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 어떻게 글을 시작해야 할까요 ?
대학교 2 학년때였나요 ? 신문에서 일하면서 밥해먹기 책에 대한 기사를 보고 , 82 쿡 싸이트를 찾아서 회원이된게요 .
원래 요리에 관심이 많아서 키톡이 활발하던 시절 , ' 어 , 어 , 내가 내 부엌과 살림이 생기기만 해봐라 , 나도 키톡에 자주 자주 글을 올릴거다 ' 다짐을 했었는데 .. 지난 세월 딱 세번 글을 올린거 같아요 .
회사때려쳤다고 , 유럽가서 이것 저것 먹으며 마음을 달랬다고 . 결혼한다고 , 결혼해서 밥해 먹기 시작했다고 ,
어 , 내가 내 가정이 생기면 어디이런 홈 스위트 홈이 있나 정말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라면에 스팸을 자주 먹고 살고 제 현재심정은 나름 굉장히 참담합니다 .
중간에 컴퓨터가 한번 바뀌어서 사진자료가 어디에 있는지 잘 찾을 수가 없어서 제 살림 초창기 사진을 찾을 수가 없지만 결혼하고 곧 남편이 외국에 가는 바람에 ... 아기를 낳고 엄마집에서 더부살이 시작 ..
와우 .. 성인되어서 , 그리고 한번 분가했다 다시 엄마 집으로 들어가 사는거 ... 안해본 사람은 알수 없는 그 깊고 심오한 세계에서 저만의 부엌의 꿈은 이억만리로 사라졌지만 , 뭐든지 잘먹어주는 아기덕에 달력에 꼼꼼히 기록하며 정성껏 이유식도 만들고 주어진 환경에서 나즘 즐거움을 찾아가며 음식을 만들었더거 같아요 .
대망의 아기 첫 생일 . 제 바램대로 라면 제가 정성껏 준비한 첫 생일상을 아기에게 차려주고 싶었지만 , 제 집도 없는 마당에 어디 언감생심 제가 차린 돌상을 꿈꿀 수 없어서 한정식 집에서 계약된 곳에서 차려주는 생일 상으로 저희 아기 첫 생일을 맞았습니다 .
돌상은 예뻤지만 , 저의 첫 아기 , 첫 생일인데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아쉬움이 컸어요 .
여기서 부터는 사진을 올릴 수 있을 거 같아요 .
돌날 생일 상은 차려주지 못해도 제가 직접 한복을 만들어 주었어요 . 바지 , 저고리 , 까치두루마기까지 ..
남편이 첫 생일선물로 사준 재봉틀로 정성껏 만들어 주었습니다 . 당시에는 열심히 만들어서 리빙데코에 후기 올려야지 생각하며 만들었는데 결국 올리지 못한 ..
두돌역시 더부살이 진행중 ... 손자를 너무 사랑하시고 본인이 진두지휘해야 직성이 풀리시는 어머니가 차려주셨어요 . 제가 수수팥떡 직접 만들꺼라고 준비하니 쓸데없는짓 한다고 싫어하셨지만 역시 저에게 큰기회 안주시고 진두지휘 ... 한복은 만들었으면 마르고 닳도록 입히려고 한여름에 한복입니다 .
드리어 다시 저희 가정만의 집이 생겨서 즐거운 살림 시작 .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달라 , 플레이팅 하나 없는 식탁에 뒤에 저는 수면잠옷 아래위로 출연 중이네요 .. 그래도 건강하게 먹이려고 노력하던 시절 .
애기가 5 살 되던해 드디어 제 생애 최초로 제 자식의 생일 날 아침에 갓지은 밥과 미역국 , 불고기와 수수팥떡으로 생일 상을 차려주었어요 . 당연 수수팥떡은 한입도 먹지 않았지만 항상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며 행복했던 시간 .
세식구가 된 이후 우리들만의 집에서 맞은 첫 크리스마스 . 진저브레드하우스를 만들어서 우리 세가족을 붙여놓았어요 .
진저브레드맨 도 만들어
트리에 걸어주었어요 .
처음으로 싸봤던 우리아들 소풍 도시락 . 아 ... 이때는 김밥에 뭐 골라먹지 않고 골고루 잘 먹던 아기였구나 .
