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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 그뤼네발트,힌데민트 & 교향곡 '화가 마티스'-

| 조회수 : 5,582 | 추천수 : 153
작성일 : 2009-11-27 23:50:03



콜마르 운테린덴 미술관.


힌데민트(1895~1963,독일)는 시대적 소명에 충실한 작곡가였다.
결국 나치에 추방당했다.
그 힌데민트가 중세 말기 한 화가의 삶과 그림을 표제 삼아 오페라와 교향곡을 작곡했다.
'화가 마티스'로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흐르는 곡이 바로 교향곡 '화가 마티스'다.

1490~1520년,,,
미술에 있어 이탈이아 르네상스의 절정기다.
,,, 등 대작이 쏟아진 시기다.

그러나 시대적 격량에 실존적 고통의 시기이기도 했다.
종교개혁,농민전쟁,그리고 흑사병의 삼중고의 시대였다.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는 대자보를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내걸 때가 1517년 이였다.
알프스 이북 당대 최고 화가 알프레이드 뒤러도 흑사병 피해 베네치아로 떠났다.

흑사병은 인류 최악의 전염병이였다.
유럽사의 판을 바꿨다.
1300년대 초에는 유럽인구 30%인 2천5백만명이 사망할 정도였다.
그때 중국 원나라도 그랬다.

이 즈음,,,,
한 화가가〈이젠하임 제단화>라는 별스런 대작을 남겼다.
4백년이 흘렀고,,,
힌데민트는 그 화가의 생애와 작품을 음악화했다.

그러면 마티스가 누구길레???
색채의 마술사에 표현주의 대가 앙리 마티스(1869~1954,프랑스)일까?
중세 말기,르네상스 시기를 산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unewald,독일 1480~1528)다.

그는 르네상스가 절정으로 치닫을 즈음 독일에서 활동했다.
종교적 주제에 강렬한 채색,격정적인 표현으로 환상적인 세계를 창조했다.
'북유럽의 다빈치'로 불린 알브레이트 뒤러(Albrecht Durer,1471~1528)와 동시대를 살았다.
당시 뒤러는 북유럽 화단을 평정했고,둘은 서로를 알고있었으며 같은 해인 1528년에 죽었다.

그뤼네발트는19세기 말에 와서야 원 이름이 밝혀질 정도로 베일에 쌓여있던 인물이다.
원 이름은 마티아스 고트하르트 니트하르트(Matthias Gothardt Nithardt)~~~.
출생도 불확실한데,1455~80경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나 1528에 죽었다.
그는 19세기 중엽엔 '뒤러의 훌륭한 모방자' 정도로 폄하되기도했다.
그래서일까,,,한때 '이젠하임 제단화'는 뒤러 작품으로 오인되기도 했다.

힌데민트(Paul Hindemith ,1895∼1963)는 음악적 표현주의자이다.
음악적 테러리스트다.
표현주의(Expressionism)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독일서 절정을 이뤘다.
자연주의,합리주의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사조다
객관성 보다는 사물이나 사건에서 느끼는 감정이나 반응을 우선한다.
고흐,뭉크,에밀 놀데,오토 뮐러,오스카 코코슈카,에른스트 등등.

1차 대전 직후에는 황량한 전후 분위기에 힘입어 독일의 지배적인 양식이 되었다.
오토 딕스 같은 이들은 표현주의에 사실주의를 더해 사회 비판 미술로 나아갔다.
결국 독일에선 나치에 퇴폐예술이라는 구실로 분서갱유되었다.

표현주의 화법은 중세 이후 독일과 북유럽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특히 사회적 변혁기에 두드러졌다.
그뤼네발트가 살던 그 시기로 그랬다.
그는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 의해 재발굴되었고 지금은 표현주의 시조가 되었다.

힌테민트는 나치에 저항했다.
그뤼네발트는 종교개혁의 편에 섰고 1525년 농민정쟁에도 동조했다.
힌데민트와 그뤼네발트,,,,
둘은 그렇고 그런 관련이 있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는 10여점의 그림과 수십점의 소묘를 남겼다.
그러나 그뤼네발트 하면 곧바로 가 떠오른다.
다빈치,브라만테,미켈란젤로,라파엘로가 전성기 르네상스를 이끌던 그 시기를 살았다.

이젠하임 제단화는 모나리자,시스틴 천장화,대공의 성모(라파엘로作)가 세상에 나온 직후 그려졌다.
그는 당연 이탈리아 르네상스 영향도 받았다.
만큼이나 유명하고,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천당화와 비견되기도 한다.

문화사적으로 알프스를 기준으로 이남과 이북의 차이는 확연하다.
독일은 기악,이탈리아는 현과 성악 중심,,,,
남북간 음악적 기호 차도 분명하듯 미술도 그랬다.
북유럽은 디테일 묘사가,,,,이탈리아는 입체,색체감이 뛰어났다.


