이다. 이번 추석연휴는 휴대폰도,
인터넷도 잠시 거두고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내 고향 이젠 호수같은 큰 저수지가 남들 보기 좋은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가 자랑삼아 하는 말 문중이 커서...집안 형님들이 3주전 벌초를 끝내고 지쳐서 남겨둔 할아버지, 할머니 묘를 우리 삼형제가 벌초를 했다.
우리집은 남자들이 장수를 한다. 그리고 여자들은 단명을 하셔서 꼭 재혼을 하셨다. 그래서 할머니가 둘씩 계신다.
어린시절 집에 아궁이에 불땔 나무가 부족하여 이 솔잎은 남아돌지 않았는데 이제는 10여cm까지 부숙퇴비가 되어 있다.
나와 우리가족이 가장 존경하는 어머니가 계시는 곳은 이미 한번 벌초를 했는데 더 다듬고 가기로 했다. 어머니도 재혼을 하셔서
우리 7남매를 남기셨다. 참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내 어머니...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 것은 무엇일까...
이곳 저곳 무덤들만 농촌에는 늘어 나고 있다. 모두 도시로 떠나서 돈벌면 무덤만 크게 쓴다. 내 아버지 살아생전 남기시는 말씀 소박하게 하거라였다.
우리 어머니 힘겨운 한을 남기신 큰형님 무덤도 벌초를 했다. 큰형님은 어머니 본 부인이 남기신 큰아들의 무덤이다.
욕심이 너무 많아서 우리 7남매 키우는데 할아버지로부터 모둔 재산 받아 욕심챙기신 큰형님...집안 오래된 유품들까지
아버지 몰래 팔아버리신 형님...그래도 우리 형제들 원망하지 않고 그 형님 무덤 벌초도 한다.
내려오는 산길따라 어머니의 산밭 고구마 밭도,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산 양지바른 넓은 밭(어머니가 내가 태어나면서 살림이 늘었다고...
내가 복둥이란다)은 순천분이 사셨다. 어머니 고구마 밭은 대밭으로 뒤덮였다.
저 대밭길을 걸어 어머니 말동무가 된 막둥이 아들이 바로 나다. 43에 늦동이로 난 나는 동네의 복둥이로 통했다. 그리고 지나가는 도인들도
내가 큰 사람이 될 거라 이름도 두개나 지어주었다. 지금은 농부인 나...진짜 큰 사람이다. 농부는 온 국민의 식량을 책임지는 큰 일을 하기에...
저 고추밭이 우리집안이 가장 번성했을때의 집터다. 집터에서 정자로 올라가는 길목에 말의 형상의 집채만한 돌을 작은아버지가 깨면서
집안의 운이 다했다고 한다. 모든 인물들이 하루아침에 목숨이 잃으면서 집터를 다시 옮겼다고 한다
작은집이다. 우리 어머니 돈에 관심없고 오직 공부만하시고 족보편찬위원이라고 전국을 도시는 아버지가 미워서 재혼해 오신 어머니를
작은집 더부살이를 시키신 우리 할아버지의 고집도 참 대단하시다. 이 집터에서 어머니는 저금살이를 하셨단다. 작은어머니가 유일하게
살아계시는 우리 어머니 세대의 증인이시다. 어머 절친이신 소동댁의 밭은 이상하리만큼 밭곡식이 잘 된다. 지금은 조카가 짓고 있다.
큰작은집 대문은 10년째 잠겨 있다. 작은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자식들이 서로 들어와 살겠다고 말하지만 들어올 자식은 없는 것 같다.
폐허로 남아 있는 작은집과 큰작은어머니가 지어먹었던 텃밭에는 막내작은어머니께서 터밭으로 이용하고 있다.
얼마만에 아스콘으로 신작로를 포장해 주었다. 내 어머니가 날 나으신곳이다. 이곳에서 집안이 다시 펴지가 시작했다고 한다.
