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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하루 북한산성에서(하)

| 조회수 : 1,938 | 추천수 : 26
작성일 : 2011-02-09 11:40:23
<상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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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여 하산길 마지막 봉우리 의상봉입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여기서 의상이 기거했다는 전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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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봉에서 바라본 성내 풍경~~~

건너 왼쪽이 원효봉입니다.

세상은 비교되었을 때 선명한 법이죠.

의상봉,원효봉도 그러하네요,,둘은 맞은편이지만 아주 가까워 보입니다.

저 원효봉 지나 염초봉 지나 백운대 까지 산성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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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백운대 정상서 본 산성 내(內)~~(작년 사진)

왼쪽으로 멀리 보이는게(저 멀리 말고!) 의상능선으로 우측 끝 봉우리가 의상봉입니다.

오른쪽은 원효능선.(원효봉은 우 아래 봉우리)

원효봉과 염초봉(사진서 잘린 봉우리) 'v'자 홈 사이에 북문(北門)이 있습니다.

대서문은 아래 계곡 끝에.


보세요!

험준한게 유사시 산성내에서 아군 간 소통도 힘들지 않겠어요.

물도 부족하고,그래서 작은 저수지를 26개나 만들었어요.

당시 북한산성 축성 시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찬성자는 도성서 가깝다, 험준해서 좋다,도성과 호응하면 방어에 이롭다 등등 이점을 들었죠.

반대론자들은~~

1)험준함이 오히려 아군간 통신을  어렵게한다.

2)물이 부족하다.

3)병자호란 후 청과 협약한 조선내 축성금지에 위반한다.

4)풍수상 진산인 북한산 동남쪽 용맥이 끊어진다,,등등

어떠시나요???

지형적 여건에서는 남한산성과 딱 정반대네요.

참고로 성안쪽은 고양시 북한동,원효능선 우측은 고양시 효자동입니다.
(서울 효자동 사는 자가 이곳에 와 이름난 효자가 되어서,,현재 효자비가 있음),

의상능선 너머는 은평구 진관외동,,,산성주능선 서울쪽은 강북구,성북구,종로구,,,이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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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수물도 돌을 뚫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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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봉에서의 성벽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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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했는데,의상봉의 명물인 토끼바위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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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저물고,,갈길은 멀고,,배는 고프고,,,아이젠 끈은 끊어저 덜렁덜렁,미끄러지고,,,,

있는 노잣돈이야 그림에 떡!

원래는 가벼운 산행이였기에 물,커피,음식은 일찍 바닥.

아,뭔가 많이 그립다는,,,, 짬/뽕

초하루,,,쩐 관련 인생사 덕목 하나 깨우쳤네요.

지금 내 수중의 쩐은 쩐이 아니듯, 무덤 지척의 돈도 돈아니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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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하니 북한산 둘레길 내시묘역 구간이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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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의 정문 대서문(大西門)~~~~~

대서문이 정문인 건 당연 북쪽에 침략자가 있고 150m의 낮은 구릉지라 일반인 산성 출입이 쉬워서겠죠.

옛사람들은 백운대에 오를 때 주로 이 코스를 이용했습니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우이동~도선사~인수산장 코스는 일제 때 철책 난간을 설치하면서 부터.

아마 그때 북한산 내 이름난 봉우리에 철심을 처박았겠죠.

물론,의상봉 인근서 방향을 잘못 잡았으니 오늘은 저 대서문은 못보았네요. (사진은 지난해 정월초이틀에 찍은 거)

저 홍예는 산성마을(북한동)주민들의 주 출입문입니다.

북한산성 안쪽 전지역은 고양시 북한동입니다.


권력은 자신의 족적을 남기려는 습성이 있죠.

이승만도 참 많은 현판을 남겼어요,,, 대서문 편액도 그 작품.

이승만이 왜 북한산성에??

북한산 산신령이나 혹은 문수보살 점지로 태어났거든요,,, 어머니가  문수봉 아래 문수사에서 백일기도를.