이젠하임 제단화 중 첫번째



그러면 어떤 그림이길레~~~~

그는 성서의 전통적인 주제를 신비주의로 그렸다.
그냥 그린게 아니라,뛰어난 표현력에다 극적인 색채감을 살려,,,,격렬하게 그렸다.

현재 이젠하임 제단화는 프랑스 동부 알사스 지방의 작은 도시 콜마르의 운테린덴 미술관에 있다.
이젠하임은 콜마르에서 남쪽으로 수km 거리다.
미술관은 13세기에 세워진 수도원 건물을 개조,1835년 이후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4세기 초 안토니우스파 수도사들은 이곳 이젠하임에 수도원과 부속 병원을 지었다.
제단화는 바로 성 안토니우스 교단 소속 수도원의 주문으로 그린 것이다.
접혔다 펼수있는 데,펴면 307×270 크기다.
총 10점의 그림으로,현재는 분리되어 각각 다른 방에서 전시되고 있다.
목판에 패널에 유채다.


십자가 책형



못박힌 손과 발 부분.


막달라 마리아 부분 ,,,,,막달라 마리아의 얼굴이 고통에 이그러졌다.
'다빈치 코드'를 빌리자면,사랑하는 사람이여서?


성모 마리아 부분,,,,,소복 차림의 성모 마리아가 처연하다.
비애감이 피에타상을 능가한다.

  
먼저,,,,,,
가운데 그림인 '십자가 책형'을 보자.

책형(*刑)은 유대,그리스 등에서 행해진 형벌이다.
기둥에 묶어 세우고 창으로 찔러 죽였다.
313년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폐지되었다.

중앙 패널을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모습이 충격적이다.
긴 십자가를 걸친 속죄양은 피를 성찬배에 떨어뜨리고 있다.
사실,속죄양 비유는 '회화의 발전사'라는 시각에서 보면 지극히 고대적이다.
'예수=속죄양'으라는 직설적인 표현이 유아적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손가락을 엉퀴어 잡고 절망한다.
그 절망이 격렬하다.
기름으로 예수의 발을 씻을 향유단지도 보인다.
젊은 제자 성 요한은 소복을 입고 오열하며 쓰러저 가는 성모를 붙들고 있다.
예수는 생전 성 요한에 마리아를 부탁했었다.
성모의 비애감이 전통의 피에타 상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크다.

그러나,,,
오른쪽 세례 요한은 근엄한 자태로 한 손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그는 커지고,나는 작아지리라/ 는 요한 3장 30절이 요한의 머리 위에 쓰여있다.
(근데 이상타,,,그는 예수보다 먼저 죽었는데.....)



라파엘로-십자가 책형(1502),목판에 유채,281x165㎝,내셔널 갤러리,런던


뒤러-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탄식(1500)


얼핏 보면  이젠하임의 제단화는 일반적인 십자가 책형과 별 다를 게 없다.
그러나 분명 확연히 다르다.
이제하임 재단화 보다 10년 전에 그려진 라파엘로의 그림(上)을 보라!
동시대,,독일 남부 출신,,,,서로를 알고 있었던 뒤러(上)도 보라!!



조토(1266-1337)-'The Lamentation' 200 x 185 cm ,파도바 델아레나 예배당 프레스코



이전 시대에 그려진 십자가 책형에서 예수는 인간의 고통을 초월한 절대자로서 평온하다.
백번 양보해,고통스러울지라도 잔혹하지는 않았다.
전통적으로,주변인들의 슬픈 행동이나 표정으로 예수의 고통을 비유했다.

조토(Giotto di Boudone 1266~1337)의 위 그림(上)을 보라.
회화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림에서 예수는 평온하다.
슬픔을 감동적으로 표현했다.
성모도,예수의 발을 만지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도,두팔을 벌린 사도 요한도,천사들도,,,
심지여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도 슬프다.
얼굴을 뭍고,눈물을 닦고,슬퍼 하늘만 처다보고,,,신성을 지닌 천사들 조차 슬픔이 다양하다.
조토는 슬픈 일을 당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자세를 그려 넣은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성모,제자,천사들의 고통이 곧 예수의 고통이 된다.

피렌체 출신 조토는 미술사에서 새로운 장을 열어저친 인물이다.
프레스코를 1천년만에 재발견했으며 르네상스 원근법의 할아버지 같은 존재이다.
미술사 책에서 대개 조토와 더불어 새로운 장(章)이 시작단다.

통나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는 비참하다.
두 손바닥과 발등에는 공사장 철근 같은 대못이 박혔다.
발도 위 아래로 포개진 채 못에 관통되어있다.
가시 채칙과 창에 찔린 피부는 검붉은 피가 선지되어 붙었으며 마치 피부병 환자같다.
정육점에 걸린 도살된 가축 형상이다.
육신에서 피는 빠졌고 중력을 이기지 못해 처졌다.
주검의 무게에 십자가는 휘어졌다.

