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 리조트를 출발해 무주~진안 간 30번 국도를 탄다.
국도에서 홀수는 남북,짝수는 동서 방향이다.
30번이니 우린 동에서 서로 간다.
무주,진안,장수를 묶어서 보통 무/진/장이라 부른다.
전북의 지붕으로 생활,문화권이 같다.
무진장의 평균 고도는 500미터가 넘는데
덕유산의 자장이 여전해서다.
전북은 곡창지대이지만 진안은 80% 이상이 산이다.
차는 산등성이를 돌고 몇개의 고개를 넘는다.
산세가 자즈러질 즈음 호수가 보인다.
용담댐이다.
(사진엔 일부만 보이지만) 용담댐은 넓고 크다.
저수량 기준으로 소양호, 충주호, 대청호, 안동호 다음이다.
호남평야의 익산,김제,군산, 정읍, 전주,군산을 다 적시고
장항 산업단지 까지 공급한다.
큰 저수량을 보이는 이유도 진안의 산지들 때문이다.
어제 지나왓던 무주 적상산 괴목리와 같은 의미의 괴목정(槐木停) 삼거리를 지난다.
느티나무(槐) 노거수가 있어 괴목정이다.
우리나라엔 괴목정 지명은 많다.
1번국도 의왕서 수원시 초입 지지대 지나 파장동에도,계룡시에도 괴목정이 있다.
옛부터 관공서엔 배롱나무나 은행나무,길거리엔 버드나무를,
마을 초입엔 느티나무(槐木)를 많이 심어서이다.
어, 멀리 뭐가 보인다!!!!
바람맞는 쌍돗대?
수묵화의 붓점을 찍었을지도.
남성의 두 고환(睾丸)??
실제로 진안 사람들은 숫마이봉으로 불렀다.
양 옆에 두 자식봉을 거느린 아버지 봉으로.
벙그는 연꽃?
매계 조위(1454~1503)는 마이산이라는 시에서 연꽃으로 보았다.
/雲 端 擎 出 碧 芙 蓉 (운단경출벽부용)/
(구름 끝에 높이 걸린 푸른 연꽃 두송이)
숲에서 막 나오는 나비의 날개짓?
꽃잎 두장?
아니면
막 솟아난 새싹이려나??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쫑긋 세우고 있는 말의 귀(馬耳)가 아닐런지??,,,그래서 마이산.
마이산(馬耳山)은 가을을 대표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방원이 정안군이던 시절 아버지 명으로 남행(南幸)에 나섰다.
(임금의 거둥을 '幸'이라)
그는 기이한 형상에 반해 마이산(馬耳山)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는 관리를 보내 제를 올리게했다.
이게 마이산 산신제의 시초다.
마이산은 조선 초에 얻어진 이름이다.
마이산으로 불리기 이전
신라 때는 서출산(西出山), 고려 때는 용출산(湧出山)이라 불렀다.
마이산은 바라보는 방향,
원경 중경 근경,
춘하추동,
기후 변화,
하루의 사시(四時)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그래서 마이산이 응시자에 주는 느낌의 경우수는 많다.
그러면 가장 멋스러울 때는?
중국의 '소상팔경'은 수많은 팔경의 변주를 낳았다.
마이산이 있는 진안에 팔경이 없을 리가.
'월랑팔경'으로 월랑( 越浪)은 백제 때 진안 이름인데
월랑팔경 중 첫번째가 바로 마이귀운(馬耳歸雲)이다.
안개,구름,운무가 마이산을 덮었다가 풀리면서 봉우리가 드러나는 광경을 이른다.
진안 사람들에겐 구름속에서 풀리는 마이산이 으뜸이였던 것.
나아가,
봄에는 안개 속에 우뚝 솟은 두 봉우리가 쌍돛배처럼 보인다고 해서 <돛대봉>,
여름에는 수풀 속을 헤치고 나온 봉우리가 용 뿔처럼 보인다고 해서 <용각봉>,
가을에는 붉은 단풍에 물들은 모습이 말 귀처럼 보인다 해서 <마이봉>,
겨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암봉이 먹물을 찍은 붓점 처럼 보인다해서 <문필봉>으로 불렀다.
