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키톡에 글을 올리오.
늘 마음은 있었으나, 요리가 없어 들리지 못하였음을 알아주시요.
여기 있소.
키톡의 본질에 맞는 요리 사진이요.
소시적, 친정엄니는 요리 프로그램을 보며 비웃음을 날리셨소.
저리 양념을 때려 부어서 안 맛있는 것이 어디 있냐며...
엄마..여기 있다오.
(수미쌍관법적 글쓰기외다)
요리 사진 하나 날렸으니,
이제 본론으로다가 이곳을 소개할까 하오.
이곳은 1889년부터 대한제국의 공사관이 있었던 건물이요.
워싱턴 디씨에 가 볼만한 곳을 추천해 달라는 글에 딴게이 한분이 이곳을 언급하셨는데,
나도 처음 듣는 곳이라서, 휴일을 맞이하여. 애들을 몰고 다녀왔소.
1882년 조미통상조약이후 1888년 박정양공사가 미국에 파견되고, 1889년에 이곳에 조선의 첫 공사관이 문을 연다오.
이곳은 펩브스라고 하는 남북전쟁의 유명한 영웅이 자신이 살 집으로 만불을 들여서 지은 저택이었소.
3년정도 이곳에 세들어 살던 조선제국은 이 건물을 2만5천불에 사들이는데,
2만5천불은 당시 조선정부의 일년예산의 반이상의 금액이었소.
이 장소는 공사관으로 임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다가, 1910년 한일합방이후로 일본에 의해 강제로 팔리게 되오.
단돈 5불에 말이요. 5불에 산 일본인은 그후에 또 즉시 어떤 미국인에게 10불에 넘기오.
서류상에 남아 있는 액수가 아주 작은데, 이 꼬롬한 거래가 엠비스러운 것이 뒷거래를 짐작하게 하오.
빨리 이 건물의 소유권을 조선과 일본에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의지가
손쉬운 뒷거래를 통해, 서류상 액수를 이리 미미하게 남긴듯 하오.
그후 이 건물은 자선단체의 소유로 있다가,
2012년 대한민국의 문화재청이 한화로 약 40억(3백만*십만불)다시 사 들일때까지
한 가족이 40년동안이나 소유하고 있었다오.
그 덕에 이 건물은 이 외교관저들이 수두룩한 이 거리에서
유일하게 19세기 말에 모습을 안팎으로 그대로 간직한 건물이 되었소.
1층은 사진자료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 모습 그대로 재현했소.
당시 태극기는 그리지 않고, 기워서 만들었고,
태극기위에 있는 광화문 사진은 그 당시 미국사람이 찍어서 선물했는데, 이것 역시 그대로 따라 만들었소..
물론 카피본을 구해서 말이오.
그 외에 이곳에 있는 모든 사진들과 자료들도 전부 카피본으로 그 당시에 있었던 위치에 전시해 놓았다오,
이곳은 손님을 접대하는 식당이요.
지하에 부엌이 있고, 하인들이 요리를 해서 운반했다고 하오.
1층의 접견실이요.
샹들리에는 사진대로 다시 제작했고, 가구들과 양탄자도 재현했으며,
소품들이 모두 19세기에 쓰던 것들을 사다 두었고,
구할 수 없는 것은 2여년동안 건물을 보수하면서 주문제작했다고 하오.
2층에 있는 공사의 집무실이요.
2층은 사진자료는 없지만, 우리가 누구요?
그렇소. 기록의 민족이요.
당시에 방안에 있는 모든 소지품 품목들 하나하나를 다 기록에 남겼다오.
어명이었다고!
그래서 재현하기 아주 쉬웠다오.
이곳에서 주기적으로 모여서, 고종과 고종이 머문 궐을 향해서 의례를 갖추었소.
이곳 2층에는 도서관도 있었고, 책이 총 600권 있었는데 그 숫자까지 기록이 되었소.
저 캐비넷위에 갓은 이곳에 부임했던 이범진공사가 취미로 수집하던 것이었다고 하오.
넷플릭스의 킹덤을 보고, 갓에 반한 외국인들 많다는데...시대를 앞서 가는 사람이 패션이라고 뒤쳐지랴 싶소.
공사의 침실이요.
기록에 남겼답디다. 공사는 퀸사이즈침대를 썼다고..
2층은 이 외에도 도서관,
그리고, 그 당시에 미국에서도 파격적으로 좋은 수도와 현대식 세면시설의 목욕탕과 화장실을 갖추고 있고,
지도, 저울, 타자기와 선풍기등이 있는 직원들이 직무하던 방이 있소.
아까 언급한 갓 수집이 취미셨던 이범진공사의 가족사진이오.
이곳에 부임한 후에 프랑스에 공사로 가셨다오..
가운데 있는 아이가 이위종이라고, 이곳에서 4년살고, 프랑스로 가서 또 살고, 거기서 육사를 나오고..
그리하여 7개국어에 능통하여,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었던 인물이오.
이범진공사는 한일합방이후 자결을 하고, 이위종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 러시아에서 생을 마감한 인물이요.
이게 누구신가
또...우리는 여기서 문제적 인물을 만나오.
이완용이 여기서 근무했다고 하오.(공사아니고, 직원으로)
식구를 이끌고 와서 말이요.
그의 와이프가 왼쪽 여인이라고 하오..
맞소. 이완용부인이 저리 생겼다오. 왼쪽이요. 왼쪽...
오른쪽 여인은 이채연공사의 부인 배씨부인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신여성이었고,
열심히 조선을 위해 힘을 쓰던 여인이었다오.
헷갈림 배씨부인을 욕보이는 일이오.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이완용부인으로 오해받으면 얼매나 억울하겠소?
당시에 이완용은 친미파였고, 그 다음에는 친러파, 그리고 친일파 테크를 탔다오.
참으로 일관된 삶이었소.
죽을 즈음, 아들에게 다음엔 미국이 쎈듯..?말했다는 썰도 믿어지는 삶이오..
주소를 소개하오.
1500 13th st.NW
Washington D.C. 20005
링크는
분명히 말하지만, 이곳은 이젠 박물관입니다.
여권갱신한다고 오지 마시오. 제발~
여권갱신은 여기서 십분거리에 듀퐁써클로 가면, 한국영사관 있소.
이곳은 백악관에서 걸어 십오분 걸리는 곳이요.
문화재청이 큰 일 했다고 생각되오
직원들이 살았던 3층건물에서 보이는 광경으 보시요.
19세기말 공사관 직원들이 살았던 그 공간에서 내려다 보이는 저 하늘녁아래 풍경들
그들은 무얼 생각하고, 느끼고, 지냈을까 상상해 보오.
인스타그램에 내가 올린 한장의 사진이오.
인친 한분이 ..조선의 미래..라며 미스터션샤인을 연상시키는 댓글을 달아서, 마음 찌릿했소.
무언가가 과거를 통과하여, 현재와 미래를 들락날락하니 말이요.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는 것인지.
인걸은 죽지도 않는데, 산천만 천지개벽을 했는지.
둘 다를 다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지만 말이요.
똑같은 풍경을 보고, 똑같은 경험을 해도 선택이 달랐던 사진 속 역사적 인물처럼.
우리의 하루하루도 내 선택에 따라 나의 삶이 달라질 것임을 믿소.
한 해를 보내며, 생각하오.
내 삶의 이 모양 요 꼴은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고, 책임이고, 탓이고 영향력이었음을 말이오.
나로부터 비겁하지 않는.. 그런 또 다른 한 해가 되길 바라며,
언니들 동생들에게 다만 사랑과 응원을 보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