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새벽,학원에 가야 하는 아들을 위해 아침상을 차리고 나서,감기는 눈을 뜨지 못해 소파에 누웠습니다.
일단 집을 나서는 것까지는 보고 잠이 들어도 들어야지 하고는 음반을 하나 걸었지요.
엠마뉴엘 엑스,-피아노
요요마-첼로
이작 펄만-바이얼린
이렇게 셋이서 연주하는 멘델스죤 피아노 삼중주가 두 곡 녹음된 음반이었는데요
이상하게 몸이 조금씩 회복되더니 음반이 다 끝나갈 무렵엔 저절로 잠이 깨버렸습니다.

새벽마다 음악을 듣지만 여러가지 경험을 하지요.어느 날은 저절로 잠이 들어 음악이 다 끝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경우도 있고,오늘처럼 힘든 몸이 저절로 회복이 되어 그 다음,그 다음 이렇게 한없이 소리의 숲으로
들어가는 날도 있습니다.무슨 차이일까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오늘은 소리에 저절로 몸이 움직이는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몸이 움직이면서 멜로디에 맞추어 제가 저절로 반응하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라서 원래 오전 시간에 해야지 하고 생각하던 일들을 다 미루고 있는 중이거든요.

이런 날 아침,그림을 고르면서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의 화가를 만났습니다.
앙리 마뗑이란 이름의 프랑스 점묘화가네요.그의 그림에서 금방 올듯하다가 다시 뒤로 물러가고 있는
현실속의 봄과는 달리 이미 무르익은 봄을 만나고 있는 중인데요,신문에서 읽은 봄이 왔으되 아직 봄이 아닌
이야기,사람의 봄은 그저 바라만 본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이 그림의 배경은 모네를 비롯한 여러 화가가 그려서 상당히 익숙해진 곳인데요,역시 다른 화가의 표현으로
보니 익숙하지만 새로운 느낌이 나서 바라보고 있는 중입니다.새롭다는 것은 꼭 처음이어야 새로운 것이
아니란 것,이미 알고 있는 대상이라도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따라서 새로워질 수 있기도 하고,같은 것이라도
(예를 들어 음반의 경우)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그것이 마치 처음인 것처럼,새롭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물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지난 주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함께 공부해서 대학에 진학한 여학생인데,2학년이 되면서
교환학생으로 나가고 싶은데 토풀 점수가 필요하다고요 그래서 어떻게 공부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선생님에게 가서 함께 공부하고 싶다고 하네요.학교안에 프로그램이 없는가 물었더니 있긴 한데 시간을
맞추기도 어렵고,자신의 페이스대로 공부하기 어려워서 오고 싶다고요.
그러면 주말에 보자고 약속을 잡았습니다.
홍대 미대 회화과 학생인 그녀는 외모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못 보던 일년동안 생각의 키도 많이 자라서
눈부신 기분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관심분야가 상당히 비슷해서 이야기가 잘 통하고,공부하는 내용에서도
수험생이던 때보다 이해가 빠르고,본인이 목표가 뚜렷해서 그런지 조금 더 조금 더 하는 마음으로 글을
읽더군요.
바우하우스에 관한 글을 읽다가는 작년에 배운 독일 문화사시간에 만난 내용이라 반갑다고 하길래
조금 더 읽을 거리를 찾아주기도 하고,아방가르드에 관한 글을 주자,이것도 현대미술시간에 배우고 있는 것이라고
반가워하고,르네상스시대와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의 지위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는 내용상 모르는 부분에 대해
해설을 부탁하길래 여러 가지 설명을 했더니 질문을 해가면서 귀기울여 듣더군요.
이런 과정을 조심스럽게 지켜보던 한 아이가 그 여학생이 가고 나서 물어봅니다.
선생님,저 누나 대학생인가요?
대학생들은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도 알아듣는가 신기해하네요.
이틀간 만나면서 평소라면 한 달 정도 걸려서 해야 할 공부를 다 마치고 빌려가고 싶은 책을 골라서
들고 나가는 그 여학생을 보면서 우리는 한 사람을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습니다.
변태라는 말이 이상한 뉘앙스로 씌이지만 사실은 우리들 누구라도 변태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구태의연과 변태 사이에서 자신의 태를 자꾸 바꾸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그래서 오랫만에 만났을 때
눈부시게 바라볼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있는 것,그런 아름다움을 목격한 기분이어서 행복한 주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