그도 한말 독립협회 활동으로 수배되었을 때는 원효봉 아래 상운사에 기거했어요.

백범이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공주 마곡사에 숨어들었듯이.


이승만 하니 생각나네요.

그도 한때는 열혈 청년이였습니다.

구한말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집회시에는 인기 연사였죠,,,소장 강경파의 대표주자.

결국 체제 부정에 이른다는 판단하에 당시 권력들은 독립협회를 불법화했는데 이승만도 이즈음 체포되었죠.

그러나 재판 중 최정식과 더불어 탈옥했다는,,, 다시 체포 후 최씨는 사형,이씨는 무기징역형을.

그에게 사형형을 면해준 인물이 바로 당시 재판관 홍종우입니다.

홍종우 아시죠?우리나라 최초 프랑스 유학에 갑신년 쿠테타 주역 김옥균을 상해서 권총으로 쏜 인물이요.

결국 이씨는 사면되 미국으로 갑니다.

이즈음 상운사에 기거하지 않았나 하는 나만의 추측입니다,,,탈옥 후 숨어들었다든가.


그러면 오늘 난 성문은 몇개나 보았을까?

위문을 시작해 용암문,보국문,대동문,대성문,대남문,청수동암문,부암동암문,가사당암문,대서문(본것으로 치고)총10개.

산성에는 총 14개의 문이 있으니 아직 4곳이 남았네요.

대서문에서 백운대를 보자면 왼쪽으로 이어지는 원효,염초능선 상에  2개가 있습니다.

원효봉 가는 길에 공식 이름인 서암문,속칭 시구문(屍口門)과 원효봉과 염초봉 사이에 북문이.

북문은 누각은 사라지고 홍예를 지닌 석축만 남아있고.

산성 내 사람이 죽으면 대문으로야 나갈수없으니 이곳 시구문으로.

나머지 둘은 북한산계곡에 있던 수문(水門)과 성내에 있는 중성문(中城門)이네요.

대서문 옆에 백운대서 발원한 계곡 위로 수문(水門)이 있었는제 1915년,

그리고 한강인도교도 날려버린 1925년 을축년 홍수 때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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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하나는 산성내에 있는 중성문(中城門)입니다~~ (사진,오마이 뉴스)

기존 바위를 이용해 석축한게 멋지네요.

산성이 축성되고 다음해(숙종 38년 1712년) 숙종은 북한산성 원행에 나섰어요.

대서문이 있는 서북 방향이 평지라 취약하니 성 안에 방어성을 쌓으라! 명하니 바로 중성문.
.............................,,,

산성마을 사람들이 이주한,구파발~양주 국도변의 신촌(新村)은 설날에도 네온사인으로 현란합니다.

남아있는 주민들도 곧 이주를 마칠거라네요.

산성마을은 백제 개루왕 이래 수천년,아니 적어도 숙종 이후 300년은 된 마을입니다.

숙종 공사 시 군사,인부들이 이곳 산성마을서 기거했고~~

축성 후엔 삼군영 군인,승병 포함 기천명이 거주했으니 당연 마을이 설수밖에요.

일제 때는 이곳 군영이 의병 본거지가 될 것을 두려워해 헌병을 상주시켰고.

당연 이들에 의해 행궁 등 산성내 시설들도 파괴되었고,,,대서문 문루도.


7시,,,등산객에 꽤 인기있는  중국집으로 향합니다.

정초라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듬성듬성  연 곳도 보이네요.

아무데나  쳐들어가고 싶지만  참습니다.

어,그런데 없네요. -_- 도봉산 송추계곡 하산 길에 본것을 착각했다는.

구파발 경유 서울역행  버스를 탑니다.

환승 위해 연신내서 내렸는데,,,문 연 중국집이 없어요.

멀리 회전초밥이,,,저거다!!,,,장국 때문.

이방인 등산객 홀로 들어서니 눈길들이요,,,한결같이  청춘 조합으로 다섯쌍.

애기 손만한 장국이 놓입니다,,, 요거 말고 사발로욧!