잔혹하다.
잔혹함이란 인간 이하의 속성을 지닌다.
예수가 인간 이하로 그려졌으니 이 얼마나  충격적인가!!

진중권이 덧붙힌 해석이 재밋다.

/17세기 바로크 사람들은 성당에 걸린 잔혹한 순교의 그림을 걸어놓고,
거기서 은밀한 쾌감을 느꼈다.
이처럼 '수난'이라는 장르는(예수 수난이든 마태 수난이든) 표면의 종교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의 바탕에 흐르는 더러운 카인의 피를 증언한다/


영화 'The Passion of Crist' 중에서.


맬 깁슨이 감독한 영화 'The Passion of Crist'~~~~
여기서 Passion은 열정이 아니라 '수난'이라는 뜻이다
맬 깁슨은 영화에서 '십자가 책형'을 패러디했다.
영화는 앞뒤 자르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12시간 전부터 부활까지 다루고 있다.
이젠하임 제단화도 십자가에 못 박힌 이후 부활까지다.

살점이 뜯겨 나가고 핏줄이 퍽퍽 터져 나간다.
일종의 고어(gore)물이다.
영화는 예수의 자기희생을 극대화시킨 후 보는 이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낸다.
십자가 책형도 그렇다.

'십자가 책형'은 세속적인 동시에 상징적이다.
평소 예수는 자신을 '인자'(人子)라 불렀다.
성모 마리아,막달라 마리아,성 요한의 슬퍼하는 모습은 인간 예수를 대변한다.
채찍과 가시 면류관에 찢긴 예수의 몸은 인간 이하,학대받는 동물의 신체로 묘사되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 이하'로 내려간다.

오른쪽 세례 요한은 근엄한 자세로 구도자 예수를 증언한다.
예수는 죽음 가운데 일어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신의 아들'로 상승한다.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극단적인 나르시즘을 유도한다.

그러나 양식사적으로 보면 이제하임 재단화는 퇴행적이다.
미술적 발전 양태를 거부하고 중세적 관념으로 돌아갔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팔 크기 정도로 왜소하다.
주인공의 무게에 따라 등장인물 크기도 달라진다.

곰브리치는 이제하임 제단화를 이리 평했다.
/진보적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위대해질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미술사 흐름 속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라파엘로와 그뤼네발트의 '십자가 책형'은 느낌의 차이가 분명하다.
왜일까?
화가의 사유체계,특히 처한 위치나 환경이 둘은 달랐다.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의 예술세계는 자체적으로 자기완결성을 지닌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속에서 설명되었을 때 이해가 풍부해진다.
그는 다빈치,미켈란젤로라는 큰 언덕에 기대어 성장했다.

그는 다빈치와 31세,미켈란젤로 보단 8살 아래였다.
그뤼네발트는 라파엘로(1483~1520) 보다 2년 먼저 태어났고, 그가 죽은 뒤 8년을 더 살았다.
넷은,특히 라파엘로와는 동시대인이다.
다빈치는 미켈란젤로와 경쟁했고,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와도 경쟁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천장화를 그릴 때  라파엘로는 바티칸궁 내 스탄차 방들의 벽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탄차 방은 교황의 내실이다.
둘다 피렌체 메디치가 출신의 교황인 율리우스 2세의 명으로 그렸다.

미켈란젤로에게 전통,규범 등은 열등한 영혼을 가진자에만 보일뿐이였다.
자키?같은 천재적인 예술행위는 하늘이 내린 성스런 영감 같은 것이였다.
따라서 자신의 액션은 늘 객관적인 타당성을 지닌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재능을 억누르는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고,
이같은 예술관은 그로 하여금 교황에도 저항하게 했다.

반면,라파엘로는 부드럽고 사교적이라 귀족,고위 성직자들이 좋아했다.
교황청 학자들과도 친분이 커 그리스 고전 서적도 쉽게 접할수 있었고 이는 그의 예술에 도움이 됐다.
그는 우르비노 공국의 우르비노 출신으로 아웃사이더였다.
피렌체를 거처 최종 로마에 입성했다.
입성 후에는 로마인이 되려 애썼고 마지막 10년을 로마에서 살았다.
로마 귀족들이 '화가 중의 왕자'로 인정할 만큼 인기도 높았다.
그들은 라파엘로를 자신들과 동격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비비에나 추기경은 조카딸을 그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메디치가는 두명의 교황를 냈는데 율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이다.
레오 10세는 위대한 메디치 로렌초의 아들이다.
그 율리우스 2세의 후계자인 교황 레오 10세는 라파엘로를 추기경으로 임명하려했다.
이렇게 라파엘로는 그림으로 이들을 도왔고,그들은 후원으로 라파엘로를 도왔다.

아이러니하다.
내외적으로 격렬했던 미켈란젤로는 90을 넘게 살았다.
고요한 호수 라파엘로는 고흐 처럼 37세를,그것도 태어난 날 죽었다.
(참고로,고흐는 윗 형이 죽은 날 태어났고,어머니는 죽을 아들을 넘 그리워해 고흐에게
죽은 형의 이름인 빈센트를 주었다.)