마이산 봉우리가 거의 수직인지라 눈이 쌓이지 않아 주변은 하얀데 봉만 먹물이여서다.
매계 조위는 얼마나 마이산에 반했던지 이런 시구도 남겼다.
/그림 그려 북에 사는 사람들에 자랑해 볼까나/
외에도 점필재 김종직 등 남긴 시가 많다.
매계는 진안과 가까운 김천이 고향으로 점필재 김종직의 처남이다.
마이산을 재대로 감상하려면 일정한 과정이 필요하다.
먼저 멀리 조망하듯 원경으로 봐야한다.
마이산은 넓은 진안 분지에 우뚝 솟아오른 유아독존이기에
마이산을 빙둘러 난 길을 따라 드라이브 한 후,
안으로 들어가야 재맛이다.
멀리서 보는 마이산,
안에서 보는 마이산,
그리고 코앞으로 다가가 보는 마이산의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멀리 바라보는 마이산은 너무나 연미(姸美)해 꼭 안고 싶은 '제시카 알바'다.
그러나 가까이서 본 마이산은 엄청난 괴량감에 압도되고 마는 '표도르'다.
이제 본격적으로 마이산으로 들어간다.
토마토,야채 듬뿍 넣은 버거킹의 와퍼~~~~
마이산을 한바퀴 돌고 들어가면 먼저 시야를 끄는 풍광이다.
마이산에 들어가는 길은 둘이다.
북쪽과 남쪽 주차장 방향이 있는데 보통 남쪽 진입으로 들어간다.
이산묘(*山廟) 영역~~~
남쪽을 택하면 이산묘(*山廟) 영역이 먼저 다가온다.
일대는 눈여겨 볼만한 역사적 흔적이 몇 있다.
1)뒷편 바위에는 주필대(駐필臺)라는 각자가 새겨져있고
2)1
907년 호남 의병창의동맹단의 집결지였던 황단(皇壇)터도 있다.
3)단군,이태조,세종,고종 4군왕을 모신 영덕전(永德殿)이,
4)조선조 개국 이래 충신과 유림 40위를 모신 영모사(永慕祠),
5)안중근을 비롯 선열 34위를 모신 영광사(永光祠)가 있는데 이들 영역을 통털어 이산묘라 한다.
주필대(駐*臺)란 왕이 수레에서 내려 잠시 머무는 곳을 이른다.
이성계는 남원 운봉의 황산 싸움에서 왜구를 무찌른 후 전주로 향하다 마이산서 잠시 머물렀던 것.
그러면 이성계는 정말 이곳 마이산을 들렀을까?
가능성이 크다.
고려 말기 40여년은 왜구 침입의 절정기로
해안가 조창은 모두 내륙으로 옮겨야할 정도였다.
왜구들은 개경 코 앞인 강화도 까지 점령해 삼남에서 올라오는 세곡선을 탈취했다.
당시 많은 문화재도 넘어갔다.
고려불화는 세계적으로
현재 100여점 중 90점이 일본에 있는데
그때 빼앗긴 것들이다.
바로 그 왜구들의 준동이 한풀 꺽인 계기가 바로 남원 운봉의 황산 전투였다.
이성계는 적장 아기발도 목을 활로 꿰뚫며 쾌승했는데
청년장교 이성계가 중앙 정계에 이름을 드러낸 순간이였다.
바로 그 전투 승리 후 관향인 전주로 향하면서 마이산을 들렀던 것.
외에도 이성계의 마이산 관련 전승은 많다.
이성계가 잠저(潛邸) 시절 꿈을 꿨는데
신선이 나타나 '금으로 된 자'(金尺)을 주며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라 했다.
이후 황산 전투 후 귀경하던 중 이성계는 마이산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성계가 보기에 꿈 속에서 금자를 받았던 장소하고 너무나 흡사한 것.
꿈에선 두 봉이 하나로 묶어진 형상으로 보였는데
여기서 마이산은 속금산(束金山) 이라는 이름을 하나 더 얻었다.
꿈 얘기를 들은 정도전은 악장(樂章)을 하나 지었는데 몽금척무가(夢金尺舞歌)이다.
