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여 하산길 마지막 봉우리 의상봉입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여기서 의상이 기거했다는 전설이~~
의상봉에서 바라본 성내 풍경~~~
건너 왼쪽이 원효봉입니다.
세상은 비교되었을 때 선명한 법이죠.
의상봉,원효봉도 그러하네요,,둘은 맞은편이지만 아주 가까워 보입니다.
저 원효봉 지나 염초봉 지나 백운대 까지 산성은 이어집니다.
참고로, 백운대 정상서 본 산성 내(內)~~(작년 사진)
왼쪽으로 멀리 보이는게(저 멀리 말고!) 의상능선으로 우측 끝 봉우리가 의상봉입니다.
오른쪽은 원효능선.(원효봉은 우 아래 봉우리)
원효봉과 염초봉(사진서 잘린 봉우리) 'v'자 홈 사이에 북문(北門)이 있습니다.
대서문은 아래 계곡 끝에.
보세요!
험준한게 유사시 산성내에서 아군 간 소통도 힘들지 않겠어요.
물도 부족하고,그래서 작은 저수지를 26개나 만들었어요.
당시 북한산성 축성 시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찬성자는 도성서 가깝다, 험준해서 좋다,도성과 호응하면 방어에 이롭다 등등 이점을 들었죠.
반대론자들은~~
1)험준함이 오히려 아군간 통신을 어렵게한다.
2)물이 부족하다.
3)병자호란 후 청과 협약한 조선내 축성금지에 위반한다.
4)풍수상 진산인 북한산 동남쪽 용맥이 끊어진다,,등등
어떠시나요???
지형적 여건에서는 남한산성과 딱 정반대네요.
참고로 성안쪽은 고양시 북한동,원효능선 우측은 고양시 효자동입니다.
(서울 효자동 사는 자가 이곳에 와 이름난 효자가 되어서,,현재 효자비가 있음),
의상능선 너머는 은평구 진관외동,,,산성주능선 서울쪽은 강북구,성북구,종로구,,,이러합니다.
낙수물도 돌을 뚫는법~~~
의상봉에서의 성벽 흔적~~
뭐지? 했는데,의상봉의 명물인 토끼바위라네요.
날은 저물고,,갈길은 멀고,,배는 고프고,,,아이젠 끈은 끊어저 덜렁덜렁,미끄러지고,,,,
있는 노잣돈이야 그림에 떡!
원래는 가벼운 산행이였기에 물,커피,음식은 일찍 바닥.
아,뭔가 많이 그립다는,,,, 짬/뽕
초하루,,,쩐 관련 인생사 덕목 하나 깨우쳤네요.
지금 내 수중의 쩐은 쩐이 아니듯, 무덤 지척의 돈도 돈아니라는.....
하산하니 북한산 둘레길 내시묘역 구간이더라는~~
북한산성의 정문 대서문(大西門)~~~~~
대서문이 정문인 건 당연 북쪽에 침략자가 있고 150m의 낮은 구릉지라 일반인 산성 출입이 쉬워서겠죠.
옛사람들은 백운대에 오를 때 주로 이 코스를 이용했습니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우이동~도선사~인수산장 코스는 일제 때 철책 난간을 설치하면서 부터.
아마 그때 북한산 내 이름난 봉우리에 철심을 처박았겠죠.
물론,의상봉 인근서 방향을 잘못 잡았으니 오늘은 저 대서문은 못보았네요.
(사진은 지난해 정월초이틀에 찍은 거)
저 홍예는 산성마을(북한동)주민들의 주 출입문입니다.
북한산성 안쪽 전지역은 고양시 북한동입니다.
권력은 자신의 족적을 남기려는 습성이 있죠.
이승만도 참 많은 현판을 남겼어요,,,
대서문 편액도 그 작품.
이승만이 왜 북한산성에??
북한산 산신령이나 혹은 문수보살 점지로 태어났거든요,,,
어머니가 문수봉 아래 문수사에서 백일기도를.
그도 한말 독립협회 활동으로 수배되었을 때는 원효봉 아래 상운사에 기거했어요.
백범이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공주 마곡사에 숨어들었듯이.
이승만 하니 생각나네요.