이제는 소풍에 혼자 햄앤치즈 샌드위치 싸가는 우리 아들인데 ..
나도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는데
...
하늘은 저에게 딸을 허락하지 않으시더군요
..
혼자서 아들이지만 새생명을 축하하며 쿠키를 만들어서 나눠먹기도 하고 ..
임신체질이 아닌 저는 두 아들 다 .. 분만실에 들어가는 날 까지 입덧을 하며 토하고 .. 살림도 요리도 멀어져 갔죠 ...
아 맞다. 생각해보니 큰애 낳으러가던 날도 82쿡에 이게 양수인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병원에 가는게 맞는건지 물어보고 겪려받고 진통하면서 누워서 저를 향한 격려의 글을 읽으며 잘 견디었어요.
저도 두 아들 클럽에 입성 ... 이때까지만 해도 저에게 펼쳐지 앞날을 몰랐지요 .
큰아들은 갑자기 나타난 동생이 사랑을 빼앗아 갈까봐 힘들어하며
이런 저런 갈등으로 저와 서로 눈물 짓는 일이 많아졌고
그래도 아기가 태어나던해 크리스마스에는 아기가 누워있고 잠도 많이 자주어 뭔가를 할 수 있던 고마웠던 .
큰아들의 참여로 진저브레드 하우스의 퀄리티가 좀 떨어졌지만 , 진저브레드맨들도 이제 어른 두명 , 아기 두명인 우리집 ..
이런 멋진 사진은 친구들이 집에 놀러와줬을 때 찍은 사진 ... 그날 이후 .. 연락만 하고 얼굴은 보지 못한 나의 친구들 .
이런 감수성 나 너무 좋아한다고 우리 자주자주 만나서 여자여자 한거 많이 많이 하자고 내가 얼마나 좋아했던지 .
해보고 싶은거는 많아서 이해에는 칠면조도 사다 가족들과 나눠 먹어봤다 . 내가 동화속에서 본 크리스마스를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 아들은 별 감흥없던 ....
그래도 둘째는 제 손으로 돌상을 차려보았어요 . 떡집에서 떡은 맞췄지만 내손으로 과일고르고 미나리도 사며 행복했던 시간 . 첫째 시절이었다면 인터넷보고 상화도 내손으로 만드는 투혼을 불살랐겠지만 , 현실과 어느정도 타협해야 모두가 행복하다는 걸 아는 이때는 찰흙 (?) 으로 만든 저 상화도 크게 눈에 거슬리지 않았네요 .
동생이 주인공이 되는 날을 힘들어 하는 첫째는 동생의 돌잔치날 , 동생도 나도 울리고 말았지만 .... 지나고나니 큰애 너도 이날 많이 불안하고 힘들었음을 엄마가 받아들 일 수 있구나 . 소중한 우리 막내 , 엄마가 직접 전통돌상 차려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 누군가 다 구색을 맞춰서 배달해 준 것들이었지만 너의 첫 생일을 직접 준비하며 엄마된 기쁨을 충만히 느끼며 행복했단다 .
큰애가 좋아할거라고 생각하고 만든 레인보우젤로 .. 하나 조금 먹더니 못먹겠다고 하더라 .
이때쯤 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나 ? 큰아이가 이것저것 다 싫다고 말하기 시작한게 .
올해 부활절에는 계란전용 천연염료를 사다 예쁜 달걀을 만들어 간식으로 주었는데도 , 구운달걀이 아니어서 싫다고 손도 대지 않던 큰애 .
언제 부터였을까 ? 살림이 고통이 된순간이 .
내가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도 햄이나 베이컨이 없냐고 물어보는 가족들 . ( 여기는 애들 아버지 탓이 크다 )
아무리 치워도 한시간 이면 원상 복구가 되어 치우는 의미를 찾지 못하는 어지러진 우리집 .
빨래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해결해 준다고 하여도 개켜서 찾아넣기도 전에 다시 쌓여있는 빨래감들 .
음식을 하기위해서 해치우는 설거지 , 그리고 음식을 했기에 다시 쌓이는 설거지 .