(악장이란 고려때 부터 궁중에서 제향(祭享)이나 연향(宴享)이 열릴 때 쓰였던 노래 가사로
악장은 노래로 부른 시이므로 음악이며 문학)
정재(呈才)를 아시는지?
조선 시대 궁중의 의식 때 추는 춤이다.
정재에 몽금척(夢金尺)도 있는데 이더 당연 이성계의 마이산 꿈에서 유래한다.
그러니 몽금척의 배경은 마이산.
지금은 무궁화대훈장(이명박 부부가 퇴임전 셀프로 받은 그거)이지만 조선의 최고 훈장은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이다.
이 역시 이성계의 마이산 꿈에서 유래한다.
이산묘 일대는 호남 의병들이 창의한 곳이며
면암 최익현은 여러 차례 마이산에 왔다.
의병장 이석용은 1907년 500명의 의병을 모아 ‘호남의병창의동맹단’을 결성했다.
그리고 마이산의 용바위에서 고천제(告天祭)를 지냈다.
출정식을 마친 후 의병들은 진안읍을 기습했다.
이석용의 나이 29세였는데 이후
1914년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그러나 이산묘는 산만하다.
현판,각자,비문 등이 널려있고 모시는 분들의 정체성 또한 극과 극이다.
한켠엔 유림이 또한켠에선 항일투사가,,,,
초대 부통령 이시영에 대통령 이승만,최근엔 김대중 대통령의 현판,각자도 있다.
노자의 도덕경 첫머리는 생각난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이름을 붙이면 이미 이름이 아닌 것을....)
마이산 금당사(金堂寺) 일주문~~
여기서 부터 사찰 영역이니 마이산 일대는 거의 사찰 소유지로 보면 된다.
외설악 일대가 거의 신흥사 소유이듯이.
일주문을 지나면 차례로 금당사,탑사,은수사가 나온다.
특별한 문화재는 없기에 문화재 보러 마이산에 들르는 사람은 없을 터인데 문화재 관람료 명목으로
입장료는 낸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왔으니 이미 우리는 불국토에 들어선 것.
허나 금당사 입구까지 길 양 옆으로 사하촌 식당들이 즐비하다.
산채 비빔밥류를 파는 여느 식당이 아니라 좀 특별하다.
진안 애저찜이 유명해서인지 흑돼지를 통째로 돌리는 바베큐 식당들이 많다.
철근 두께의 코챙이로 꿰뚫린 통돼지가 길가서 맛나게 익고있다.
냄새는 진동하며 담 넘어 금당사로 흘러간다.
금당사는 백제시대 고찰이다.
고찰이라는데 마땅한 문화재는 없다.
문화재만 없는게 아니라 전례의 도상학 같은 거도 없다.
혼란스럽다.
뭐 이런 사찰이 있을까 싶다.
대웅전 앞 깃대봉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지붕은 금칠했다.
불쾌하기까지해 서둘러 나왔다.
그러나 예전 금당사는 구한말 호남의병들의 거점이었다.
그 사세도 매우 컸다.
마이산 일대가 모두 금당사 부지였다.
동가숙 서가식하다보면 매우 특이한 풍광에 즐겁다.
마이산이 그러하다.
자연이 출품한 작품으로 가득한 마이산 전체가 갤러리다.
금당사를 지나니 탑영제가 나오고 길은 탑사로 이어진다.
금당사에서 탑사까지는 약 1.5㎞로 20분쯤 느긋하게 걸으면 된다.
호수 옆 가로수는 벗나무로
마니산 벗꽃축제도 유명하다.
탑영제(塔 影 堤)~~~~~~~~
탑이 비춰지는 호수라는.
자연이 빚은 '탑'은 사람이 만든 '호수'에 저리 앉긴다.
석가탑,다보탑,청운교,백운교의 그림자가 불국사 영지(影沚)에 비취는 것처럼.
현진건 무영탑(無影塔)이 생각난다.(무영탑=석가탑)
/ 아사녀는 못가를 돌며 이따금 공사가 한창인 불국사 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울창한 소나무 숲에 가리워진 불국사를 바라다보는 아사녀의 눈엔,
어느듯 이슬이 맺혀 여위어 까칠해진 볼을 타고 흘렀다.