짬봉만한 걸로 들이미네요 ^&^

2만4천원 지불하고,,,전철타고,,,,,,,,배가 따시니 수마가,,,,zzzzzz.

ps)이리 뜻하지 않은,그러나 나름  재밋는 북한산성 3/4 종주였습니다.
     정리하면서 연휴라 관련 공부도 좀 했고.
     나머지 1/4은 커밍 순!!!!

 




1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변인주
    '11.2.9 12:08 PM

    상하를 다 보았으니 추천부터 누릅니다. 꽝!

    재미나 역사 얘기를 들으며 술술 인수봉을 오르고
    백운대를 거쳐 내려왔어요.

    부끄럽게도 서울에 살때는
    인수봉이고 백운대고 가본 적이 없는데
    이제야 자세히 사진아 뚫어져라 봅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지 .....

    한국의 산들 나무들....
    나의 피를 만들고 뼈를 만든 그곳의 자연이 늘 많이 그립습니다~

    늘 박학하신 역사 얘기와 풀어주시니
    정말 실감이 납니다....

    아이구 다리야~
    저도 장국 한그릇!

  • 2. 보리
    '11.2.9 5:29 PM

    두 번이나 글을 달았는데 계속 사용권한이 없다하네요.
    저 정말 억울해요ㅠㅠ

  • 3. 보리
    '11.2.9 5:31 PM

    이제 되네요.
    또 지워질까봐 겁나서 못달겠어요.
    wrtour님이 읽으시면 정말 좋아하실 내용이었는데 아쉽다...ㅎ

  • 4. wrtour
    '11.2.9 11:08 PM

    변인주님~~~~~~~~~~~
    정말 백운대 따라 오르신거죠,백운대서 인수봉도 보시구요??
    그러시다니 저도 기쁩니다!!
    자요,장국 두사발입니다~~~~ㅎㅎ^^
    보리님~~~
    글이 두번이나 지워지다니 얼마나 허망하실까...ㅎㅎ
    다 읽은 것으로 하겠습니다.그거요,너무 오래 글을 쓰다보면 자동으로 풀리더군요(로그 아웃)
    그래서 저도 긴글 쓸때는 등록전에 드래그 복사해놓아요.
    새해도 건강하시구요~~^^

  • 5. 안나돌리
    '11.2.10 12:49 AM

    문수사에 몇년전에 불이 났었어요~
    지금 문수사는 다시 재건이 된 것이고요^^
    불이 나기전 허름한 절을 너무 좋아했는 데....
    다시 건축된 사찰은 제가 좋아하기엔 너무 화려하더군요^^ㅋ

    불나기전 허름한 대웅전(?) 바깥문위로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여사와 스님들 찍으신 사진이 걸려 있었는 데
    지금은 보이질 않더군요^^ 글구 그 산행나들이 할때 문수사까지의
    길이 많이 닦이었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제게 콜~~하셨다면 따끈한 국밥 한그릇 말아 드렸을텐데...ㅎㅎㅎ
    덕분에 오늘 죙일 북한산 나들이 자알 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6. coco
    '11.2.10 2:05 AM