유명 학자이기도 했던 벰보 추기경은 로마 판테온에 있는 라파엘로 묘의 묘비명에 이리썼다.
난 이보다 더 장려한 비명을 본적이 없다.

/이곳은 생전에 어머니 자연이 그대에게 정복될까 두려워떨고 있는 라파엘로의 무덤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하노라/

이처럼 라파엘로는 피렌체,로마의 화려함 속에서 살았다.
반면,그뤼네발트는 지방을 전전했다.
아내는 아이 딸린 재혼이였고,결혼 생활을 불했했다.
한때 궁정화가,마인츠 주교 밑에도 있었지만 1525년 농민반란에 동조 쫓겨났다.
말년엔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으로 돌아갔다.

둘간 이러한 극명한 삶의 차이는 곧 예술의 차이로 나타났다.
1) 라파엘로에겐  신성의 예수였고,
2) 그뤼네발트에겐 실존적 예수였다.


그리고 두번째,,,,
십자가 책형을 가운데 두고,
접히는 작은 문짝  패널에는 성 안토니우스가, 맞은편에는 성 세바스찬이 그려졌다.
성 세바스찬 다리와 가슴은 화살로 관통되었다.

화살을 맞고 순교한 성 세바스찬은 만테냐등 많은 화가들이 주제로 다뤘다.
음악에서도 그랬다.
브람스의〈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변주곡 중 명곡이다.
이 성 안토니우스와 관계가 된다는데 그 정확한 관계는 모르겠다.
드뷔시는 극 부수음악인〈성 세바스찬의 순교>를 남겼다.



'십자가 책형' 하단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부분.


윗 그림 중 왼쪽 '막달라 마리아' 부분,,,,
예수를 넣을 관 옆에서 피눈물이다.


라파엘로(1483-1520)ㅡ그리스도 매장.


세번째로,,,
제단 밑 패널에는 예수의 장례 모습이 그려져 있다.
힌데민트는 교향곡 '화가 마티스' 2악장에서 '매장'이라는 제목으로 다뤘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는 인상파 이전까지 화가들의 주요 주제였다.
그러나 이토록 처절하게 묘사한 작품은 어디에도 없다.
동시대 라파엘로의 '그리스도 매장'과 너무나 대비된다.
못이 박혀 갈라진 발등,온몸 가득한 가시 자국,나병 환자 같은 피부,그리고 절명한 예수의 표정이 리얼하다.
'인간 죄악이란 이런거'라라 말하는 것 처럼.

저게 1515년 작품인데, 믿어지신지???

생각난다.
그리스의 화가 프로토게네스는 노예시장에서 산 늙은 노예를 묶어놓고는 때려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노예를 모델로 삼아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림으로 그렸다.
죽음의 가장 생생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화가를 사로잡은 것은,
예술의 강박이었을까,
플라톤,미켈란젤로 처럼  예술가 전능성에 기인한 욕망이었을까,
그뤼네발트라면???


'이젠하임 재단화' 두번째 화면(펼치면 이리~)



천사들의 연주 부분.


성모와 아기 예수 부분.


현란한 색채에 눈이 부시다.
색체감이 베네치아 화풍을 능가한다.
하늘에서 광채가 쏟아진다.
이 광채의 모습은 몇년 뒤,풍경화의 시조 알트도르퍼(1480~1538)가 에서 그대로 재현했다.
그는 '후세의 그뤼네발트'라고 불린다.



'예수 부활' ,,,
예수와 속절없이 거꾸러진 로마 병사들이 극적으로 대비된다.


'십자가 책형'의 배경은 골고다 언덕이 아니라,골고다 언덕이 바라보이는 산 정상이다.
배경은 칠흑이다.
그러나,,,,,,
어둠이 깊어지면 새벽은 온다.
구원을 암시한다.

십자가 책형의 가운데를 양옆으로 펼치면 이젠 신세계다.
왼쪽에 ,
가운데에 ,
오른쪽에 이 그려져있다.
(그리고 예수의 탄생 뒷면에는 과 이 그려져 있다)

여기서 분위기는 딴판이다.
매우 경쾌하게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예수는 더 이상 고난의 예수가 아니다.
인간 육체가 아니라 신성의 구세주 모습이다.
등장 인물들은 역동적이고 탄력적이며 육감적이다.
색채도 현란하다.
밝은 빛이 쏟아지고 예수 뒤로는 둥근 무지개빛의 아우라가 섰다.
힌데민트 교향곡 '화가 마티스' 1악장의 제목이 '천사의 합주'이다.


서양미술사의 저자 잰슨은 이제하임 제단화의 화풍을 이리 평했다.

