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그림~~~
시인이요,화가요,신비주의자인 윌리엄 블레이크 (영국,1757 ~1827)의 1774년 작품.
긴 수염의 노인(실은 절대자)이 이글거리는 태양 속에서 팔을 아래로 내밀며 긴 콤파스로 세상을 재단하고있네요.
아래 칠흑 세상은 바다로 상징되는 지구.
블레이크 자작 시집 <유럽,예언서>중 <태고적 부터 계신이>에 수록된 삽화로 양각 애칭에 수채입니다.
천지창조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나요? 그는 실제로 미켈란젤로 숭배자.
하루는 블레이크가 환상 속을 거니는데 한 노인이 계단 끝에서 저런 모습으로 응시를.
이게 영감으로 발동한 거죠.
그러고 보니 블레이크는 베토벤(1770~1827)과 동시대를 살았네요,죽은 해는 1827년으로 같고.
르네상스 이래 공인된 전통규범을 의식적으로 거부한 최초 화가 .
그는 시인으로서 시적인 환상을 그림으로 표현했으니 낭만주의 화풍의 선구자네요.
저런 화풍은 동시대 고야로 대표되는데 실은 고야보다 10살 연하인 블레이크에 의해 먼저 시도되었고.
고야야 말년에서야 저런류의 그림이 탄생했으니.
그런데 그런데......
나도 블레이크가 되었다는.
난 하늘이 아닌 구릉지 위에서 영그는 대지를 향해.
멀리 임진강이 보이네요. 우측 산 너머는 북한 장단군.
아래 철도는 서울~문산~개성~원산 간 경원선 임진각 구간.
그럴듯한가요??
이하는 임진각에서~~
희뿌연 연무가 남북 상황을 그럴듯하게 대변하네요.
한국전 포로석방 때 판문점을 출발한 포로 3만여명이 저 다리 위를 걸어 남하했죠.
당시는 전쟁으로 임진강 철교가 끊겼기에 임시로 가설한 목조가교.
나무 교각 위 상판.
저길을 걸어서 왔겠죠.
한때 장단역(판문점 인근)에 있었던 그 화차.
한달전,,,,,저 화통을 삶아먹은듯한 우렁찬 합창이 이곳 임진각에서 울려퍼졌죠.
평화누리 야외무대서.
바렌보임(69)이 지휘하는 이스트 웨스턴 디반 오케스트라와 조수미 등이 함께한 평화 콘서트.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아르헨티나-이스라엘)이야 아시겠지만, 이스트 웨스턴 디반은 좀 생소하죠.
바렌보임은 클래식계 대표적인 평화주의자~~~.
야심도 컸죠. 한때 베를린 필 상임 지휘자로 가려고 모든 걸 걸었으나 결국 잉글랜드 촌드기 사이먼 래틀에 빼았겼으니.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지만 부모가 유태인이라 이스라엘로 이주했습니다.
아내는 전설적인 첼리스트로 요절한 쟈클린 뒤프레.
텔라비브에서 웨딩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수상등이 참석하는 등 대단했죠.
당시 언론의 재밋는 반응 하나.
/이스라엘 선인장과 영국의 장미의 결합!/
결국 선인장에 찔려 장미는 조기 시들었습니다.
그런 바렌보임이 껄끄럽게도 팔레스타인을 포용하는 평화주의자로 진화했네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중동의 젊은이를 모아 1999년 팔레스타인 석학 에드워드 샤이와 함께 오케스트라를 창단했으니.
본부는 스페인 세비아.
그는 팔레스타인 분쟁지역에 악단을 끌고 들어가 이스라엘 탱크,군인들에 둘려싸인채로 평화콘서트를 열기도했네요.
당시 이스라엘서 입국을 거부하자 시리아(?) 국경을 통해서.한마디로 모국을 물먹였다는.
공을 인정받아 유엔 평화대사가 되었죠.이번 임진각 공연도 연장선상.
유태계가 쥐고있는 언론들이 가만있을리가.
병상의 아내도 돌보지 않은 냉혈한으로 그를 몰아갔죠.
우리가 알고있는 바렌보임에 대한 일부 부정적인 시각은 바로 이 때문,,,,조중동 아시죠??
바렌보임 하니 바이올리리스트 아이작 스턴(1920~2001)이 떠오릅니다.
영화 '샤인'서 카메오로 출연, 현역 음악가들을 이끌고 무대에 서는 장면 기억하시나요?
둘은 반대적인 정치적 견해를 지녔죠.
아이작 스턴은 미국내 유대인 음악가의 마피아 대부로 수구적인.
지금의 이작 펄만과 핀커스 주커만도 그가 있었기에.
그래서일까요,이작 펄만과 아이작 스턴의 연주 스타일은 비슷하죠.열정이 사라진 좀 밋밋한.
미 음악계에서 유대계 파워는 정경화 개인음악사를 보면 알수있어요.