    하편도 감사히 보았습니다. 홍종우가 이승만을 구해줬군요. 프랑스에 최초의 기록을 남긴 조선사람은 유길준이라 해요. 미국 유학을 마치고 유럽을 거쳐 귀국했다고 합니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의 20편에 보면 파리와 뉴욕을 비교하는 이야기가 잠깐 나오는 것 같고요. 홍종우는 유학생이라기 보다는 한국 최초로 파리에서 살았던 사람으로 기록되나 봅니다. 1890년에서 1893년 까지 2년 6개월 정도 파리에 살았나봐요. 세계 만국 박람회에서 조선관 전시 책임자로 파견되었던건지
    모르겠습니다. 추측만 해보지만요. 그는 한복을 입고 다녀서 당시 프랑스 인류학자들과 지리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고 하고요, 1892년 프랑스 동양학자와 춘향전을 번역하기도 했다고 하고요, 파리에 대한 인상을 묻자, 파리 사람들은 에고이스트다 뭐 그런 코멘트도 남겼다고 해요.ㅎ 홍종우가 김옥균을 암살하고 이승만을 살려주고 빠리에서 춘향전을 번역하고 이 인물에 대한 어떤 연구가 있는지 궁금케하기도 하는 거지요. 구보의 경성을 걷다란 책을 보면 갑신정변에 관련돼서 몰살된 대감들의 집터를 지나가면서 그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하데요. 구보의 시점에서 갑신정변은 한 삼 사십년 전 일이니까 얼마나 생생한 일이었겠습니까. 후쿠자와 유키치에 넘어가버렸던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어려서는 아주 답답해 했는데 그들의 시점에서 그렇게 무시할 수 있었겠나 하는 생각도 다시들고, 최근 번역된 마사오 마루야마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의 개력을 다시 읽다를 보면서 김옥균과 갑신정변의 주역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었어요. 홍종우는 파리에 이년 육개월을 살면서 매일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와 유길준은 후에 만났는지, 만났다면 무슨 말들을 나누었겠는지요,

  • 7. coco
    '11.2.10 9:33 AM

    보통 홍종우를 프랑스 최초의 유학생이라고 하는 하는 모양입니다. 그가 혼자서 일본의 식자공으로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프랑스 유학을 했다고 하는데 어디에서 공부했는지는 모르겠어요. 물론 기메 동양 박물관에서 일하기는 했지만요. 그가 홀로 상하이까지 가서 김옥균을 암살한 사실도 그렇고 그후 그가 개혁적, 보다 자주적 개혁을 지향했으면서도 김옥균 암살건으로 발목이 묵여있다는 이야기도 그렇고 많이 궁금한 인물인것 같습니다.

  • 8. wrtour
    '11.2.10 11:48 PM

    아고 코코님~~^^
    글 보니 홍종우,김옥균 관련 책들이 급 땡깁니다,, 그 책인가요.시간상 그럴수는 없고.제가 아는 데로만 정리 해볼게요.홍종우는 1850년 생,김옥균은 1851년생이니 동갑으로 보면될듯.출신,성장배경은 판이하죠.홍종우는 안산 출신,원래 선조는 전라도 완도 옆 보길도에서 살았다죠.그 유명한 남양 홍씨.남양 홍씨 아시죠? 원래는 당나라 고위 관료겸 귀족 일부가 난을 피해 남양만에 들어와 고려 조정으로 부터 남양 홍씨를 하사받았다는.홍씨 성 갖은 우리나라 유명인사는 거의 남영 홍씨로 보면되죠.반면 김옥윤은 충청도 공주산으로 안동김씨.선대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서 활복한 김상용이죠.김옥균 숙부가 바로 대원군 파락호 시절 후원자인 김병기로 그의 양자로 들어가구요.천재라 20세에 알성시 장권급제에 빽까지 든든하니 승승장구했구요.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유대치를 그의 정신적 스승으로 모시고 개혁사상을 가슴에. 당시 혁명동지들 중 가장 연장자였던 그는 갑신정변 후 일본으로 피신했으나 조선 정부의 양도 요청에 10년간 눈치밥만 먹고 살았고.이중 3년은 홋가이도 등 유배를.결국 프랑스서 돌아온 홍종우의 접근으로 상해까지.이홍장 만나서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려구요.결국 동화여관서 3발 맞아 사망.당시 윤치호가 조심하라 했다네요.그러나 홍종우의 프랑스 요리에 반해 그만.
    그러면 홍종우는~~
    일본서 물장수 등등 순전히 사비로 파리까지(당시 유학파라면 당연 정부나,외국공사관의 초청이라 장학금으로 갔죠).거기서 당시 유명 기록화가이자 기메박물관장인 레가미를 만나 그의 식객이.래가미는 빅톨위고의 초상화 등 당시 유명 인사 초상화를 많이.그런데 키도 크고 홍종우 신수가 넘 훤에 인기가 높았다죠.레가미 기록에는 / 키도 크고 위엄이 있는 신비스런 동양청년이였다/이리요.늘 한복을 입고 또 당시 일류 사교가들이 모이는 무도회서 그는 당당히 도포입고 왈츠 등등을 추웠다네요ㅎㅎ.이 대목에는 어쩔수없이 뻥 터지네요.어학에 천재. 당연 당시 외무상,왕자 등 파리 유명인사들과 교류를.당시야 자포리즘으로 동양에 대한 동경등이 있었으니 더.근데 김옥균과 홍종우는 사상적으로 좀 차이가 있더군요.김옥균은 그야말로 공화제,반면 홍은 전제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조선의 개혁,개방,부국강병 정도로요.그래서 김은 일본서 머리 짧게 자르고 일본 이름으로 개명했지만,홍은 도포쓰고 주머니엔 늘 고종과 대원군 사진을 지녔죠

