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조금 어린 친구들은 작년에 sbs에서 리바이벌 된 토지가 더 친근하겠지만 내게 있어 드라마 속 최서희는 슬픔과 독기가 가득 서려있던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며 조준구에 대한 저주를 퍼붓던 젊은 시절의 최수지다.(그때 서희역을 선발하기 위해 kbs에서 별도의 선발대회를 열었는데 결국은 사랑이 꽃피는 나무란 드라마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최수지가 발탁되었다. 탈렌트 이응경도 이 대회에 참가해 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젊은 시절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니 이응경=최서희 조합도 괜찮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물론 이응경의 젊은 시절의 미모를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에게는 왠 최서희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김현주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내 개인적인 견해다. 시집간 심은하가 아니라면 오히려 김태희 정도가 캐스팅될 줄 알았다.-여담 끝)
10대 소녀가 보기에는 좀 어렵게 느껴진 드라마였지만 워낙 유명한 소설이라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한 달 용돈 삼천원을 받던 내게 엄청난 거금이었던 4,500원짜리 지식산업사판 토지1권. 당시 나의 과외선생이었던 친척언니와 함께 읽으며 열심히 토론했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은 희귀해진 세로 글쓰기에 글씨 크기도 엄청 작아서 읽기 힘들었지만 다 읽고난 후 갑자기 훌쩍 어른이 된 듯한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체 내용의 3분의 1이나 이해했을까? 그저 내 우상이었던 최서희가 등장하는 부분이 생각만큼 많지 않은게 아쉬웠고 길상과 서희,이상현,봉순의 4각 관계가 관심의 전부였을게다.
1부 2권. 2부 2권 총 4권짜리 지식산업판을 모은 후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정신없는 20대 초반을 보내느라 토지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다.(예나 지금이나 나는 한 가지에 빠지면 책을 전혀 들여다보지 못하는 병이 있다. 광녀처럼 열중했던 연인이 있을 때는 남자친구 리포트 대필 때 외에는 책을 읽어본 기억조차 없다)그러다 내 손으로 돈을 벌면서 다시 책을 사 모으는 재미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그때 자주 가던 동네 서점에 두번째 토지(솔출판사)가 완간되어 책꽂이에 얌전하게 꽂혀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그게 아마 광복 50주년이었던 95년 경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정작 한 질을 사놓고도 내 인생 중 가장 바쁜 시기라 책을 사놓고 읽을 시간을 미처 내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일부분이 불량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솔출판사판이 절판된 다음이었다. 무지하게 씩씩했진 지금이라면 솔출판사에 전화해서 교환해 달라고 했겠지만 그때는 아직 여리여리,어리어리(?)한 처녀인지라 불완전한 토지를 읽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03년 울 아가를 뱃속에 품고 있을 때 한 권 한 권 장만한 나남판 토지. 표지가 썩 맘에 들지는 않지만 일단 책꽂이에 꽂아놓으면 속된 말로 뽀대가 난다. 생활비를 아껴 한 장 한 장 그릇을 모으다가 마침내 모든 세트를 구비하여 장식장에 넣고 바라보는 주부의 마음이 나와 같지 않을까?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어렵기도 하고, 따분하기도 했지만, 10번정도 탐독한 지금은 책 속의 한 구절, 한 구절, 혹은 각각의 장면들이 시시때때로 예고없이 다가온다. 또 1000여명이 넘는다는 토지 속 인물들이 마치 현재와 과거에 알고 지내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친근하다.
여름이 시작하는 6월이 되면 나는 선풍기와 함께 토지1권을 꺼낸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읽는 것은 토지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극대화하며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버릴 수 없는 편견이다. 주인공 최서희가 이상현의 구애를 안간힘을 쓰고 거절한 후, 복중에 수틀을 매놓고 자수에만 집중하던 장면을 내 나름대로 느껴볼 수도 있고 매운 겨울 바람이 몰아치는 만주 벌판을 내달리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우던 의사들을 상상하노라며 끔찍한 더위도 어느새 저 멀리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10대에는 완벽한 미모와 재력 길상과 상현의 사랑을 독차지한 갖춘 최서희를 동경했다면 20대 때에는 생명력이 넘치는 임이네가 부럽기도 했다. 30대 중반인 지금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부모 밑에서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웬만큼 사는 집에 시집가서 아들딸 손자손녀까지 고루 보면서 미친듯이 부를 축적하는 집안에서 별 걱정없이 늙어가는(물론 이여자에게도 걱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자가 되었지만 가족간의 의리는 사라진 친정 때문에 늘 한 구석이 짠하다)팔자좋은 선이가 나의 이상형이 되어버렸다.(너무 속물인가?)
워낙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다 보니 과연 저자가 등장인물을 모두 기억할까 하는 쓸데없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성은 다르지만 내 이름도 당당히 조연급으로 등장하고 울딸이름도 등장한다. 근데 재미있는 것은 극중 승아엄마는 홍의 처 보연의 친구로서 당시에는 불법인 금매매로 한재산을 모은 복부인이다. 이 아줌마 때문에 보연은 징역살이를 하게 되고 만주에 살던 상의(아마 작가의 모습과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네 가족이 다시 조선에 돌아오는 계기가 된다.
우리가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바로 100년 전 우리의 모습들이 파란만장하게 그려진 이 소설을 읽다보면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아름다웠던 여인 최서희도 슬픈 운명을 타고난 월선이나 봉순이도, 억센 임이네나 천상 한국남자인 용이나 홍도 아닌 허리 굽어진 우리의 어르신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격동기를 거쳐오면서도 인간과 생명을 가진 것에 대한 외경심을 잃지 않고 가난 속에서도 자신을 지켜내고 이웃을 생각하던 따뜻한 정이 숨쉬는 이웃들이 바로 토지의 주인공이 아니까?
그래서 내게 있어 대하 소설 토지는 평생 곁에 두며 반복해서 읽고 싶은 내 인생의 최고의 책이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우리 딸이 꼭 읽고 나와 함께 얘기해주었으면 하는 첫 번째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