1967년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19세의 동갑내기 남녀가 공동 우승을 차지합니다,,, 핀커스 주커만과 정경화.
둘은 줄리아드에서 전설적인 이반 갈라미언 문하에서 전액 장학생으로 수학하던 사이.
당시만해도 세계적인 여류 바이올리니스트는 찾아보기 힘들 때.
콩쿠르 결선은 연장 심사까지 가는 접전이였는데 심사위원 다수는 정경화의 우승을 주장했죠.
그러나 문제는 심사위원장이 아이작 스턴이였다는.
결국 정경화는 아이작 스턴이 발굴,후원해온 주커만과 공동 우승!
텔아비브에서 태어난 주커만은 '유대인 예술인협회'의 지원을 받아 줄리아드에 입학했는데 자, 그 주변을 한번 보실까요.
줄리아드 3년 선배인 이차크 펄만,갈라미언 교수, 아이작 스턴, 파블로 카잘스, 레너드 번스타인, 게오르그 솔티,
주빈 메타 등 유대인 거장들로 둘러쌓였가는.
아시아의 작은 나라 정경화는 13세에 줄리아드에 입학했으나 식당 운영 통한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리지로만.
한 세대가 훨 지났음데도 어쩜 그리 피겨 김연아와 처지가 비슷한지.
참고로,
개성 강한 정경화의 바이올린이 예리한 직관과 불같은 열정이면,
온화한 성품의 주커만은 명쾌하고 우아한 음색이 특징.
정경화는 앙드레 프레빈의 지휘 런던심포니와 협연한 차이콥스키,시벨리우스 협주곡을 비롯해
브루흐,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이 레전드 음반.
주커만은 바렌보임의 지휘 런던심포니와의 베토벤,엘가의 바이올린 협주곡,
다니엘 바렌보임(피아노)·재클린 뒤프레(첼로)와 협연한 베토벤 피아노3중주가 전설의 명반.
사족이 길어졌네요,여하튼 그런 바렌보임입니다.
그가 광복절을 전후해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로 27년만에 한국에.
마지막 공연은 이곳 임진각에서. 연주곡은 교향곡 9번 '합창'
베토벤의 평화 메시지가 남북녁으로 동시에 울려퍼지라며.
3만 5천원짜리 도시락 들고 피크닉 오셨네요들.
원래 17~19세기 유럽 음악회는 저런 모습이였죠.
당시 음악홀 입구에는 '개 출입금지!' 라는 현수막도 걸려있었다죠.얼마나 자유분망했으면.
술마시고 연애도하고 밥도먹고.
지금의 제례 치른듯한 엄숙한 객석 문화는 1900년대 초 중반부터 정착되었습니다.
악장 간 박수도 금한 인물이 무대의 독재자로 통하던 아르투르 토스카니니였죠.
근경으로 원,투,쓰리!
빨간 드레스는 조수미.
교향곡 9번의 정식 명칭은 길어요.
<실러의 송가(頌歌) '환희에 붙임'에 의한 종결합창을 수반한 관현악,독창 4부와 합창을 위한 교향곡 제9번>,,,이리.
주제는 인류에 대한 사랑.
보통 우리는 음악가 베토벤으로만 인식하고있지만 실은 이념적이고 사색적인 사람이죠.
로멩 롤랑이 전하는 그 단적인 예 하나.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할 때 베토벤 당시 나이 20세로 본 대학에서 독일 문학사를 청강하고 있었죠.
베르사이유 궁전이 무너지고,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서 날라갔고,
바스티유 점령 소식에 문학사 슈나이더 교수는 강의 중 즉흥시로 청춘들을 열광시켰는데,
/광신을 몰아내고,인류의 권리 위해 싸우는 것은 왕의 신하가 할수 없는 일....전제의 쇠사슬은 끊어졌도다!/
슈나이더는 혁명 시집을 발간했는데 예약자 중엔 베토벤 이름도 있었습니다.
나아가 나폴레옹에서 희망을 보며 '영웅' 교향곡을 썼죠.
/많은 선행을 행하라.자유를 사랑하라.왕 앞이라도 진리를 배신하지 말라!/
베토벤은 1792년 기념첩에서 조카들에 이리 당부했다는.
괴테,실러& 베토벤에 관련된 얘기는 참 많쵸.
거의 한세대 아래인 베토벤(1770~1827)은 괴테(1749-1832),쉴러(1750-1805)를 무척 존경했습니다.
특히 쉴러에 대한 존경심은 평생토록 변치 않았고.
베토벤은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정확히 60개의 원두를 이용한 그 만의 커피를 마시고->
같은 시간에 식사를->그리고 밤 9시엔 괴테나 쉴러를 읽으며 잠자리에 들었다죠.
(이런 규칙적인 생활은 브람스에서도)
괴테와 쉴러 또한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평생 문학적인 동반자였죠.
파우스트 2부를 미그적 거리며 집필을 늦추고 있을 때 동기를 부여한 이도 실러였고.