가난했지만 가장 여유있는 교육을 내게 시켜주신 내 어머니가 사셨던 내 고향 내 집...큰형님께서 텃밭을 잘 짓고 계신다.
내대호수길 105번지 (전남 고흥군 동강면 오월리 벽계 430 ;벽계는 본래 '백이실'이다) 영원히 바꾸지 않을
강촌댁, 등남댁 송점순 내 어머니 집이다.
아이들과 고향 이곳 저곳을 드라이브 하다 발견한 길 옆 무덤...이럴려면 무덤을 쓰지 말지 쩝~
내 초등학교 정문은 이제 무궁화 꽃길은 없어졌다. 폐교는 개인에게 팔렸다.
이곳에서 나는 큰 꿈을 꾸었다. 그 꿈 하나 하나 이뤄 가고 있다. 박사가 되는 것, 과학자, 큰 대지늘 말달리는 꿈,
그리고 또 꿈...이뤄가고 있다. 꿈너무 꿈을 꾼 시골아이 이동현..이제 그 아이들과 그 자리에서 꿈 이야기를 해 본다.
우리가 놀았던 바닷가 멋진 공간에는 누군가 별장을 지었다. 저 저수지 둑은 어린시절 내 사랑하는 친구들과 짝사랑했던 은정이도,
친구 재의도 선후배도 일가친척도 모두 헤어지게 했다.
저 저수지가 그렇게 커보였는데...선배들과 다이빙을 했던 저수지는 이제 수초가 가득하다. 저 산길을 넘어 초등학교를 다녔다.
과수원은 1학년 담임선생님 처가집이다. 워낙 시골이어서 자취하다가 어쩌다 결혼까지 했던 내 담임선생님...저 당산나무 밑에는
깊은 둠벙이 있다. 얼마나 물이 차던지...체육시간 끝나고 달려와서 첨벙 뛰어 들었던 저 둠벙은 아직도 그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 교회는35년전부터 내가 다녔던 시골 교회다. 지금은 성당을 다니지만....저 교회는 우리에게 참 좋은 공간이었다. 부자 농부가 탄생했다.
참다래를 재배하는 농부님은 내 강연을 들었던 분이기도 하다. 이제 농촌은 단순농사보다 축산업이 늘고 있다. 이도 앞으로 토지의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저 큰 저수지 속에 내 꿈과 내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재잡던, 피리, 붕어, 참게 잡아 매운탕 추름 해 먹던 추억, 소몰이 하는 어린이들의 모습도,
선후배 모두 모여 씨름, 벼를 베어낸 논에서 이리 저리 튀는 공을 쫓으며 축구하던 모습도, 닭싸움하던 그 추억도 고스란히 저 물속에 잠겨 버렸다.
군사정권시절 강제로 토지를 수용한 한만은 저수지다. 50여가구가 이곳 저곳으로 떠났다. 이젠 그래도 떠나지 않은 몇가구가 내 고향을 지키고 있다.
이건 무슨 시체이션...누군가 만들어 놓은 아 작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질 않는다.
월악산 줄기뻗어 울창한 ~ 그 산 허리는 요즘 유행하는 태양광 설치로 폐허처럼 보인다. 우리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산인 첨산이 우뚝 솟아 있다.
내 지금껏 단 한번 올랐다. 그래도 아직 세곡 마을은 청년들이 보인다.
고향 이곳 저곳은 사람의 흔적은 사라지고 마을은 숲으로 덮여 버리고 무덤만이 동네를 지키고 있다.
내 고향 최고 부자였던 송씨집안 소동댁(내 어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가 떠나시고 아들인 영주형이 꼭 들어온다고 하지만 가족들이 동의 하지 않을 것 같다.
작은집 작은어머니가 그래도 살아계셔서 고향이 더 서글프다. 저 미루나무는 우리 어린시절부터 신작로를 지키던 나무들이다. 이제 7나무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