아사녀는 깊은 한숨과 함께 못 속을 들여다보았다.
못속에는 흐르는 흰 구름 사이로 한참 쌓아 올라가고 있는 다보탑과 대웅전, 백운교, 청운교가 비쳐 있었다.
그러나 아사녀의 남편 아사달도, 아사달이 돌을 깎고 쪼아 쌓고 있을 석가탑의 그림자는 비치지 않았다.
아사녀는 눈물을 닦고 다시 들여다 보았다.
그래도 못 속에 흐르는 것은 흰 구름뿐, 아사달도 석가탑도 없었다./
그림자가 비취지 않아 석가탑은 무영탑(無影塔)이 되었던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마이산 암마이봉과 숫마이봉도 두 애를 안고 승천하려다 실패하고 주저앉잤단다.
지금 암마이봉과 숫마이봉은 호수에 자신의 모습을 완연히 드러내고 있다.
아사녀가 아닌 방문객 우리 모두에게....
북사면에서 바라본 마이산~~(윗 사진은 남사면에서)
한여름~~(비려온 사진)
탑영제 지나 탑사로 가는 길에는 벗나무가 많다.
왕릉 같은 봉우리도 많고.
탑사 입구~~~
탑사의 영업방식으로 산만하다.
그러나 들어서니 별세계~~
돌탑들은 왈츠 추는 선남 선녀들이려나~~
탑이 많아 탑사로 역사는 불과 120년이지만 아래 1300년 역사의 금당사를 압도한다.
탑사는 마이산 만큼이나 기이한 절이다.
탑사는 암마이봉 기슭에 있다.
마이산과 함께 진안을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다.
탑사는 그 이름처럼 돌탑으로 이루어진 절로
애초에는 108개 였으나 지금은 80여 기의 크고 작은 돌탑들이 남아있다.
탑들은 오직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 인간이 20세기 초 무려 30년에 걸쳐 쌓았다.
10미터가 넘는 원뿔 모양에서 한줄로 쌓아올린 외줄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시멘트 같은 접착제 사용도 없고,비계같은 설치 보조 기구도 없이 쌓았으니
현대판 작은 불가사의다.
불가사의는 전설을 낳는다.
하루는 인근 주민들이 어떻게 쌓는 지 궁금해 몰래 숨어 들었다.
그러나 자정만 넘으면 잠이 들어버리고 새벽에 깨어나 보면 일정량이 쌓여 있었다나.
주인공은 이경의(1860~1957)다.
자(字)는 갑룡(甲龍)으로 임심에서 태어났다.
보통 이갑룡 처사로 불린다.
한번은 주민이 전주에서 처사를 보았다.
처사는 걸어서 가고 본인은 버스를 탔는데 도착해보니 이미 와있었다나.
그래서일까?
사적비엔 '처사'가 아닌 축지법에 도를 튼 '도사' 이갑룡이다.
선비들은 왕비 보단 대제학,대제학 보단 문묘배향자,문묘배향자 보단 처사(處士)로 이름 남는 걸 자랑으로 여겼다.
탑사 스님들은 그런 처사를 도사로 바꾸어버렸다.
우측으로 보이는 사적비가 주변과 너무 부조화다.
'섬진강 발원지 용궁'~~~
각자와 시주자를 적은 석곽이 납골당 풍으로 생경하다.
20세기 초 처사는 마이산이 낳은 돌로 예술 작품을 남겼다.
허나 21세기 인간들은 예술공원을 납골당풍으로 변질시켰다.
마이산은 금강과 섬진강의 시원이 된다.
마이산 북쪽은 금강,남쪽은 섬진강으로 흐른다.
줄사철나무~~~
탑사 위쪽에 있는 은수사 줄사철나무는 천연기념물이다.
암마이봉 위로 기어오르는 능소화다~~
이땅서 가장 높이 자란 능소화 일게다.
음과 양의 조화를 맞춰 원뿔로 쌓은 후,윗 부분은 석탑의 상륜부 처럼 외줄로 쌓았다.
사람은 자연을 닮는다.
원뿔탑도 암마이봉,수마이봉을 닮았다.
