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수업시간의 진도가 낭만주의라서 어제 발제준비하느라
글을 읽다보니 그 기운이 남아있는 모양입니다.
아침에 비몽사몽 자다 깨다를 반복하느라 지친 몸을 달래느라
카잘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들어와서 찾아보는 화가는

독일 낭만주의의 꽃을 피운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입니다.
독일 역사를 읽다보면 여러 명의 프리드리히와 만나게 되지요.
누가 누구인지 계보를 그려서 기억해야 할만큼 여러 명의
프리드리히가 나오는데요,그래서 이 화가 이름을 보면서도
오라,또 프리드리히 하고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언젠가 목요일 수업중에 철학과 굴뚝 청소부란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철학개념을 이렇게 잘 쓰다니 하고 놀라면서
읽은 책인데 화요일 모임이후에 다시 꺼내서 읽어보니
그 당시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던 대목들이 눈에 띄더군요.
근대란 무엇인가 근대를 그 자체로 규정할 수 있는가
다른 것과의 대비와 문제설정을 통해서 어떤 시대를
말할 수 있다는 대목과 왜 스피노자가 근대에서 출현한
근대이후의 사상가라고 하는가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나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관한 그림설명을
읽었더니 그런 경계설정의 의미가 조금 더 깊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무엇을 규범으로 삼는다는 것과 그것에 매여서 다른 것을
볼 여유가 없어지는 것은 참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규범이 필요하지만 규범이 사회를 혹으 자신을 구속해버리면
누가 주인인지 모르게 되어버리는 사태라고 할까요?


중세적인 것,페허,그리고 자신의 내면으로의 도피
이런 것들이 낭만주의를 이루는 큰 특징의 하나였다고
하는데요,음악에서의 낭만주의,그림에서의 낭만주의
그리고 문학에서의 낭만주의,그것이 분출되어 나오는
시기는 꼭 같다고는 할 수 없고,제 개인적으로도
예술의 전분야에서의 낭만주의를 수용하고 즐기는 것이
조금씩 다른 느낌이 들어요.

그림을 보다보니 벌써 일어나서 수업하러 나갈 시간이네요.
목요일,늘 활기찬 목요일 수업이라 나가는 발걸음도
가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