그도 한때는 열혈 청년이였습니다.
구한말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집회시에는 인기 연사였죠,,,소장 강경파의 대표주자.
결국 체제 부정에 이른다는 판단하에 당시 권력들은 독립협회를 불법화했는데 이승만도 이즈음 체포되었죠.
그러나 재판 중 최정식과 더불어 탈옥했다는,,,
다시 체포 후 최씨는 사형,이씨는 무기징역형을.
그에게 사형형을 면해준 인물이 바로 당시 재판관 홍종우입니다.
홍종우 아시죠?우리나라 최초 프랑스 유학에 갑신년 쿠테타 주역 김옥균을 상해서 권총으로 쏜 인물이요.
결국 이씨는 사면되 미국으로 갑니다.
이즈음 상운사에 기거하지 않았나 하는 나만의 추측입니다,,,탈옥 후 숨어들었다든가.
그러면 오늘 난 성문은 몇개나 보았을까?
위문을 시작해 용암문,보국문,대동문,대성문,대남문,청수동암문,부암동암문,가사당암문,대서문(본것으로 치고)총10개.
산성에는 총 14개의 문이 있으니 아직 4곳이 남았네요.
대서문에서 백운대를 보자면 왼쪽으로 이어지는 원효,염초능선 상에 2개가 있습니다.
원효봉 가는 길에 공식 이름인 서암문,속칭 시구문(屍口門)과 원효봉과 염초봉 사이에 북문이.
북문은 누각은 사라지고 홍예를 지닌 석축만 남아있고.
산성 내 사람이 죽으면 대문으로야 나갈수없으니 이곳 시구문으로.
나머지 둘은 북한산계곡에 있던 수문(水門)과
성내에 있는 중성문(中城門)이네요.
대서문 옆에 백운대서 발원한 계곡 위로 수문(水門)이 있었는제 1915년,
그리고 한강인도교도 날려버린 1925년 을축년 홍수 때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산성내에 있는 중성문(中城門)입니다~~
(사진,오마이 뉴스)
기존 바위를 이용해 석축한게 멋지네요.
산성이 축성되고 다음해(숙종 38년 1712년) 숙종은 북한산성 원행에 나섰어요.
대서문이 있는 서북 방향이 평지라 취약하니 성 안에 방어성을 쌓으라! 명하니 바로 중성문.
.............................,,,
산성마을 사람들이 이주한,구파발~양주 국도변의 신촌(新村)은 설날에도 네온사인으로 현란합니다.
남아있는 주민들도 곧 이주를 마칠거라네요.
산성마을은 백제 개루왕 이래 수천년,아니 적어도 숙종 이후 300년은 된 마을입니다.
숙종 공사 시 군사,인부들이 이곳 산성마을서 기거했고~~
축성 후엔 삼군영 군인,승병 포함 기천명이 거주했으니 당연 마을이 설수밖에요.
일제 때는 이곳 군영이 의병 본거지가 될 것을 두려워해 헌병을 상주시켰고.
당연 이들에 의해 행궁 등 산성내 시설들도 파괴되었고,,,대서문 문루도.
7시,,,등산객에 꽤 인기있는 중국집으로 향합니다.
정초라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듬성듬성 연 곳도 보이네요.
아무데나 쳐들어가고 싶지만 참습니다.
어,그런데 없네요. -_-
도봉산 송추계곡 하산 길에 본것을 착각했다는.
구파발 경유 서울역행 버스를 탑니다.
환승 위해 연신내서 내렸는데,,,문 연
중국집이 없어요.
멀리 회전초밥이,,,저거다!!,,,장국 때문.
이방인 등산객 홀로 들어서니 눈길들이요,,,한결같이
청춘 조합으로 다섯쌍.
애기 손만한 장국이 놓입니다,,,
요거 말고 사발로욧!
짬봉만한 걸로 들이미네요 ^&^
2만4천원 지불하고,,,전철타고,,,,,,,,배가 따시니 수마가,,,,zzzzzz.
ps)이리 뜻하지 않은,그러나 나름 재밋는 북한산성 3/4 종주였습니다.
정리하면서 연휴라 관련 공부도 좀 했고.
나머지 1/4은 커밍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