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2007년을 마무리하는 시간에는 아이들과 함께
일본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일년동안 열심히 노력한 일본어가 현지에서 통하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하기도 했고 보람이가 앞으로 교환학생으로
일년정도 가 있고 싶어하는 나라에 가서 도대체 어떤
학교에 다니게 될까 그림이라도 그려보고,일본어과에 진학한
아들에게 일본어가 쓰이는 현장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보람이는 그 사이를 못 참고 여름방학에 친구랑
둘이서 이미 다시 한 번 다녀왔고
승태는 올해 학교에서 수학여행으로 일본에 간다고 하니
굳이 세 사람이서 겨울에 가야 할 이유가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머리를 굴리고 있던 중
지난 (벌써 지난 해라는 말을 써야 하는 것이 아직은 낯설기만
하네요) 해,봄인가 남편의 학회에 동반여행으로 스페인에
다녀온 도서관의 김미현씨가 너무나 즐거운 모습으로 스페인
여행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그곳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제겐 좀 멀다싶은 나라였고
가우디를 마음에 품고 있었지만 스페인 자체에 대해선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실하게 느끼고 있지 않은 나라여서
망서림도 있었지요.
한 번 기운 마음은 그래도 계속 남아서 마음속에서 저울질을
하게 되더군요.
로마에서 보낸 일주일,그 이후 베네치아와 피렌체도 아직
못 보았는데 그 곳이 먼저가 아닐까?
혹시 간다고 해도 혼자 떠나려고 마음먹은 여행,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계획을 짜기엔 무리다싶어서
로마여행때 도움을 많이 받은 유로 자전거나라에 들어가본
것이 8월말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저를 위해서? 계획을 잡은 것처럼
스페인 자전거나라가 생겼더군요,그 사이에
전화번호를 메모하여 자전거나라의 짱가이드님과 통화하기
시작하면서 여행계획은 조금 더 구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고 슬며시 말한 여행계획에 대해서 나도,나도
그렇게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서
다섯명이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다섯명이 서로 잘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
두 사람은 제게 도서관에서 만나 함께 공부하는 인연으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그리고 다른 한 분은
인터넷상에서 만나 저를 연초록으로 부르는 고은옥님
그리고 나중에 합류한 캐롤님은 everymonth에서의 인연으로
저를 intotheself라는 아이디로 만나고 있는
어떻게 보면 세 곳에서의 인연이 뭉쳐서 떠나는
사실은 조금 불안할 수 있는 ,혹은 그래서 더욱 재미있을 수도
있는 그런 출발이었습니다.
24일 새벽에 떠나야 하는데 전 날 밤 이런 저런 준비도 하고
워낙 늦게 자는 버릇때문에 평소에 즐겨보던 일본드라마도
마저 마무리로 보고,없는 동안 아이들이 주의해야 할 점도
메모해놓고,그러다보니 벌써 새벽이 밝아옵니다.
그래도 두 시간 정도 쪽잠을 자긴 했어도 몸이 피로하네요.
그래서일까요?
이번 여행에서 난생 처음으로 와인에 맛을 들인 시간이었습니다.
우선 비행기에서 와인 작은 병 하나를 받아서 마시고
잠이 들었는데 세상 모르고 잠을 자고 나서는
맑아진 정신으로 그 긴 시간동안 (앞좌석에 혼자 앉아서
가는 프랑스 여자가 타고 있길래 그 옆으로 옮겨서 편안한
여행이 되었거든요) 아람누리에서 빌린 황금붓소녀란
청소년 문학상 수상 작품을 읽었습니다.

17세기 스페인이 배경인 이 소설은 허구와 실제를
교묘하게 섞어서 그 당시는 불가능하게 여겨지던
여자가 미술을 하는 그런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실제 인물로는 벨라스케스가 잠깐 등장하여 주인공이
그린 그림의 특성에 감탄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당시 마드리드의 모습도 실감나게 그려졌고요.
비행기안에서 덕분에 17세기의 마드리드와 만난 셈이었습니다.
그래도 남은 시간,다 못 읽고 들고 간 브레다의 태양을
읽었는데 역시 이 소설에서도 벨라스케스가 등장하니
그런 일치가 재미있게 느껴지더군요.
더구나 프라도 미술관에 가면 브레다의 함락을 포함한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두근두근거립니다.
실제로 보면 어떤 기분일까?

