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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가 안되는 냄비....

| 조회수 : 11,563 | 추천수 : 6
작성일 : 2012-03-06 13:29:34


엄마가 전화로 말합니다. 

"얘, 전기장판이 고장 났는데 이것을 어떻게 할까?"

"엄마한테 두 개 있다고 하지 않았어? 고장 났음 버려."

"이거 올케가 준 건데, 겉이 순면이라 보들보들해. 그냥 요위에 깔고 쓸까?"

"엄마가 요위에 깔고 쓸 게 없는 것도 아니잖아.

오마니.. 법정 스님도 돌아가셨구만, 뭘 고장 난 전기장판까지 끼고 살려고. 걍 버리슈."


버리라고 말하고 나서 밤에 자려고 누워 이 생각 저 생각, 

내 옷장 옷들도 정리해야 하는데... 부엌살림은 또 어떻고..

그렇게 생각이 아른아른 퍼져나가다 

문득 커다란 찜기 겸 냄비가 떠오릅니다.


24년 된 냄비.

내가 결혼한다니까 친구 A가 백화점 데려가서 사준 거지요.

사고 싶은 거 고르라고 해서 골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참 비싼 거였어요. 그 당시에 9만원.

이제 살림에 실눈이라도 뜬 주부로서

아무리 크다 하나 속에 얇은 코팅한 양은 냄비 따위를 9만원씩 받고 팔았던

백화점 측에 분개하고

그 가격이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지 모르고 덥석 산 어린 시절의 내가 한심하지만

아무튼...


그 냄비를 미국까지 들고 가서 잘~썼습니다.

찜기 겸용이라 찐빵을 자주 쪄 먹었지요. 

미국 살이가 워낙 손님 초대가 잦으니

거기 떡국도 끓이고, 사골국도 끓이고...


석회물이 나오는 동네라 속 코팅에 희뿌옇게 석회가 끼었지만

몇 년 후,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올 때

또 이삿짐에 넣어 왔지요.

그냥...웬만한 거 정리했는데도,

5중바닥 스텐으로 된 스페인산 튼튼한 냄비가 생겨서

석회 낀 지저분한 양은 냄비는 가볍게 정리할 수 있었는데도

그냥 들고 오게 되더라구요. 

아마 A와 소식이 끊겨서 그랬나 봐요.

 

집안이 어렵지만 똑똑한 A는

저보다 1년 먼저 미국에 갔었어요.

장학금까지 받고 말이죠.

가자마자 한 달 만에 통화를 했는데

룸메이트가 자살을 해서 자기도 상담치료 받고 있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언제 한 번 놀러오라고, 그 냄비에 찐빵을 쪄 주겠다고 했지만

물리적인 거리는 너무도 멀었고,

장학금을 받는다 해도 그 애가 우리 집까지 비행기 타고 올만한 여유는 없었고... 

몇 년 뒤 A가 학교를 옮기면서 저와는 소식이 끊겼어요.


그런데 옮긴 학교에 다른 친구 B가 있었지요.

저는 십여 년이 흘러서야 B를 만나 A 소식을 들을 수 있었어요.

논문이 잘 안되어 매우 고민하던 A가

증발해버렸다는 것....

그야말로 증발이었지요.

그 어디서도 A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고

학교 쪽에서는 기숙사 짐을 빼라고 해서

오빠가 비행기 타고 날아와 여동생의 짐을 빼갔다고 하네요.

홀어머니께는 그때까지 여동생이 없어진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1년 쯤 지났을까? 어느 날, 그 도시의 어느 거리에서

같은 학교 학생이 A인 듯한 사람을 우연히 보았대요.

승복 비슷한 회색 옷을 입은 뒷모습을.

그 거리는 밀교가 많은 곳.

왠지 느낌이 와서

‘A씨!’하고 불러봤더니

그 사람이 휙 돌아보더니

‘나, A 아닌데요?’ 하며 그냥 가 버렸다고...


B가 말합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A는 왜 그랬을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지?

최윤의 '회색눈사람'이란 단편도 생각나고 그래.

특히 요새 내 몸이 나잇값하면서 시들시들하니 쇠약해지면서,

병원치레 하면서

A 걱정을 하게 된다.

A는 혹시라도 몸이 안 좋을 때 병원에 갈 수 있는 건가.

(불법 체류자가 되어 버렸으니...-_-)

왜, 미궁에 빠진 살인사건 피해자의 가족들이 30 년 후에 범인이 잡힐 때

이제 마음이 정리된다고 하잖아?

A의 소식을 확실히 알기 전에

이 정리되지 않은 마음의 상태로 살게 될 거 같아.

슬픈 일."

 

정리....

가끔씩 살림 정리하면서도

한 번도 안 쓰는 이 양은 냄비는 

치울 수가 없습니다.

정리가 안 된 관계 때문에...


A야, 네가 준 이 냄비에 찐빵을 쪄서

단팥에 호두 넣고 계피가루 뿌려

따끈따끈하게 쪄서 

호호 불며 우리 함께 먹어볼 날이 있을까? 


촛불 켜고 가끔 기도한다.

어디서든 건강히 있기를...

네가 있는 그곳에서

그럭저럭 행복하기를...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월요일 아침에
    '12.3.6 2:11 PM

    냄비가 커서 부엌 정리에 거추장스럽다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 친구분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실까요?
    부디 행복하시길, 그래서 쑥송편님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비오는 날이라 그런가 사연을 가진 그릇 이야기가 더 마음 깊이 와닿습니다.

  • 2. 파워비타민
    '12.3.6 3:52 PM

    마음이 아프네요. 소식이 닿아 좋은 얼굴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 3. 고독은 나의 힘
    '12.3.6 10:33 PM

    친구분께서 어디에 계시든지 건강히 잘 계시길 바랄께요

  • 4. 나누
    '12.3.6 10:54 PM

    원글님의 닉네임을 보니 쑥떡을 좋아하시는 시어머님이 그리워져 읽게 되었는데 이런 좋은 이야기를 만나게 되었네요. 그 친구분이 이 글을 읽으시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게 되네요.

  • 5. ssac
    '12.3.7 2:09 AM

    아, 왜일케 문학적 소양이 높은 분들이 많아요...
    서늘하고 쓸쓸한 기분이 들어요.
    기도대로 친구분이 행복하게 나타나서 해피앤딩이 되기를 바랄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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