이렇게 노력해도 아무도 칭찬하지 않는 나의 삶 ..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는 나의 삶 .
누군가 조금만 격려해줘도 , 누군가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같이 해줘도 금방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 남편은 늘 사람쓰라는 이야기뿐 . 이집에 사는 사람들이 버릴것을 다 버리고 초벌로 대충 정리를 해야지 도움을 받는 의미와 효율이 따른다는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
그리고 오늘 .
나는 지저분한 부엌에서 끓는 라면의 사진을 찍고 나름 최선을 다해 큰애를 위해서 라면을 예쁘게 차려주었다 .
그 아이가 원하는 아무 재미도 없는 스텐수저를 꺼내 놓아주고 , 내 기분도 그 아이의 기분도 나쁘게 하지 않기 위해서 그 동안 내가 죄책감과 패배감을 느끼며 애증으로 자주 공급했던 라면의 국물까지 아이가 흡입하는 것을 바라보며 다량의 나트륨이 아홉살짜리 몸으로 스며들어가는것을 지켜보았다 .
여기서 , 이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
어느 누군가가 , 입짧은 자식들을 정성으로 해먹이며 그 과정과 메뉴 , 그렇게 해먹이며 사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나눠준 이곳 .
가끔 그 사람을 생각했다 . 그 사람은 왜 이곳을 떠났을 까 .. 짐작은 살짝 가지만 어떤 상처를 받았기에 그 토록 애정을 쏟았던 이 곳에 다시 발걸음 하지 않을까 .
나이 40 이 되니 , 주변인들은 생각하지 않고 내 가족만 생각하는게 정답이라고 결론지었었다 .
SNS 는 인생에 하등 도움이 안된다는 퍼거슨 경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인터넷에서 남 보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써놓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
그리고 , 갑자기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읽게 되었다 .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요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 안먹는 자식이 한숟가락 이라도 더 먹을 수 있도록 그렇게 애쓰더너 그가 정작 자신은 홀로 불규칙한 식사를 하며 위암 1 기인데도 50 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였다고 했다 .
그리고 나는 보았다 . 수백명이 사람들이 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모습을 .
일면식도 없는 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현실 시간을 쪼개서 장례식장으로 찾아가 유족의 손을 잡고 그 사람에게 표하지 못한 감사의 말을 전하는 말을 들었다 .
나에게 있어서는 이 곳은 다 끝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 마치 재개발된 신도시처럼 이전의 흔적은 알아보기 힘든곳이라고 생각했는데 , 그 사람이 남기고 간것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고 ,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돌아보는 모습을 보았다 . 어떤 일에 대해서 열정을 가지고 열심을 다했을 때 , 댓가를 바라지 않고 사람들에게 친절한 답변 한마디를 기록한것이 , 자신의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한 모습을 그 방법을 나누었던 그 사람의 노력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
자스민님이 열심히 이곳에 글을 남기시던 때가 지금 내 나이 쯤이었을 까 ? 지금 내 안에는 결혼 이후 뭐 하나 내뜻 대로 되는 것이 하나 없구나 하는 무기력함만이 가득하다 . 잘해보고 싶었는데 , 늘 웃으며 살뜰 하게 내 손으로 잘 해먹이고 싶었는데 .. 지금 나에게 요리란 그냥 잘 먹지도 않을 것들을 만들어 설거지감을 생산하는 일에 불과했다 . 야채라서 안먹고 , 돼지고기라서 안먹고 , 비린내 나서 안먹고 , 물렁물렁 해서 안먹고 . ..
나는 분명히 자스민님처럼 잘 할 수는 없겠지만 , 고느님을 위한 아침상을 다시 읽어보며 아이를 위한 노력을 다시 시도해 보고 싶다 . 야채는 좀 더 잘게 다지고 , 좋아하는 음식에 몸에는 좋지만 싫어 하는 재료도 살짝식 숨겨 넣어보며 , 튀기기도 해보고 굽기도 해보며 .. 나의 사랑을 다시 표현해 보고 싶다 . 지금은 눈에 안보이고 , 부질없는 짓 처럼 보여도 나의 정성이 , 나의 사랑이 내 아이의 마음속에 살아 숨쉬고 있을 것임을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