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일요일, 오전 중에 새로 생긴 취미가 하나 있습니다.
어린 시절엔 이런 날 엄마가 부치시는 김치 부침개 먹으면서 배깔고 누워서 보는 책이 최고의 즐거움이었는데
갑자기 추억이 밀려오네요.
카메라 바꾸고 처음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모르는지라 난감하던 날, 동영상으로 음악을 듣고 보면서
그 안의 글렌 굴드를 찍어보던 날부터 시작된 이상한 취미, 취미라고 하긴 그렇지만 그래도 조금씩 요령이
생기기도 해서 비오는 일요일 오전에는 (아마 밖이 조금 어둡고 해서 더 효과가 있는지 잘은 모르겠어요)
음악을 들으면서 마음에 드는 장면들을 찍어보는 취미가 생겼습니다.
물론 영상이 휙 흘러가버려서 생각하던 순간에 눌러도 이상한 영상이 많이 보이긴 하지만
아주 가끔은 마음에 드는 장면을 만나기도 합니다.

어떤 일에든 계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외부에서 온 것이든 자신의 마음안에 있던 무엇인가를 건드려서
생긴 일이든 말이지요. 제겐 음악을 씨디로 듣는 것이 아니라 동영상으로 보는 것에 더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가 언제 생겼던가 뒤돌아보니 바로 piano extrvaganza라는 동영상을 우연히 구해서 보게 된 이후란
것을 생각해냈습니다.
지금은 다 구별이 가지만 그 때는 너무 많은 이름이 나열되어 있어서 뭐가 뭔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디브이디
자켓에 빙 둘러서 그랜드 피아노가 여러 대 있고 그 앞에 앉은 연주자들의 사진을 보면서 아, 그래서 piano
extrvaganza인가, 그런데 이렇게 여러 대의 피아노를 동시에 들을 수 있는 기회란 한 번도 없었으니
궁금한 마음에 음반을 사러 갔다가 음반보다 조금 비싼 가격의 디브이디를 구해 왔습니다.

알고 보니 verbier festival 10주년 기념 행사로 열린 공연을 동영상으로 담은 프로그램이었는데요
이름으로만 알고 연주를 들었던 연주자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연주자들, 그리고 생일 축하 노래를 이렇게
다양한 베리에이션으로 연주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된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복장으로 연주회에 나온 이 사람이 누군고 했더니 그가 랑랑이더군요. 얼굴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일품인 연주자여서 기억에 남았습니다.그래서 덕분에 나중에 카네기 홀 솔로 공연 디브이디도 구해서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있는 중이랍니다.

한동안 자주 듣던 이 디브이디를 돌리는 사이에 어디선가 문제가 생겼는지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미 돌아오지 않는 동영상을 마음 아파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서 잊고 있었는데 언젠가 신나라 레코드에
가니 같은 디브이디가 있는 겁니다. 반가운 마음에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구해서 지금도 듣고 있는 중인데요
같은 것을 ,그것도 여러 차례 들어서 귀에 익숙한 것인데도 구하게 된 것은 들을 때마다 연주에서 얻는
에너지가 보통이 넘어서겠지요?

연주를 듣는 동안 행복해하는 관객들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언젠가 그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서
스위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막연한 희망이지만 (사실 여름에 하는 페스티벌이란
제겐 아직 그림의 떡이라서 일하는 동안에는 불가능한 꿈이지만요) 일단 그런 꿈을 꾸게 되었다는 것이
첫 걸음이 아닐까요?


그 때 처음 알게 된 피아니스트가 바로 아르헤리치입니다.

2003년의 연주이니까 그 때 보고 실제로 연주를 듣게 된 것은 2009년이 처음이지요. 그동안 세월이 흘렀다는 것
을 그녀의 흰 머리를 보고 느꼈습니다.


이 디브이디의 제목처럼 피아노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를 다양하게 보여준 연주였습니다.
둘이서, 넷이서, 여럿이서,피아노만으로 다른 악기와 더불어, 목소리와 더불어 이런 여러가지 변주를 통해서
피아노의 매력을 한 껏 느끼게 해준 시간이었거든요.



이 한 장의 디브디이와의 인연으로 그 동안 제게 생긴 변화들을 생각하면 정말 행복한 인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이 디브디이를 빌려간 도서관의 한 멤버는 당장 주문해서 구했다고 하더라고요. 이왕 보고 나서 왜 구했는가
물으니 한 번 빌려서 보기엔 너무 좋은 동영상이라 보고 또 보고 싶어서 구매를 했다고 해서 웃었습니다.
어라, 여기 비슷한 사람이 또 있네 하고요.


사실은 아침에 읽어야 할 텍스트가 있는데도 마음이 소리에 붙들려 그냥 그렇게 즐긴 비오는 일요일
이제 드디어 그만 놀고 할 일을 해야 할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