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에 지은 주공 아파트라 많이 낡았지만 그래도 주거 공간은 쾌적한 편이다.
이 아파트 단지엔 여러 가지 나무가 참 많다. 목련과 라일락 그리고 개나리와 벚꽃나무.
주차장 건너 바로 앞 동 입구엔 생뚱맞게(?) 사과 나무도 한 그루 심어져 있다.

이곳에 산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간다. 뒤돌아 보면 어린 시절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온
이 후로 40여년 가까이 한 곳에서 2년 이상 살았던 적이 없었던 정도로 이리 저리 옮겨
다녔던 삶이었다.
결혼 이후에도 10년동안 10번을 이사 다녔고 11번째로 이사온 이곳에서 10년을 지내고
있으니 참 대단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면서도 사과 나무가 있다는 것은 3년 전에야 알게 되었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면 바로 앞에 있었는데도 몇 년 동안 모르고 지내다가 어느 날 우연히
바라본 나무에 사과가 달려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 동안 수 년 동안 왜 사과가 달린 것을 한 번도 보지 못 했을까.
아마도 악동들이 사과가 온전히 커 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고 사과가 열리는 족족
따버려서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은 듯 하다.

신기한 마음에 한참을 바라보았다.
아파트 단지의 어린 악동들의 그 손길을 어떻게 피해서 저렇게 온전히 사과가 달려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바라보는데 한 아이가 사과를 바라보며 아래로 다가가 나무를 흔들었다.
"네 이놈!!!"
그때 갑자기 호통 소리가 들렸고 아이는 놀라서 달아났다.
호통 소리는 1층 사과나무 바로 앞에 있는 집의 열려진 베란다 안에서 들려왔다.
그 집은 베란다에서 손을 뻗으면 사과나무 가지에 닿을 거리에 있었고 그 집 거실에는
노인 한 분이 안락의자에 앉아 사과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노인은 사과나무의 파수꾼이자 수호천사였다.
하루 종일 거실에 앉아 그 사과나무에 열린 사과를 감시했고, 아이들은 노인의 호통과
서슬에 감히 사과나무를 넘보지 못했다.
그 덕분에 여름 내내, 그리고 가을이 다 가도록 사과는 무사했고 제법 붉게 물들어갔다.
그 해 가을은 주차장에 들어서고 나갈 때 마다 사과나무의 사과와 그 너머 노인의 모습을
보며 지냈다. 노인은 몸이 불편한 듯 별 움직임 없이 언제나 거실의 안락의자에 앉아 창
밖의 사과나무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사과가 자신의 분신이라도 되는 듯 아이들이 사과
나무로 접근 하는 것을 소리쳐 막았다.
마치 사과 나무 감시하는 것이 노인의 유일한 낙인 듯 보였다.
늦가을, 제법 붉었던 사과는 따는 사람이 없으니 저절로 나무에서 시들어가 쪼그라졌다.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앙상한 가지에 바람이 불 때면 이리 저리 흔들리는 것이 곧 땅으로
떨어질 듯 가냘프게 매달려 있었다.
찬 바람이 부니 노인의 집도 창문을 닫았고 노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습관적으로 바라보던 사과 나무에서 사과가 안 보였다.
드디어 땅으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런가 보다 하고 가게로 출근을 했다.
바로 그 다음날 그 노인의 집엔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창 가엔 '근조' 라고 쓰인
노란색 등이 내 걸렸다. 참으로 우연인지…...
그 다음해는 사과를 못 봤다. 그리고 작년에도……
그러던 것이 몇 일 전 우연히 바라보니 그때의 그 모습으로 푸른색 사과가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내심 걱정이 되었다. 이제는 사과나무의 수호천사가 없는데 몇 일이나 버티고
매달려 있을 것인가.
한동안 가게 일에 바빠 사과 나무를 잊고 있다가 아침에 집을 나서며 언뜻 생각나
바라 보았다. 아니나 같을까, 사과가 없어졌다. 그새 누군가가 따버린 모양이었다.

아파트 재건축이 시작되었다.
주민들 모두 재건축 이야기가 화제다. 건축비가 얼마고 용적율이 어떻고 집값이 얼마고…...
아무도 목련, 라일락 그리고 사과나무에 관심이 없다.
드디어 입주민들의 이주가 시작 되었다.
한 집 두 집 이사를 떠나고 늘 뒤엉키듯 들어차 있던 주차장은 조금씩 한산해 지기
시작했다.
내년 봄이면 이 아파트 단지는 아무도 살지 않고 텅 비게 될 것이고 철거가 시작 될 것이다.
그럼 저 사과나무는 어떻게 될까…… 과연 내년에도 사과가 열릴 수 있을까……
내 코가 석자다.
사과 나무 걱정을 할 때가 아니라 나는 어디로 가야 할 지 고민에 잠긴다.
멀리, 정말 아주 멀리 떠나고 싶다.
2006.10.27
----강두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