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대 국회는 1967년 7월 1일부터 임기가 시작되었지만 11월에야 신민당이 국회에 등원하면서 실질적인 활동이 개시되었다. 장준하의 의정활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회에서 경제과학분과의 국방분과위원회에 소속되어 의정활동을 시작했다.
장준하가 의정활동을 한 1967년 7월 1일부터 1971년 6월 30일까지 4년은 격동기였다.
우선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을 위해 서울 침입, 4월 1일 향토예비군 창설, 8월 24일 통일혁명당사건 발표,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1969년 6월 8일 울진ㆍ삼척 무장공비 출현, 9월 14일 3선개헌안 날치기 통과 등 박정희의 영구집권 체제로 가는 길목이었다.
박정희는 무장공비의 침입을 계기로 안보체제를 강화하면서 3선 개헌을 감행했다. 마치 ‘적대적 공생관계’ 처럼, 남북 지배자들은 상대를 적으로 상정하고, 이를 자신들의 권력강화의 명분으로 이용해 왔다.
장준하의 의정활동은 ‘국회의원 장준하’ 보다 ‘사상계 장준하’의 연장선상이었다.
다른 의원들이 기피하는 국방위원에 지원하여 군 내부의 부패와 문제점을 파고 들었다. 박정희와 간접싸움을 벌인 셈이다.
이 무렵의 비화가 있다.
당시 2군단장 김재규는 국방위 장준하의 의정활동과 청렴상을 지켜보고 크게 감동하여 의문사 후에 가족을 돌봐주었다. 장준하가 의문사 당하기 전에 모종의 ‘거사’를 준비하면서 군 일부에서도 동조자가 있는 것처럼 발언한 적이 있다. 이 역시 국방위 활동과 연관되는 대목이다.
박정권은 1ㆍ21 무장공비 사건을 빌미로 향토예비군을 창설한데 이어 향군의 무장과 향군 대상자들을 1년에 20일간 훈련동원하는 향군법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신민당은 당론으로 표결에 참석을 거부하고, 공화당의원들 만으로 처리하고자 했다.
장준하는 이 나라 청년들을 제도적으로 묶고, 생업에 막대한 지장을 주게 된다는 이유를 들어 향군법 개정의 부당성을 국방위에서 주장했지만 공화당은 숫적으로 밀어부쳤다. 장준하는 의원 뱃지를 떼고 국회 방청석에서 여당만의 향군법 개정안 처리를 지켜보기로 했다.
나는 이 법률안의 통과에 대해서만은 똑똑히 나의 두 눈에 기록하고 싶었던 어떤 무의식적 충동에 이끌리어, 방청석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한 나라의, 역사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그 순간이 나에게는 긴장을 주었다. 그것이 원활히 돌아가는 것이 아닌 한, 변칙적으로 어떤 예측할 수 있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돌아가는 한국사의 톱니바퀴…. 그 맞부딪는 금속성이 나에겐 짜릿한 암시를 가슴에 꽂아주었다. (주석 26)
장준하는 이 글에서, 진정한 국가안보는 국민에게 자유를 주고 민주주의를 실행하여 청년들의 병역의무가 보람과 긍지를 갖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준하는 1968년 제 67회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월남참전-파병인가, 용병인가"라는 제목으로 베트남 파병과 수많은 희생자를 낸 데 대해 신랄히 따졌다.
월남과 우리 사이에는 아직도 무슨 상호방위조약이라든가, 혹은 잠점적인 군사협정이라든가 이런 것이 체결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또 그렇다고 해서 월남이나 우리나라는 지역적 무슨 집단안전체제에 두 나라가 같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국군의 파병을 또한 국제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국제연합의 출병결의가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6.25사변에 있어서 16개 참전국이 출병해 준 것은 여러분께서 다 아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엔의 결의에 의하였던 것이라는 것을 여기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부는 월남의 방위는 한국방위의 일환이라고 말하지만 월남의 위급한 국면을 바로 눈앞에 보고 있는 태국ㆍ필리핀 그 밖에 여러 나라들, 이 나라들은 우리 못지않게 대미관계에 있어서 깊은 연결을 가지고 있고, 또 월남과는 지역적 방위체제 속에 끼어 있는 나라들이 많은데, 이들 나라는 지극히 상징적인 지원 이상을 넘어서지 않고 있는 사실을 상기할 때 우리가 5만 명을 파병하고 있는 것은 엄청난 처사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주석 27)
장준하는 국회의원 신분으로 반독재 투쟁의 선두에 섰다.