  • 9. wrtour
    '11.2.11 12:14 AM

    그런 홍종우에 있어 김옥균은 외세에 등을 없고 권력을 노리는 반란의 수괴정도였겠죠.김옥균에 접근 순전히 스스로 결정했고(이는 내 잘 모르니).여하튼 상하이까지 같이 들어가 김을 죽이죠.
    김이 죽자 일본의 본성이 드러나요.그전엔 10여년간 냉대하다 갑자기 영웅을 만들었으니까요.사망 후 일본신문은 대서특필하고 추모사가 실리고 그를 소재로 소설에,희곡으로 무대에 오르고.그야 이런 돌변은 순전히 정치적인 속셈.평소 김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론에 반해 일본 중국 조선이 합심해 서양세력을 막아야한다는 삼화주의를 주창했는데 이는 대동아공영권과 같은 논리로 일제와 친일파들이 단골로 써먹었죠.그래서 김옥균은 친일인사의 대부가 되어버린.그러나 그는 저렴한 친일파들과는 비교가 될수없는 인물이죠.
    당연 귀국한 홍종우는 조선의,아니 당대 권력들의 영웅이.그를 정계에 입문시키기 위해 특별과거글 열어 급제시킨후 본격적으로 정계에.청일전쟁으로 일본이 득세하자 고종은 러시아공사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이후 되돌와온 고종은 황제가 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는데 이를 추진한 인물이 바로 홍종우구요.이리 몇년 대한제국 시기 잘 나가다가 1900년 말 친일인사가 전면포진하면서 그는 제주목사로 좌천.파리물 먹은 그가 어떻게 제주도에 살겠어요.그냥 파리로 망명 떠나야죠.거기서 5년 있다 1905인가 귀국해 몇년 더 살다 죽었구요.우리가 아는 김과 홍은 극과 극이죠.김옥균은 시기를 잘못만난 비운의 혁명가로,,,반면 홍종우는 그를 영웅을 저격한 찌질한 국수주의자 정도로요.이는 당연 일제 36년,그리고 이후 일제잔재 무리들이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죠.홍은 부정이미지가 너무나 많이 덧씌워졌고.
    떡본김에 홍종우와 이승만 관계로