/후기고딕 미술의 매마르고 날가로운 윤곽선,
그리고 각진 형태들을 완전하게 변형시켰다/

성탄절이나 부활절에 제단화가 열렸을 때 현장 분위기를 상상해 보라!
환자들은 예수의 고통을 자신의 것과 동일시 했을 것이다.
고통을 느꼈던 관찰자들도 여기선  안도의 숨을 쉬었을 거고.
부활하는 예수를 보면서는 육체의 고통은 사라진다.
영화 'The Passion of Crist'에서 그러하듯이.

그러면,,
그러면,,,,,,,
그러면 만이다.

그뤼네발트에 있어 그림 동기는 뭘까?
내외적 여러 요인이 있었을 게다.

외적으로,
그림은 이젠하임 수도원의 주문으로 그려졌다.
돈을 받았다는 얘기다.
주문 그림이니 의뢰인의 의도가 투영되기 마련이다.

이젠하임은 중세의 작은 마을이였다.
이곳에 성 안토니우스 교단 소속 수도원이 있었다.
수도원서 운영하는 병원엔 포진,성병,간질,흑사병,피부병 환자들이 많았다.
수도원의 수도승들은 의사이기도했다.

그뤼네발트는 그런 수도원의 병원에 걸릴 그림을 그린 것이다.
당시 병원에는 피부병 환자들로 넘쳤다.
전통을 깨고,수도원측이 이 참혹한 그림을 받아들인 것도 그림을 통한 치유 효과를 고려했을 게다.
그뤼네발트가 예수의 몸을 나환자 처럼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데에는 환자들을 모델로 썼기 때문일 게고.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기 같이 삶이 암흑이라면 예술작품 또한 사뭇 다르지 않았겠는가?
누가 뭐래도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다.

당시 페스트가 멀마나 현실서 큰 위력을 발휘했냐하면,
뒤러의 두번째 이탈리아 여행은 베네치아였다.
말이 여행이지 진짜 목적은 페스트를 피해 도피였다.
동기야 어떠하든 뒤러는 그곳서 많은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당연이,,,
로마,피렌체,베네치아 등 중세 도시의 대주교 관활 교회서 저런 그림은 언감생심이다.
시스틴 성당을 그릴 때 절대대가 미켈란젤로 조차도 교황으로 부터 세세한 지적에 직면했다.
하물며 인간 이하로 묘사된 그뤼네발트의 '십자가 책형'이 어떻게 걸리겠는가?

나아가 이제하임 제단화에는 그뤼네발트의 사유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는 말년 루터의 종교개혁에 공감했다.
말년을 프로테스탄트의 도시 프랑크푸르트 등에서 보냈다.
뒤러는 자화상 등 다양 장르를 섭렵했지만 그는 평생 종교화만 그렸다.

사실 르네상스 보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훨 그 정치 사회적인 영향력이 크다.
10월 31일은 종교개혁 기념일이다.
1517년 이날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는 95개 조항의 대자보를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내걸었다.
종교개혁의 기치가 올려진 것이다.

미술사에서 1520년 까지를 르네상스 절정기로 본다.
따라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16세기 벽두 이탈리아 르네상스 절정기에 불이 붙은 것이다.
중세 사제는 미사 집전 시 신의 권능을 빌렸다.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바꿔 군림했다.
그리고 사제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핵심 중 하나가 '만인(萬人)사제주의'다.
영적인 위치에서 사제와 평신도는 대등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인사제주의는 곧 '인식론적 개인주의'다.
신의 음성을 듣고 영감을 얻은 사람은 누구나 신의 뜻에 따르면 되는 것이었다.
제각기 성경을 독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이런 개인주의는 이후 자유주의의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자유란 근본적으로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루터의 만인사제주의는 신자들의 영적 평등을  주장함으로써 기존 계급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파괴력을 지녔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는 1521년 루터를 소환하고 철회를 명했다.
당연 스페인,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의 공국인 베네치아 밀라노 왕들도 가세했다.
이들 지배권력의 끈은 카톨릭이였기 때문이다.

이런 종교개혁이고,,,
이런  프로테스탄트 도시에서 새로운 공기를 마시며 말년을 보냈으며,,,
이런 루터파 편에서면서,유품으로 루터파 책자도 남긴 그뤼네발트였다.
뒤러와 그뤼네발트와는 차이점이 많치만 종교개혁의 편에 섰다는 점에선 같다.

뒤러는 '용과 싸우는 성미가엘' 동판화를 제작했다.
엄청 인기를 끌었다.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계시록의 예언들이 생전에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바로 카톨릭 부패 등등에 대한 반발이였다.


뒤러-기사,죽음과 악마(1514년),동판


동판화 도 제작했다.
뒤러는 렘브란트와 더불어 3대 판화가이다.
기사는 말을 탄채로 악마를 해치며 진군한다.
유혹에도 아랑곳 않는 위풍당당 기사를 신비적으로 그려냈다.
로마 기마상 같이 견고한 기사는 미적인 동시에 도덕적,종교적 이념이 육화된 모습이다.