특히 박정희가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해 추진한 3선개헌 반대투쟁에는 야당의 어느 누구 못지않게 격렬하게 싸웠다. 장준하는 박정희의 3선개헌 음모가 진행되자 재야세력을 주축으로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범투)’를 조직하여 고문 함석헌ㆍ윤보선, 위원장 김재준을 위촉하고 자신은 선전위원장을 맡아 활동에 들어갔다.
‘범투’ 산하의 청년위원회에서는 3선 개헌 음모를 낱낱이 폭로하는 전단 50만 장을 만들어 서울시 전역에 살포했다. 종로경찰서에서는 전단작성 및 불온내용과 관련하여 장준하를 소환, 유인물의 작성자를 밝힐 것을 요구했다. 장준하는 청년들의 신변을 염려하여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고,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났다. ‘범투’가 주최하는 3선개헌반대 국민선언대회를 마치고 종로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다음은 7대 의원생활을 함께한 두 사람의 회고담이다.
나는 이 데모 (3선개헌 반대)의 수행 전후에 장선생의 인간됨을 다시 한 번 절감한 바 있다. 그분 정도의 캐리어를 가진 국회의원은 점잖게 뒤로 앉아서 앞장 서지 않는 것을 마치 권위인양 내세우는 데 장선생은 그 점에서 너무도 소탈했다. 역시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애국운동을 해 온 분이 다르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것이다.(주석 28)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3선개헌을 반대하는 국회의원 데모를 모두 꺼리는 데 장선생만은 누가 제의하든 데모만은 결코 빠지지 않는 것이었다. 겉모습은 하얀 선비형인데 어디서 그처럼 강인한 힘이 솟아나는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박정희 정권과 줄곧 맞서기만 했으니 과연 광복군으로 일본군과 싸운 독립운동가의 모습이 그대로 아로새겨졌다. (주석 29)
장준하가 의정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가정의 살림살이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당에서 유진오 총재가 의원들에게 나눠주는 이른바 의례적인 ‘떡값’도 출처가 청와대라는 사실을 알고는 이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이같은 불순자금을 받지 말도록 총재에게 당부했다. 장준하의 이와 같은 청렴과 강직성이 알려지면서 ‘떡값’이나 정치자금은 항상 그를 빼놓고 분배되었다.
국회의원의 세비는 빚쟁이들이 이중삼중으로 가차압하여 압류되고, 정치자금은 스스로 거부하여 지구당 관리나 가정 살림살이는 엉망이 되었다. 당내에서도 그의 강직성과 원칙론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는 한국적 정치현실에 적응하기에 너무 청렴하고 강직하고 비정치적이었다.
‘비동시성(非同時性)의 동시성’ 그리고 ‘심사모순(心事矛盾)’의 갈등에서 장준하의 고민은 깊어갔다.
주석
26) 장준하, '향토예비군 무장의 선행조건', <신동아>, 1968년 7월호, 76쪽.
27) 장준하, 국회대정부질의, 1968년 11월 5일.
28) 박영록, '온몸으로 실천한 애국운동', <민족혼, 민주혼, 자유혼>, 305쪽.
29) 김상현, '옥중에서의 만남과 헤어짐', 앞의 책, 312쪽.
출처:오마이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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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독재자 박정희의 철천지 원수-- 국회의원 장준하(張俊河)의 활동상!
리치코바 조회수 : 330
작성일 : 2009-01-10 15:42:15
IP : 118.32.xxx.2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구름이
'09.1.10 5:27 PM (147.46.xxx.168)선생님의 영전에 우리는 늘 마음의 빚을 지고 삽니다.
지하에서도 오직 조국 대한민국이 바로서기를 눈 부릅뜨고 지켜보실
그런 어른이십니다.
나도 그 어른을 닮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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