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내내 시간을 내서 오뒷세이아를 읽다가 마음이 동해서 여자 그림 위조자를 읽다가 번갈아
책을 읽는 묘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난 번 붓을 든 소녀를 읽고 나니 르네상스 시대 그녀보다 먼저 그림으로
일가를 이룬 소포니스바 앙구이솔라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이 생각나서요. 오뒷세이아는 혼자 읽는 작품이 아니다보니
말하자면 숙제같은 것이 되어버렸고 소설은 혼자 읽는 맛있는 곶감이 된 상황, 역시 사람은 밖에서 오는 규제보다는
스스로 즐기는 것에 더 매혹을 느끼는 것일까요?
기원전 1000년 이전과 펠리페 2세시대의 스페인, 그 이야기를 전하는 현대의 주인공 이렇게 여러 시대를 오가면서
한참을 보내고 나니 벌써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이제 그만 책 속의 주술에서 풀려나와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고 있네요. 그래서 막간을 이용해서 티치아노의 그림에서 만났던 비너스의 탄생에 이어서 보티첼리의
그림을 찾아서 보고 있는 중이지요.
실제로 이 그림앞에서 놀라던 순간이 기억나는군요. 크기도 그렇지만 현대적인 감각의 문양이 지금의 여성들이
옷을 해입어도 손색이 없겠다 싶어서 복식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이 그림앞에서 어떤 눈길로 그림을 볼까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었거든요.
비너스와 마르스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서 마르스는 잠이 들어 있군요. 투구를 뒤집어쓴 모습의 존재는
무엇일꼬 한참 보게 되는 것이 아이라고 하기엔 배가 불룩한 느낌이고 옆에 있는 표정이 묘한 존재의 머리를 보면
사람이라고 하기엔 부적절해 보여서요. 마르스 옆의 비너스는 행복해보이지 않아서 이 상황이 묘하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네요. 일리아스를 읽을 때 헤파이스토스의 아내는 아프로디테가 아니더군요. 그러나 오뒷세이아를
읽을 때는 절름발이 헤파이스토스의 아내가 아프로디테로 나오고 가인은 그가 두 신을 잡을 방도를 고민해서
만들어내는 침대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 놓습니다 그런 상황을 듣던 신 중 헤르메스는 자신에게 기회만 온다면
그런 사슬도 불사하겠다는 대사를 하는 장면도 등장하고요.
토요일 역사반 아이들과 함께 읽은 오뒷세이아, 그 때 아이들은 강대진 선생의 아이들을 위한 입문서 성격을
책을 읽었지만 그 기회에 제대로 읽고 싶어서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으로 구해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다시 읽는
책은 일리아스를 한 번 통과하고 나서 다시 만나서 그럴까요? 같은 책인데도 상당이 다른 느낌이고 뭔가 책이
제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느낌이라서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그런 묘한 시간을 보내고 있네요.
오뒷세이를 강력하게 돌보는 여신은 아테네입니다. 우리는 주로 아테나로 알고 있지만 희랍어로는 아테네인지
번역서에는 다 아테네로 나와있더군요. 익숙한 표기를 고쳐가면서 읽고 있는 중인데요, 아테네는 그림속에서
그다지 발견하기 쉽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보티첼리 그림속의 아테네는 뭔가 우수에 젖은 느낌, 이 화가의 특색일까요?
보티첼리를 검색하다 보니 그가 단테의 신곡을 위해서 그린 그림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몇 장은 만날 수 있어서 그렇다면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출간되는 책에는 단테 신곡에 보티첼리
그림이 들어간 책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엉뚱한 호기심으로 번지고 있네요. 몇 개월 후에 금요일 모임에서 신곡을
읽게 되면 최소한 이탈리아어로 소리내서 몇 구절이라도 낭송해보고 싶다는 은밀한 소망이 있어서 외국어 코너를
돌아다닐 때면 왕초보 이탈리아어 앞에서 발걸음이 멈추기도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그런 여유가 없어 하고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는 중이랍니다 . 무엇인가를 하는 용기도 중요하지만 무엇인가를 그만두는 용기, 시작하지
않는 자제력도 필요한 법이니까요.
이 그림과 무관한 이야기이지만 여자 그림 위조자를 보니 펠리페 2세의 3번째 결혼식에 등장하는 여성이
바로 카트린 드 메디치의 딸 이사벨이더군요. 열네 살 나이에 아버지 나이인 펠리페 2세에게 시집온 그녀가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아직은 그녀가 톨레도에 도착하는 것까지 읽었지만 이탈리아 출신의 여성 화가가
그녀의 그림 선생으로 스페인으로 초대되어 두 여성이 만나는 장면이 갑자기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으로
확대되는 이야기의 흐름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만들어 흥미진진하지만 이야기속에서 계속 살 수 없는 관계로
아쉬운 마음으로 일어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