처사는 탑을 쌓으며 마이산을 닮으려 했을 것이다.
돌들은 두 봉에서 빠져나온 것들이다.
최초의 석탑인 익산 미륵사지탑에서 부터 시작해,
3층석탑의 시원이 된 감은사지 탑,
조형미의 절정에 이후 삼층석탑의 원본이 되었던 석가탑 ,
백제탑의 전형이 된 정림사지 5층석탑,,,등등
이전까지 명탑들은 권력의 탑이였다.
허나 마이산 탑들은 권력하곤 멀다.
마을 어귀에 오다 가다 하나 둘씩 던져저 올려진 성황당 돌무더기에 가깝다.
신화,전설이 죽은 시대,,,
20세기 벽두 마이산 탑사에서 한 위대한 정신 그리고 신화를 본다.
요즘 일본 관관객이 많이 온다.
좀 멀리서 보면 마치 달 표면 같다.
1억년전 마이산 일대는 호수,선상지였다.
수천만년 동안 자갈,모래,진흙 등이 쌓이고 쌓여 응축한 후 융기해서 생긴 역암 덩어리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용출했다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는지 용출산(湧出山)이라 불렀다.
현대 지질학자들은 마이산 역암층이라 부른다.
지하에 잠긴 부분 까지 보면 두께가 1500미터가 넘는단다.
지금도 민물고기 화석이 발견된다.
산 전체가 거대한 암석이지만 풍화로 정상에는 식물이 자란다.
두 봉은 동서 방향으로 뻗어있어 북·남 사면의 기후에 차이가 있다.
습한 북쪽 사면은 식생이 풍부하나 건조한 남쪽 사면은 빈약하다.
반면,남쪽 사면은 풍화작용으로 암석 면에 동굴 형태의 구멍이 생기는
타포니
(taffoni)가 현저하다.
타포니란 역암에서 자갈 사이를 메우고 있는 물질이 자갈 보다 먼저 풍화되 자갈이 빠져 나간 구멍이다.
마이산은 세계적인 타포니 지형이다.
홈 안에 세워진 것은 작은 돌탑으로
지상서 수십미터다.
가까이 보니 성충으로 자라 빠져나온 애벌레가 살던 집같다.
홈의 크기가 4~5미터는 족이 된다.
크기로 보면 새끼 공룡이 알에서 부화한 자리 같기도 하고.
탑사를 뒤로 하고 더 오르니 은수사다.
은수사 내 찻집~~
닭꼬치에 동동주라니?
사찰 입구의 통돼지 바베큐,,,금당사의 산만함,,,그리고 은수사 내 닭꼬치 까지,,,,
탑사는 암마이봉 턱 밑에, 은수사는 숫마이봉 아래에 있다.
은수사에선 두 봉을 동시에 볼수있다.
그러나 두봉은 쉽게 보여주질 않는다.
목 뻐근하게 우러러 봐야한다.
봐도 봐도 산사의 로케이션이 너무나 환상이다.
은수사에서는 고드름이 거꾸로 열린다.
'은수사 역고드름' 혹은 '거꾸리 고두름'이라 한다.
대접에 물을 받아 놓고 밖에 두면 고드름이 그릇 위로 올라가면서 언다.
왜?
암마이봉,숫마이봉 때문이다.
솟은 암수 마이봉 사이에서 급격하게 대류현상이 일어나고 공기는 위로 빨려 올라가기 때문이다.
습기가 위로 빨려 올라가며 어는 것이다,,,고산지대 상고대처럼.
은수사에선 바람이 나뭇잎들을 용오름 처럼 위로 쓸어올리는 현상을 자주 볼 수 있다.
역고드름과 같은 이치다.
거꾸리 고드름 앞에서의 기도는 그 기도발이 끝내준다는 소문으로 겨울철 많은 사람이 찾는다.
마이산은 동봉의 숫마이봉(667m,오른쪽),서봉의 암마이봉(673m,왼쪽)이 쌍을 이루는 부부봉이다.
가까운듯 먼듯 둘은 20 미터 사이로 마주하고 있다.
암마이봉이 더 높다.
암봉의 높이나 영역의 크기가 아니라 보이는 형태를 두고 명명했기 때문이다.
