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을 많이 쪼이지 못하면 보통 우울증이 생기기 쉽다고 합니다. 북유럽 등의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계절성 우울증세(seasonal depression)를 호소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하지요. 우리 나라에서도 늦가을로 들어서면서부터 우울증의 숫자가 더 많아진다는 군요.
그런데 때때로 이렇게 날씨가 화창하고 만물이 소생한다는 봄날에 오히려 우울한 마음이 더해지는 수도 있답니다. 저도 한 5년 전 쯤 미국에 있을 때 산후 우울증으로 참 어려운 봄을 보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네째를 낳고 나서 아이들 넷을 데리고 날마다 부대끼려고 하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더군요. 그때는 part time 으로 일했거든요.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 학교 보내고 남편 출근 시키고 막내는 아기 보는 분에게 맡기고 출근하고 오후에 퇴근 길에 아이들 모두 찾아서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종일 엄마가 그리웠던 아이들 넷이 한번에 제게 안기고...집안 일은 산더미같이 쌓여있고...때때로 정말 몸이 힘들어서 눈물이 핑 돈 때도 있었지요. 큰 맘 먹고 일하는 사람을 쓰려고 해도 미국사람은 음식이 달라서 쓰기 어렵고, 마음 맞는 한국 아줌마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였거든요. 아이가 넷이나 되는 집에 와서 일하는 게 달가운 상황도 아닐테고요.
남들은 모두 봄이라고 산으로 들로 날씨를 만끽하며 나가는데 그럴 수 있는 여유가 요만큼도 없을 때의 나는 날씨와 하등의 관계없이 한없이 우울해지더군요. 오히려 날씨가 좋을수록 우울감이 가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어쩌다 시간이 되어 회사에서라도 화창한 햇살을 받고 서 있으려면 오히려 서러운 마음까지 생기더라구요. 집에 와서 고만고만한 아이들 얼굴 바라보면 한없이 힘들어하는 내가 못된 엄마같고, 업무와 집안일에 시달리다 보면 나는 왜 이렇게 사나, 하는 마음에 기운이 빠지고...몇 달 간을 참 어렵게 지냈던 기억이 나네요.
한번 그렇게 우울한 마음에 점령을 당하면 사실 그 누구의 위로도 그다지 귀에 들어오지 않지요. 그저 나를 위로해주려는 헛된 얘기들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가까운 사람들의 위로를 외면하게 되고요. 자칫 잘못하면 늪처럼 점점 빠져들기 쉬운 게 이런 우울감인 것같습니다. 제 경우에는 제가 그쪽으로 공부를 했던 사람이었기에 이러면 안되겠다는 자가진단으로 제 발로 찾아가 상담을 받았어요. 아무 거부감 없이 시작된 상담이었기에 효과도 아주 좋았고요.
많은 경우 어떤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으로 불거지는 것처럼 보이는 우울감이 사실은 빙산의 일각이랍니다. 시댁과의 갈등이나 남편과의 갈등, 아이들과의 갈등, 직장에서의 문제...우울감의 시초는 단순해보이지만 그 뿌리를 파고 들어가 보면 대부분은 우리의 어린 시절에 미처 해결되지 못한 마음의 상처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연상시키는 듯한 어떤 고리가 형성되면 우리의 뇌가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거에요. 그 당시의 분노, 상처, 억울함 등이 한번에 터져나오는 것이지요.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러한 것이 좋은 계기가 되어 화해가 이루어지지 못한 과거와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이 되어요. 어린 시절, 힘없고 지혜 부족한 어린 마음으로는 미처 해결점을 찾지 못했던 많은 상처들이 어른이 되어서 만반의 준비가 된 시점에 다시 찾아와 새로운 해결점을 끌어내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재경험이라는 용어를 구태여 쓰지 않아도 일상적인 설명만으로도 이해가 되실 거에요.
제 경우도 그랬거든요. 우울증을 통해서 저의 어린 시절과 그 시절의 부모님과 다시 만나게 되었지요.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용서되지 않았던 부분들,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갈등의 요소들이 감정적 재회를 통해 해결점을 찾게 되었습니다. 많은 경우 부모와의 갈등이 있었던 분들이 이런 호소를 합니다. 지금에 와서 그 얘기들을 다시 끄집어내어도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이기 때문에 부모님들과 대화가 안된다...때로는 그분들은 기억도 못한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마음의 대화를 통해 그 당시의 부모님(예를 들어)들과 재회를 할 수 있다면 구태여 타임머신을 타지 않더라도 많은 것이 해결될 수 있답니다. 심리학에서는 'Empty Chair' 라는 요법을 써서 빈 의자에 부모님이 앉아계시다고 가정하고 대화하게 시도하기도 하지요. 정신과의사나 카운셀러가 함께 있지 않아도 조용한 공간을 택해서 나만의 빈의자를 마련해 보세요. 그 자리에는 누구라도 앉힐 수가 있답니다. 부모님, 시부모님, 남편, 아이들, 형제, 친구...그리고 나서는 자리를 바꾸어 내가 그 자리에 앉아 대답을 대신 해보는 거에요. 유익한 경험이 되더군요.
오늘도 날씨가 정말 좋지요. 이렇게 좋은 날 제가 그랬듯이 마음이 우울한 분들이 반드시 있을 거라는 생각에 몇자 적어보았습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마음 속에 선장을 멈춘 채 자리잡고 있던 어린아이가 이제는 그만 몸과 마찬가지로 자라고 싶다고 보내는 신호인지도 모릅니다. 이 아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시기를 그냥 보내지 마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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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우울
동경미 조회수 : 2,093
작성일 : 2005-04-05 12:17:49
IP : 221.147.xxx.160
6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샘물
'05.4.5 1:38 PM (222.99.xxx.240)너무나 오랜만에 82에 들어와 님의 글을 읽게됬습니다.
어린시절 부모님과 해결되지 않은 문제..
저도 있지요..요즘 조금 힘들기도 하지만
제게 긍정적인 부분이 많다는 어떤 분의 말씀이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화창한 날씨를 제일 좋아했었는 데
그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날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2. 하눌님
'05.4.5 2:21 PM (211.195.xxx.246)이글을 읽는 모든분들 이
원글님의 충고대로 마음의 바이러스에서 자유로워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3. 밀크티
'05.4.5 8:05 PM (211.204.xxx.188)저희 가족 한명이 잘 그렇거든요.
보니까 엉덩이가 몸에 비해 작고 살도 없고 하니까
자꾸 바지가 끼게 되더라구요. 특히 청바지.4. 보들이
'05.4.5 11:58 PM (221.155.xxx.79)동경미님 반갑습니다
<꽃밭에서> 잘 (때론 밑줄 그어가면서 ^^;;) 읽고있습니다
참,책 내신다고 들었는데.... 나왔는지요?5. 동경미
'05.4.6 12:52 AM (221.147.xxx.35)보들이님, 책 내는 일이 잘 안됐어요. 아직 부족한 게 많아서요...제 글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6. 달개비
'05.4.6 10:12 AM (221.155.xxx.98)오랫만에 동경미님 글 보게 되니 넘 반가워요.
마침 저도 약간의 우울증, 심드렁병에 걸려서
아무일도 하기 싫어하는데...글 잘 보았답니다.
댓글 달기조차 싫어서 읽고만 있는데...
오랫만에 반가워서 아는척 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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