라는 제목은 암스테르담 출신에 '우신예찬'의 저자로
북유럽 대표적인 인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의 '기독교 병사의 지침'을 차용한 것이다.
우신예찬(愚神禮讚 )은1509년에 나온 종교비판서이다.
우매한 여신의 자기예찬을 빌어서 종교개혁시대의 왕후 귀족 사제 교황을 통렬히 비판했다.
소박한 신앙심의 부활과 자유로운 인간성의 회복을 주장,르네상스 정신의 선구가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기독교의 예지자로 여겨지고있다.



뒤러-네 사도(1526)


뒤러의 종교개혁적인 성향은 죽기 2년전 유작이 된 '네 사도'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림은 자신의 고향이자 루터 진영에 합류한 남부 독일 뉘른베르크시에 기증했다.
등장인물은 왼쪽부터 요한, 베드로, 마가, 바울이다.
뒤러는 그림 밑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세상의 지배자들은 인간의 욕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해선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을 더하거나 빼선 안되며,
그를 위해선 네 성인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루터는 화답으로 '네 사도' 그림 밑에 글도 남겼다.

뒤러는 이탈리아 여행 중 르네상스 정신,화풍을 습득했다.
이탈리아 현지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그뤼네발트도  이탈리아 르네상스 영향을 받았다.
저 현란한 색채감은 베네치아 화풍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중요한 건 또 있다.
화풍만이 아니라 개성,자유주의 같은 르네상스의 정신을 얻은 것이다.

플라톤 이래 교양인이란 철학,논리,수사,수학,음악 하는 자였다.
르네상스 이전 까지만 해도 화가는 칼을 벼르고,마차나 만드는 장인이였다.
머리가 아닌 손으로 하는 그림,조각은 정신 교양의 영역이 아녔던 것이다.

그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 상황은 변했다.
르네상스기 화가,조각가들은
1)과학적 원근법과
2)완벽한 인체 묘사를 가능케 한 해부학적 지식을 발견했으며,
3)그리스 고전기 건축을 연구하고,관련 연구서를 출판하면서 교양 지위를 었었다.
다빈치,미켈란젤로가  인체 해부에 집착하고 인체 해부도를 남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뤼네발트는 이런 르네상스 정신에 매료된 것이다.


이젠하임 제단화 세번째



제단화 두번째 패널 중앙을 열어젖히면 아래로 조각 작품도 나온다.
예수와 12제자상이다.
그림에서 가운데 앉은 이가 성 안토니우스다.
좌우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히에로니무스가 서있다.
(이 부분은 니클라우스 하게나우어의 작품)
양 옆 두 날개 그림은 물론 그뤼네발트의 작품이다.

왼쪽은 '은자 성 바울을 방문한 안토니우스'이며 오른쪽은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이다.
성 바울은 사도 바울이 아니라 최초의 은자라고 일컬어지는 바울이다.

성 안토니우스는 4세기 초 전재산을 나눠주고 사막에서 홀로 수도했던 은자이다.
수도 중 환상 속에서 악마들의 유혹을 받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플로베르 등 많은 시인 극작가들은 그를 주인공으로 작품을 썼고 화가들은 그림을 그렸다.
당시 보스,숀 가우어는 물론이고 폴 세잔느,살바도르 달리 같은 현대 예술가들도 그렸다.

힌데민트는 교향곡 '화가 마티스' 3악장에서 ' '성 안토니우스의 시련'이라는 제목으로 그를 다뤘다.

재단화에서 성 안토니우스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가 이젠하임 수도원 병원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유골은 이젠하임 병원에 안치되어 있었다.
유골이 있는 이젠하임으로 유럽 각지의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뒤러-Self Portrait, 1493년
손에 들고 있는 꽃은 에린지움이다.
괴테는 꽃이 에린지움임을 밝히고 감탄했다.
에린지움은 연인의 사랑을 상징했다.




뒤러-모피 입은 자화상,1500년


그뤼네발트는 특별했다.
방랑자 처럼 전전했으며 건축가,기계 기사로도 일했다.
공방을 차리기도 했으나 특별히 알려진 제자도 없다.
다만,
풍경화가의 개척자로 을 그린 알트도르퍼(1480~1538)는 후세의 그뤼네발트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수스 전쟁에서 하늘서 쏟아지는 광선의 표현은 이젠하임 제단화에서 성모와 아기예수의 광선과 흡사하다.

요즘에야 그뤼네발트는 뒤러와 더불어 고딕 후기 알프스 북쪽의 2대 화가로 평가된다.
그러나 당대는 아녔다.
죽은 해만 같았지 뒤러와는 많이 달랐다.
뒤러는 그의 작품을 보고 '손질되지 않은 야생 나무'라 폄하했다.
이론적인 토대없이 그저 손으로만 그린 그림이라는 것이다.
뒤러에 그뤼네발트는 르네상스의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기준에 의해 조정되어야 했다.