  • 10. wrtour
    '11.2.11 12:37 AM

    갑신정변 후 서재필,김옥균,박영효등은 일본으로 도피.당시 서재필이 가장 어렸는데 불과 19세.일본의 냉대에 박영효 서재필은 미국으로.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서재필은 10년간 머무르며 조선인 최초 미국 의사가.미국인 아내와 귀국해 서대문 근처에 살았죠.독립협회를 만들고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신문을 창간하고.당시 독립협회 회장은 군부대신을 지낸 안경수,위원장이 이완용,미시민권자인지라 서재필은 고문으로요.재밋게도 독립문을 시민모금으로 건립했는데 그 현판이 당대 명필이였던 이완용 작품.지금도 그게.여하튼 만민공동회를 통해 시민토론을 하고 의견을 모아 정부에 건의하고,,,이리 한때는 권력과 좋은 관계였는데 힘이 커가자 당연 견제가 들어오겠죠.측근들이 공화제를 추진해 왕조전복을 기한다며 고종을 꼬드기고.결국 해산 명령을.근데 이때 해산 주도 세력이 바로 보부상 패거리들이 만들 황국협회.보부상들은 내지 상권독점을 받는 조건으로 수천명이 종로 만민공동회를 습격해 수만은 사상자가(상인,기업가들 속성이 이렇죠).이튿날 4대문 백성들 분노해 모두 종로로 모여들어 지금의 이집트 사태 같은.겁먹은 고종은 다시 독리협회를 허가했죠. 상황이 통제 불능으로 빠지자 독립협회도 균열이요.윤치호등 주류 지도부는 시민 귈기등으로 책임이 자신들에게 돌아올가봐 자지해산 입장을.반면 최정식,이승만등 강경소장파는 이번 기회에 백성들의 힘을 모아 왕권타도 까지 가야한다는 입장을.결국 둘은 최포되었으나 탈옥,,,다시 최포되어 법정에.당시 평리원(현대법원)재판장이 홍종우였죠.당시 홍종우는 대한제국 최고 실력자였고.최정식은 사형형이였으나 홍종우는 백방의 노력으로 이승만을 무기로요.이후 이씨는 사면을....아고 넘 길어졌네요 대충 아는거 적어보았습니다 ^^

  • 11. coco
    '11.2.11 2:14 AM

    위르투르님이라 하나요?ㅎ 워투워님이라 하나요. 아주 감사히 잘 읽었어요. 홍종우에 대한 책도 나와있군요. 어디까지 저자의 해석이고 고증된 것인지 궁급하기도 하고요. 말씀에 따르면 홍종우는 두번 프랑스에 살았던거네요. 합쳐서 7년 6개월 산건데 이정도면 기록이 많이 있을 수 있겠는데요. 갑신정변파와 확실히 다른 길을 걸었던 인물로 비춰집니다. 잘은 모르지만 갑신정변의 주역들도 각기 스타일이 많이 달랐던 것 같아요. 외세를 이해하고 자신들의 삶을 만들어가는 모습들도 꽤 특징들이 있고요. 은근히 우리 현재의 모습과도 그리 먼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네요. 좋은 역사가들이 많이 나와주었으면 좋겠어요. 어려서 국사를 배울때 너무 허접하게 배워서 이들에 대한 이해는 커녕 오해투성이죠. 각각의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들을 검토하고 반추하면 현재의 상황을 해석하는데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고요. 기독교 하나만 봐다 서재필은 기독교이면서도 쿨하게 기독교를 대했던 것도 같은데 윤치호는 메이게 된 것도 같고, 그렇지만 서재필은 미국인이 되면서 평생 조선 독립에 전 생애를 쏟아 붓는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주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은 조선에서 일본에 저항도 하고 그래서 심하게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변절해서 친일하게 되면서 부와 권력을 댓가로 누리다가 해방이 되자 억울해 한 것도 같고요. 물론 이승만과 같은 사람들은 또다른 예가 되겠지만요. 장지락, 김춘추? 이젠 이름도 헷갈립니다. 중국을 누렸던 우리의 아나키스트 로맨티스트드들은 또 별도고요. 역사를 하는 한국의 친구가 그럽디다. 한국의 정규직 역사과 교수 직의 수가 프랑스어 과 교수 직장 수와 같다고요. 너무 놀라서 믿을 수 없을 정도였지요. 미국만 하더라도 역사과가 모든 대학에서 거의 가장 큰 과거든요. 모든 인문학의 중심이고요. 한국에서 역사과가 그리 대접을 못받는지, 심지어는 사회과학 수준의 대접도 못받는다니 꽤 답답한 거지요. 그래도 고전번역이 많이 되고 있어서 이조 중후기 사회상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큰 다행이기도 하고요. 여러가지로 시간도 많이 뺏어서 미안하기도 하고 다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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