괴테의 '에그먼트'와 쉴러의 '빌렐름 텔'은 서로 영향을 주며 탄생한 대표적인 작품.
베토벤은 그 에그먼트를 음악화 했으니,
해방후 최초 방한 교향악단의 광화문 광장 공연의 첫곡 연주이기도 한 '에그먼트 서곡'입니다.
합창 교향곡도 쉴러를 관통했죠.
쉴러가 사랑과 평화와 기쁨을 주제로 하여 '환희의 송가'를 쓴 것은 1785년.
1793년 베토벤 24세 때, 그의 친구요 법률교수인 루트비히 피세니히가 쉴러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가 있어요.
/ 이곳 본(베토벤 고향)에는 장래가 유망한 청년작곡가가 있습니다. 저의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이 청년은 위대한 것이나 숭고한 것에 아주 심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쉴러의 <환희의 송가>에 곡을 붙이려 하고 있습니다./
결국 합창 교향곡은 완성 1824년까지 무려 30년이 넘게 걸린 대작이 되었습니다.
흔이들 전원교향곡을 낭만주의의 시조를 보죠. 더불어 누군 합창교향곡을 말하기도.
이유는 바로 베토벤이 합창교향곡을 30년에 걸처 완성했기에 전원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기에.
합창교향곡은 베토벤 죽기 3년전 53세 작품.
교향곡에 인간의 목소리가 들어갔다는 획기적인 시도 외에도 특이하게도 2,3악장 성격이 뒤바뀌였다는.
2악장은 빠른 스케르초, 3악장은 느리고 서정적인 아다지오로.
지금 흐르는 음악이 3악장 아다지오입니다.
이 가을에 듣고싶은 음악 많으시죠??
너무 많으실터이니 클래식으로 한정해서 < 한번 더 베토벤 곡으로 < 또다시 9곡의 교향곡 중에서.
다시 < 교향곡이 4악장 구성이기에 분해해 37개 악장중에서.(전원은 5악장이기에 36+1=37)
전 합창 교향곡 3악장 아다지오를 듣겠습니다.
집안에서 큰 형이 너무 잘나버리면 나머지는 묻치고 말죠.
합창교향곡 3악장이 딱 그런 형국으로 4악장 피날레에 완전 짓눌린.
'환희의 송가'가 들어있는 4악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도 4악장의 기반인 3악장을 아는 사람은 많치않은.
협주곡이나 실내악에서 무게 중심은 2악장(아다지오)이여요.
합창 교향곡은 2.3악장의 성격이 뒤바뀌였으니 3악장이 중심축이 되는 거고.
3악장 아다지오가 폭발하는 4악장을 위한 뜀튿이라는.
베토벤에겐 특히 더 아다지오가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아다지오라~~~.
베토벤엔 멋진 아다지오가 많아요.
현악3중주 칸타빌라,
현악4중주 12번,
피아노 협주곡 2번,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
그리고 합창교향곡 등.
이중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 2악장과 합창교향곡 3악장을 으뜸으로 여기죠들.
그러나 황제는 중기작이고 합창은 말년작이니 합창이 깊이감이 더할게고.
음악적 흐름도 상반되는데 황제에선 내적으로 심화 과정,합창에서는 밖으로의 무한펼침.
합창교향곡 아다지오는 4악장 피날레의 '대환희'를 향한 뜀틀같은.
동경하는듯,
애잔하나 상하지는 않는 哀而不傷의,
꿈 꾸는 듯한 아름다운 선율이 중층의 파도로 밀려오죠.
라흐마니노프도 느껴지고.
말미엔 맥박이 뛰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아래 정지된 음원은 1951년 종전 직후 7년만에 열린 푸르트벵글러 지휘 베를린 필의 바이로이트 실황입니다.
역대 9번 최고 녹음.
베토벤 교향곡 9번 3악장( Adagio molto e cantabile)
Karl Bohm,
conductor
Wiener Philharmoniker Orchestra
베를린 필 1951 바이로이트 실황,
지휘 푸르트 뱅글러
8.15 임진각 공연 직전 4일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 장면.
실망스런 점도 있었죠.
합창 공연 때는 실내 온도가 높다며 1악장 이후 전악단을 퇴장시킨 후 다시 시작했다는. 한국 클래식 공연사에 전무후무.
연주자들의 개인 기량이 떨어져 파트간 불협화음도 있었고.
연주 역량에 비해 티켓 가격이 고가였음에도 거의 매진이였으니(순전히 바렌보임 명성으로)
한국은 여전히 외국 유명 뮤지션 앞에선 봉! 나아가 바렌보임의 순간순간 돌출행동 등등.
그럼에도 일주일 강행군 속 전곡을 힘있게 소화해낸 것은 순전히 바렌보임의 힘 때문이겠죠.
그리고 애초 정치 사회적 고려가 깔린 연주회였다는 점도 고려 할 필요가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