뒤러(Albrecht Durer)는 표현 양식,생활 습관 등등  많은 것이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그는 세익스피어처럼 신비에 쌓인 인물이다.
뒤러는 자신이 무었을 하고 있으며,또 뭤을 해야하는 지 잘 알고있었다.
여행,연구 내용은 책으로 남겨 자신을 따르는 세대를 가르쳤다.

화가로서 자의식도 대단했다.
예술가로서 자의식이 작품에 드러나는 관점에서 보면 딱 음악의 베토벤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의 자화상은 흥미롭다.
현존한 그의 3점의 자화상은 곧 '자의식'이다.

그는 13살에 첫 자화상을 그렸다.
20세에 그린 아버지,말년에 그린 어머니 초상화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1493년 자화상(上)은 약혼자에 보낸 일종의 증명 사진용이다.
귀공자로 표현된 얼굴은 젊지만 예사롭지않다.

1500년(下) 자화상에서는 자신과 예수를 오버랩 시켰다.
다빈치는 모나리자에서 성모와 자신의 얼굴을 교묘하게 중첩시켰다.
뒤러도 그랬으려나?

작가로서 자의식을 표현한 최초의 자화상으로 평가된다.
자화상엔 라틴어로 이리 적었다.
아니,,,적은 게 아니라,세상에 선언한 것이다.

/나, 뉘른베르크 출신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28세의 나이에 불변의 색채로 나 자신을 이렇게 그렸다/

자화상은 전통적인 예수의 초상화법을 차용했다.
6세기경부터 시작된 그리스도 초상화법이란 얼굴을 좌우 대칭으로 완벽하게 표현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집트 조각상에서 알수 있듯 기하학적인, 수리적인 비례 분할은 신의 형상을 의미한다.
짧게 자른 턱수염도 예수를 암시한다.

인간의 자화상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기부터였다.
그 이전에는 서명하는 것조차 피조물로서 불경 행위였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그것도 정면에서 보란듯이 그렸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모습으로의 창시했다.
하나님의 피조물 인간을 그리기에,화가인 자신을 조물주에 이어 제2의 창조자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의 예술관과 유사하다.
고대 이집트에서 조각가란 '계속 살아있게 하는 자'(he who keeps alive)가 아녔던가.

동서고금 모피는 부유의 상징이다.
젊은 나이에 모피를 입었고 손은 성자처럼 가슴에 올렸다.
참고로,조선 후기 양반들의 겨울철 인기상품도 수달이나 모피모자였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이를 통박했다.

그는 엄청난 부,명예도 얻었다.
권력은 자신을 영광되게 하는 수단으로 예술 대가들을 고용한다.
당시 막시밀리엥 황제도 말년의 그를 고용했다.

한번은 조합에 초대되었는데 당시를 뒤러는 이리 적고있다.
/내가 들어서자 모두가 일어서며 군주처럼 맞이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많은 대가들은 화가를 교양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뒤러는 북유럽에서 그일을 홀로 완수했다.
당연,뒤러가 죽으면서 독일 미술은 침체의 늪으로 빠졌다.

당시 판화는 인쇄 홍보물 같은 거였다.
유명 그림은 목판,동판,에칭으로 찍어져 유럽 각지에 전파되었다.
라파엘로의 '요정 갈랄테아'가 유명해진 것도 판화로 찍어 대중화되었기 때문이다.

뒤러는 뛰어난 판화가였다.
그는 판화의 효용성을 알고있었다.
판화를 통해 유럽 각지에 자신을 알렸고 돈도 벌었다.
그래서 당시 화가는 곧 판화가 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뤼네발트는 판화를 기피했다.
이는 그가 쉽게 잊혀진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시류에 벗어난 인물이였다.

그뤼네발트는 한때 궁정화가에 마인츠 소속 대주교 밑에도 있었다.
평생 종교화만 그렸다.
경제적인 문제로 가톨릭에 기대어 살았지만 말년에는 루터 종교 개혁의 신봉자가 되었다.
결국 1525년 농민반란에 동조했다.
프로테스탄트의 도시로 부상한 프랑크푸르트와 할레에서 생애 마지막 2년을 보냈다.
할레에서는 시의 상수도공사를 감독했다.

힌데민트(1895~1963)와 그뤼네발트,,,
그의 극적인 삶과 표현 화법은 표현주의자 힌데민트에 음악적 영감을 주었다.
둘은 사유,예술적 성향에서 어떤 맥이 흐른다.
힌데민트에 예술은 삶의 반영이어야했다.
작곡가를 사회적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장인으로 보기도했다.
거의 모든 악기를 다룰 줄 알았는데 덕택에 사실적인 작곡을 할 수 있었다.

교향곡 '화가 마티스',,,,
아니 '화가 그뤼네발트'는 4악장이 아니라 3악장이다.
힌데민트는 1악장 '천사의 합주',,,2악장 '매장',,,3악장 '성 안토니우스의 시련',,,이리 악장마다 표제를 달았다.

