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을 하러 가야 하지만 화요일 정독 도서관 철학모임이 있는 날이라 두 가지를 동시에는 어렵다
싶어서 쌓여있는 설겆이 마무리하고, 오랫만에 듣는 곡을 걸어놓고 귀기울여 듣고 있는 중)
고등학교 시절, 시골에서 공부하던 제겐 조금 더 알고 싶은 갈증이 심했었지요.
부모님을 졸라서 방학동안에는 서울에 있는 친척집에 신세를 지면서 단과반 강의를 들으러 다녔는데
당시 종로를 왔다 갔다 하던 중 우연히 길거리 음반점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홀려 그 곳으로 무작정
들어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특별히 음악에 대한 취향이 있다던가 그런 시절이 아니었는데, 왜 그 때 그 소리가 그렇게도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었을까 지금도 가끔 생각하곤 하는데요, 아마 처음 집을 떠나 멀리 있으면서
아무리 편하게 대해주어도 뭔가 마음속의 불편이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쌓이던 감정을 건드린 소리, 그것이 바로 클래식 음악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제겐

소리에 끌렸다 해도 그냥 지나칠 수 있었으련만 음반점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그러고 보면 음반점에 들어간 것이 그 때가 처음 이었지요. 서점에는 어린 날부터 수도 없이 들랑 날랑
했지만 음반을 사 본 적은 없었으니까요.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지금 나오는 곡이 무엇인가 하고요.
그렇게 만난 것이 바로 베토벤의 월광,비창, 열정 이렇게 세 곡이 수록된 LP판인데, 당시 집에 전축도
없던 상황에서 무슨 맘으로 그 음반을 산 것인지 ,그런 충동이 계기가 되어 클래식 음악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집으로 전화를 걸어 아버지에게 우리집에도 전축이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마 멀리
가 있는 딸의 부탁에 마음이 움직였을 아버지가 마음을 써주신 덕분에 방학이 끝나고 집에 내려가자
정말 전축이 마련되어 있더군요. 그 때의 마음이란, 전축이란 물건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이 말없이
전달되던 그 느낌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오로지 한 장인 음반이라 마르고 닳도록 들었지만 그 이후로 점점 음반이 늘어나고
듣고 싶은 음악도 늘어나서 처음처럼 그렇게 여러번 자주 반복적으로 듣게 되지는 않게 되네요.
그래도 문득 그 세 곡이 들어있는 음반에 손이 가는 날이 있지요. 그러면 영락없이 추억 여행이 되는
그래서 다른 음악을 듣는 것과는 사뭇 다른 기분에 빠져버리고 말게 됩니다.

오늘은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연주로 이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얼마나 많은 연주자들의 연주로 이 곡을 들었는지 모릅니다.같은 곡이지만 터치가 달라서
어떤 때는 더욱 격렬하고, 어떤 때는 좀 더 이성적이고, 어떤 때는 조금 더 서정적이고
이런 식의 변화 무쌍한 월광,비창, 열정을 들으면서 어느새 인생의 반 이상을 살아왔군요.

언젠가 이 곡들을 연습해서 스스로 연주해볼 수 있는 날이 올꺼나, 갑자기 묘한 자극을 받아서
생각은 엉뚱한 곳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언젠가가 정말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