비행기안에서의 두 번의 식사중 한 번은 와인을 마시고
잠 든 덕분에? 한 끼를 놓치고 그 다음 받아먹은 식사는
덕분에 꿀맛처럼 달게 느껴지더군요.
그러니 적당히 배가 고파야 음식의 고마움을 아는 것일까요?
환승을 해서 갈아탄 비행기는 아무래도 지역용 소형비행기라
그런지 갑자기 귀가 먹먹해지면서 조금 어지러운 기분이었고
뒷자리에 앉은 일본인 일행중 어린 아이가 있어서 그런지
쉬운 말로 하는 일본어를 알아듣는 재미에 귀기울이고 있던 중
아주 멀리서 들리는 소리처럼 소리가 작아지면서 윙윙대던
순간의 낯섬이 갑자기 기억이 나네요.
조그만 비행기안에서 얼마나 다양한 언어가 서로
섞여서 이야기되는지 신기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드디어 마드리드 공항,한참 기다려서 가방을 받고
밖으로 나서니 심금숙씨냐고 물어보는 동안의 남자분이
있습니다.어라,그런데 이상하게 낯선 얼굴이 아니네요.
아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친한 친구의 아들과 너무나
판박이로 닮아서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같이 있던 황경림씨도 자신의 시동생과 너무나
닮았다고 놀라더군요.
그러니 이것은 보통 인연이 아닌 셈인가,공연히 재미있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이상하게 마치 미신처럼 이번 여행은
뭔가 더 즐거울 것 같은 기대가 생깁니다.
서로 수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가니 우리와 그라나다까지의
일정을 함께 할 차가 보입니다.

그 때는 피로해서 찍을 생각도 못했지만 똘레도에 간 날
막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전에 잡아본 컷인데요
정말 여러 날 운전하시면서 수고해주신 스페인 자전거나라
지점장님도 고마웠지만 차도 정말 수고 많았다 싶은
마음이 절로 들어서 한 장면 잡아본 것입니다.
사실 일본 여행이후에 이상하게 카메라와 멀어져서
한 번 멀어진 대상에게 다시 정을 붙이는 일이 쉽지 않아
여행직전까지 카메라를 다시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 건질만한 사진이 얼마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도 스페인 풍광이 좋아서
저절로 그림이 되는 곳이 많았고 그 덕분에 다시 보고
싶은 사진도 몇 장 챙길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도착한 호텔에서 일단 짐을 풀고 로비로 내려와
앞으로의 일정을 상의하는 과정을 거치고
(미리 일정을 짰다고는 해도 현지 사정은 또 다르기 마련이라
실제로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의 조언을 듣는 것이
더 좋은 측면이 있으니까요)
밤에 어딜 가면 좋은가 했더니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거의 모든 상가가 문을 닫았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일단 각자 방에서 쉬다가 크리스마스 자정 미사에
함께 가보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성당에 다니는 것은 아니라해도 미사가 갖는 의미에는
공감을 하는지라 제겐 미사를 보는 것,그것도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 들어가서 미사를 보는 것이 하나도 어색하거나
싫은 경험이 아니었지요.
오히려 아직도 기독교가 국교인 나라에 와서
수도원 부속의 성당에서 거행되는 미사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미사에 참여하려고 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한 일행과
합류하려고 내려가니 조용하던 도착시간과는 달리
피아노소리에 맞춘 바이올린 연주가 흐르고 있습니다.
부모들이 이야기하고 노는 중에 아이들은 상당한 정장차림으로
약간은 지루한 기색을 띠고 밖에서 놀고 있는 모습도
특이해서 눈에 띄더군요.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실제로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낯선 거리를 걷고 있는 순간,갑자기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기분이었다고 할까요?
그래도 막상 미사에 참여하고 있으니 말은 통하지 않아도
뭔가 울림이 전해지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미사가 다 끝나갈 무렵 서로 be peace with you에 해당하는
스페인어로 인사하면서 아는 사람끼리도 모르는 사람끼리도
다정하게 악수를 나누면서 인사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의 기묘할 정도로 따뜻한 느낌이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기분이네요.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목은 조용합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하기엔 정말 조용한 공간이
조금은 기묘하게 느껴졌지만
새로운 풍속도를 경험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