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메르 그림이 딱 한 점 전시된 것을 보고 ,그렇다면 렘브란트도? 하고 순간 마음이 확 얼어붙는
기분이었습니다.다른 스케쥴을 포기하고,이 화가들을 만나려고 일부러 시간을 냈고,사립미술관이라
패스도 못 쓰고 들어왔는데,물론 다른 그림들을 본 것도 좋았지만 이건 아니네 싶었거든요.
그런데 다행히도 렘브란트 그림이 여러 점 걸려 있어서 마음속에 다시 불꽃이 이네요.
참 마음이란 이렇게도 간사한 것인가,순간 어이가 없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그 날의 기분을 기억하면서 그의 초상화를 시간순서대로 보고 싶네요.

이 그림을 주목하게 된 것은 파워 오브 아트를 읽기 시작하고 나서입니다.
그 전에 물론 본 적은 있지만 이 그림에서 화가가 무엇을 나타내고 싶었는가 잘 모르고 있었는데
설명을 읽고 있자니 아,그런가,그런데 왜 내 눈에는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을꼬 낙담하다가
마음을 돌려 먹었지요.이 사람은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고 덕분에 훈련이 된 눈으로 보는 것 아닌가
그래서 렘브란트에 관한 글을 쓴 사람이고,그러니 그 눈을 빌려서 나도 새롭게 바라보면 되는 것이지
그리고 이런 훈련을 거치면서 나도 그림을 보는 눈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비교할 것을 비교해야지,이렇게 마음을 달래고 나니 낙담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림을 다시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그런 순간적인 변화가 재미있더라고요.

1629년에 그려진 초상화인데요,그 시기에 그는 젊은 시절의 자신을 여러 점 초상화로 남기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은 유난히 이 그림이 특별히 눈길을 끌어서 올려놓고 바라보고 있는 중이랍니다.

1629년과 1634년 이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표정이 사뭇 달라서 한 사람의 인생,한 예술가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표정에 가져온 변화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 자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같네요.
티치아노의 그림에서도 그리고 그 이전에는 라파엘로의 그림에서도 볼 수 있는 자세인데요
원래 이런 자세로 그려진 르네상스 시대의 궁정인 카스틸리오네를 그린 초상화가 (라파엘로가 그린)
네덜란드에서 경매시장에 나왔다고 하더군요.이 그림을 사고 싶어서 경매에 참석한 렘브란트
그런데 경매가가 너무 비싸서 결국 포기하고 그 자세로 자신을 그렸다고요.

앞의 작품이 1640년,그리고 이 작품이 1643년에 그려진 것인데요 얼굴을 중심으로 빛이 가득하지만
표정은 뭔가 기묘한 기분이 드는군요.

그로부터 10년이상 지난 이후 그려진 초상화,처음 보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삶의 신산이 묻어있는 초상화,그런데 이상하게 젊은 시절의 발랄하던 초상화보다 더 눈길이 오래 가고
마음이 불편하면서도 눈을 떼기 어렵더군요.

앞의 그림이 1656년에서 58년에 걸친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1658년에 완성된 작품입니다.
이 그림에서 그는 마치 왕처럼 치장하고 홀을 들고 있습니다.인생의 신산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세계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이루고 있다는 표징일까요?

화면의 대부분을 얼굴이 차지하고 있고 얼굴의 강렬함에 움찔하게 되는 작품이네요.
1659년의 작품인데요 일부러 연도를 쓰는 것은 그의 변화를 따라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인물을 둘러싼 배경에서의 금빛과 황금분할을 연상하게 하는 도형의 흔적,그리고 붓을 들고 있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서 당대에 잊혀지고 있는 화가이지만 그래도 그가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나가는 기개를 드러낸다고 할까요?

사도 바울로 분장한 모습의 자화상입니다.
나이는 속일 수가 없어서 얼굴에 드러난 주름에 눈길이 가네요.

생애 마지막에 그려진 작품중의 한 점입니다.
자화상을 그린 화가들,그 중에서도 렘브란트와 고흐의 자화상이 가장 많이 그려지고 인구에 회자되고 있지요.
그런데 제겐 이 마지막 자화상이 가장 인상적이고 가끔씩 꺼내보고 싶어지는 그런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응시하고 정직하게 그려낸 화가,그림의 재능이 없는 저는 자화상을 그릴 수는
없지만 가능하면 정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고 ,비난을 멈추고 자신을 아끼면서 독려하면서
그리고 때로는 실수에 대해서 결점에 대해서 웃으면서 자신을 감싸고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피나코텍에서 만난 화가를 집에서 다시 들여다보면서 역시 여행의 백미는 돌아와서의 이런 after속에
진하게 녹아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하는동안 라디오에서는 서울 시향이 연주하는 곡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정명훈과 시향의 50년 인연 (7살에 그가 처음으로 시향과 협연을 했던 모양이더군요)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요.50년 인연이라,저는 그림과 맺은 인연이 15년,이제 그림이 제 삶의 일부가 되어서 거의 매일 그림과
대화를 하게 된 그 깊은 인연에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
시작은 밖에서 왔다 해도 그것을 제 안으로 끌어들이면 새로운 생명체가 되어서 움직이는 것을 느끼는
존재들이 있습니다.사람이기도 하고,사물이기도 하고,그런데 그것이 사물이라 해도 생명을 얻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