당연 마이산의 주 관찰자인 진안읍 사람들이
진안읍에서 바라봤을 때 보이는 모습에 따른 것이다.
북쪽(진안읍)에서 바라본 마이산~~
좌측이 수마이봉,우측이 암마이봉이다.
옛날 신선 부부가 자식을 낳고 살아가던 중 승천할 때가 이르렀다.
남신선(男神仙)이 "사람들이 승천하는 장면을 보면 부정을 타니 한방 중에 떠나자"고 말했다.
그러나 여신선은 밤은 무서우니 새벽에 떠나자 했다.
때마침 일찍 물 길러 온 동네 아낙이 승천하려는 장면을 보고 말았다.
그리고 "어머나 산이 하늘로 올라가네" 하고 소리쳤다.
승천은 실패했고 남신은 화가 나 "여편네 말을 듣다가 이 꼴이 되었네" 하고는 두 자식을 빼앗았다.
그리고 옆 자리에 앉쳤다.(윗 좌사진처럼)
진안읍에서 마이산을 보면 수마이봉에는 새끼봉이 둘 붙어있고,
서쪽의 암마이봉은 죄스러움에 반대편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이다.
남존여비의 마이산 버전이다.
숫마이봉(우측)과 청실배나무.
은수사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사찰 마당에 있는 천연기념물 <줄사철나무>와 <청실배나무>다.
청실배나무는 15m에 둘레가 2.8m에 이른다.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600여년으로 추정된다.
청실배나무는 흔히 돌배나무라 부른다.
이렇게 크고 오래된 것은 처음 본다.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의 수종은?
벗나무가 가장 많고 이어 저 돌배나무가 두번째다.
이어 자작나무,단풍나무.
너무 정겹고 고즈넉한 풍광에 셔터 누르느라 정신 못차리고 있는데 누가 말을 건넨다.
청실배나무 뛰쪽 와이너리(winery)를 가리키며,
청실배나무 열매로 만든 과일주가 얼마 안남았으니 떨이로 팔겠단다.
애주가도 아니고 이미 풍광에 취했는지라 웃고만 말았다.
산사에서 닭꼬치에 이어 이젠 곡차란다.
은수사 뒤로 난 448계단을 밟고 오르면 두 봉이 맞닿은 천황문이 나온다.
두 봉에서 뻗은 줄기들이 연리지(連理枝)를 꿈꾼다.
암마이봉,숫마이봉이 가장 높은 데서 마주 하는 곳이 천황문이다.
천황문에서 좌우로 바라보는 봉들이 너무나 연미하다.
계속 나아가면 북부 주차장이,더 가면 진안읍이 나온다.
천황문에 비가 와 북쪽으로 떨어지면 금강,남쪽이면 섬진강으로 간다.
마이산 여정은 여기서 끝이다.
숫마이봉은 일반 등반이 불가능하다.
암마이봉은 10년 휴식년으로 앞으로 5년이 남았다.
천황문에서 바라본 숫마이봉이 그리 미려할 수 없다.
암마이봉,숫마이봉의 둘 이름이 바뀌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분위기가 여성적이다.
여인의 둔부처럼 색기 까지 풍긴다.
너무 고와 찍고 또 찍었다.
숫마이봉 정상 쪽으로 약 50m 위에 무속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화엄굴~~~
화암굴 속의 약수를 마시고 산신에게 빌면 득남한다나.
오던 길로 하산~~
이제 집으로다.
이틀간 나들이도 끝나간다.
장수~익산간 고속도로 진안 나들목에 들어섰다.
어,멀리 다시 마이산이 반긴다.
별리가 아쉬었던 차 마이산 휴게소 이정표가 보인다.
휴게소엔 마이산 조망용 전망대가 있다.
주차 후
뛰였다.
왼쪽이 숫마이봉,오른쪽이 암마이봉이다.
숫마이봉에 바짝 아들봉 하나가 붙어있다.
마지막 컷엔 어둠이 내렸다.
산새들은 마이산으로 돌아가고,나는 서울로 쫓기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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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막스 웨버에 무도회의 권유(Invitation to the Dance)
베를린 필, 카라얀 지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