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력고사 세대인 제가 고 3때 가장 가고 싶었던 과가 신문방송학과였어요.
그때만 해도 신방과가 있는 학교가 그다지 많지 않았고 커트라인도 법대 못지않게 높아서 그저 그림의
떡,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지요.
두 번째로 가고 싶었던 과가 국문학과나 국사학과였는데 그 역시도 갈 수 없었습니다.
한자 때문에요.
이상하게 신문이나 책에 나오는 한자는 대부분 읽을 수가 있는데(이것도 반쯤은 앞뒤 글 문맥에 따라 때
려잡는 거죠,ㅋㅋㅋ)막상 써보려고 하면 눈앞이 캄캄해져요.
도전 골든벨에 출연하는 고등학생들이 한자 문제만 나오면 작아지던데 딱 제 모습이예요.
학교 다닐 때도 우리나라 문학 작품을 많이 접할 수 있는 국문과 학생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
요.
그렇다고 제가 문학적 소양이 뛰어나냐 그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이잖
아요.
고등학교 때 한문 선생님이 총각이시고 또 이야기도 재미있게 잘 해주셔서 반 아이들 대부분이 무척 좋
아했는데 선생님 좋아하는 것과 성적은 별개더라구요.
이상하게 쓸데없는 기억력은 아주 비상한데 억지로 외워야만 하는 것은 노력해도(글쎄 많이 노력해 본
기억도 가물가물하네요)잘 안 되더라구요.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꽤 많은 한자를 알고 자격증도 많이 따고 열심이더라구요.
애가 크기 전에 마법 한자라도 구입해서 공부를 해야 하나 모 신문사에서 나오는 재미난 한자라도 해야
하는가 슬슬 걱정이예요.
왜 갑자기 한자 공부 타령이냐고요?
제가 요즘 김점선님 그림에 푹 빠져 있어요. 그래서 yes24에서 김점선님 책을 한 권씩 사서 읽고 있는데
정민 선생님의 이 책이 눈에 띄더라고요.
얼핏 봐도 그림이 너무 예뻐서 충동 구매했는데 그림뿐만 아니라 내용도 너무 좋아서 여러분께 소개해드
리려고 하는데 서론이 너무 길었죠.
제가 워낙 한자에 약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다보니 말이 길어졌네요.
한자는 못했지만 한문시간이 좋았다고 앞에서 말씀 드렸죠?
선생님께서 주입식으로 한자를 가르치기 보다는 한시에 얽힌 고대부터 현대의 이야기를 너무나 재미있
게 각색해서 들려주는데 선수셨어요.
아마 선생님께서 책을 내셨다면 정민 선생님 못지않은 베스트셀러작가가 되셨을 텐데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시는지 궁금하네요.
한시라는 것이 한자가 가지는 특성처럼 아주 짧은 글 속에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고 여러 가지 해석이 가
능하잖아요.
이런 우스개 소리 들은 적 있으세요?
기자들이 동시 통역사들의 통역을 들으면서 열심히 기사 작성을 하는데 다른 나라 기자들은 손이 안 보
일 정도로 빠른 속도로 타이핑하는데 중국 기자들만 가끔 한 번씩 키보드를 두드리더래요.
그런데 이런 게 바로 한시의 매력인 것 같아요.
단어 하나가 그 어떤 대하소설보다 더 큰 감동으로 가슴을 울리는 경험, 해 보신 적 있으세요?
전 종종 하거든요.
이 책을 읽으면서도 몇 천 년 전에 살다가 이들의 감성이 현대와 결코 다르지 않게 세련되어 있음을 느
낄 때 또 짧은 시어 속에 인생의 많은 부분을 그려낼 때 나도 모를 신음소리가 나와요.
특히 제 가슴을 쳤던 한 구절 소개할게요.
추부는 늘 내게 말하곤 했다.
“인생 백년에 잠자는 것이 반을 차지하고, 근심 걱정과 병든 날이 반을 차지한다. 강보에 쌓인 어린 시절
과 늙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날이 또 반을 차지한다. 겨우 남는 것은 열에 하나나 둘일 뿐인데, 하물며
우리처럼 약해빠진 체질로 오히려 백년도 기약할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겠는가?"
유란성은 이렇게 말했다.
“한 달에 즐겁고 기쁜 것은 사오육일뿐이다.”
생각해 보니 절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일 뿐이니, 이 말이 참으로 옳구나.
한시라고 하면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시절에 선비가 떠오르고 충효만을 지상과제로 한 딱딱한 시
가 대부분일 거라는 예상을 시원스럽게 깨고 애절한 애가와 인생에 대한 진지하지만 어렵지 않은 시들이
많이 수록되어 잘 읽힌다는 것이 이 책의 큰 장점이예요.
대부분의 한문 교과서가 한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책을 읽음으로 조금 더 한시, 한자와 친해질 수 있
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 한 가지 빠뜨릴 수 없는 tip!
저는 서문이 아름답고 재미있는 책을 특히 좋아하는데요.
이 책엔 저자인 정민과 그림을 그리신 김점선님의 서문이 함께 실려 있는데 서문만으로도 충분히 책을
사 줄만합니다.(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서문은 예전에 출판된 김한길 [여자의 남자]였습니다. 소설 내용
은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신파였지만 서문만은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래서일까요? 출판사에서도 광고 사
진에 청바지를 입고 비스듬히 누워있는 김한길과 함께 서문을 실어 대대적인 광고를 해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