그는 교향곡을 쓰기 4년 전에는 그뤼네발트를 주인공으로 오페라 대본까지 썼다.
오페라 대본를 썼다는 건 음악적으로 그뤼네발트 삶을 얘기했다는 게다.
삶에 관심은 존경의 표현이고.

오페라 예고편이라 할 교향곡 '화가 마티스'는 1933년 BBC방송을 통해 직접 초연했다.
이듬해엔 베를린 필의  푸르트 벵글러의 지휘로 독일에서 연주됐다.
이후 는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힌데민트는 지휘자 부르너 발터,멘델스존 처럼 나치에 탄압받은 음악가이다.
나치의 시선에도 푸르트 벵글러는 1934년 독일 초연을 지휘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였고,나치 문화성은 곧 공연을 금지시켰다.
게다가 푸르트벵글러로의 지휘봉을 빼았았다.
이때 그를 도와 다시 단상에 서게한 인물이 바로 토스카니니다.
토스카니도 이탈리아 무소리니에 저항 결국 미국으로 떠났다.

독일 미술의 표현주의 작가들이 그리되었듯,
힌데민트는 '문화 혁명론자', '정신적 비(非)아리아인'이라며 축축되었던 것이다.






힌데미트 - 교향곡 "화가 마티스" 
Hindemith - Symphony "Mathis der Maler"
 
Paul Hindemith (1895∼1963)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Berliner Philharmoniker
1957/11 Stereo
Grünewaldkirche, Berlin
EMI


전악장 연속 듣기
 
I. Engelkonzert   09'06
  
II. Grablegung   04'41
  
III. Versuchung des heiligen Antonius  13'23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wrtour
    '09.11.28 12:55 AM

    한동안 힌데민트 교향곡 는 20세기초 그 마티스인줄 알았습니다.
    한참 있다,마티스는 그가 아니라 400년 앞선 르네상스 시기 북유럽 화가인 마티스 그뤼네발트임을 알았구요.
    최근 이방에서 관련 얘기가 오가면서 정리에 대한 필요성에서 입니다.

    지난 토~일요일 등산 포기하고 방콕한 글인데,
    주중을 거치다 보니 사족만 더 붙고 말았습니다.

  • 2. 변인주
    '09.11.29 12:23 AM

    힌데미트곡들은 나이들어서 들으니 더 맘에 다가옵니다. 게다가 이렇게 주석까지 달아주시니.....

    내막을 알면 알수록 대단한 작곡가예요. 음역을 넘고 화성악을 무시하는데도 힘이 있습니다.

    그뤼네발트임의 유화는 여기서 찔끔 저기서 찔끔 봤는데 정릴해주시니 머리에 쏙 들어오는구만요.

    그런데, 그림이 있는방이 창이 많아 그림손상이 염려됨 (오지랍!)

  • 3. 하늘재
    '09.11.29 9:51 AM

    힌데민트와 그뤼네발트!!
    400년의 시간도 사유체계가 비슷하면 간극이 느껴지지 않나 봅니다,,,
    아마 영혼이 닮아서 이겠죠?ㅎ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제단화에 저리 많은 이야기들이 내재해 있었군요,,,
    스쳐 지나 갔었거든요,,
    절규 하는듯한 손가락 모양하며,뒤틀린 발가락에서 전률이 느껴지네요,,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소름이 돋기 까지,,,,,
    신성이 내재 되어 있는 기존의 제단화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말이지요 ~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이해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찬탄하며 읽었습니다,
    힌데민트와 그뤼네발트,그리고 뒤러와 종교개혁...
    제단화 하나에 이리 방대한 연결고리를 찿아내어 이야기 해 주시는 Wrtour님의 역량에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근데 아무리 봐도 뒤러는 참 잘 생긴 꽃미남 이었군요~~~ㅎ
    과장이 되어있겠지만요,,,,ㅎ

  • 4. 들꽃
    '09.11.29 9:18 PM

    이젠하임 제단화 잘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과 서로 비교 설명 잘해주셔서
    제가 이해하기가 쉬웠어요.

    등산까지 포기하시고 쓰신 글이라니 더욱 고맙습니다.

    어쩜 이리도 해박하신 지식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wrtour덕분에
    그림에 음악에 세계사에까지 많은걸 배우게 되네요^^

  • 5. wrtour
    '09.11.30 11:26 PM

    변인주님~~^^
    그렇쵸,
    음악이 왠지 불안하고 우울을 느끼게 하는 불협화음~~
    하나하나 멘트에 느낌이 새롭답니다.
    /그림이 있는방이 창이 많아 그림손상이 염려됨 /,,,,이게 무슨 말씀??
    늘 감사하구요.

    하늘재님~~^^
    아고,댓글로 요약을 다하셨네요.
    글 검을걸이가 넘 경쾌하구요.ㅎㅎ

    들꽃님~~^^
    세상 그 어는 것도 아름답게 보야주지 않으면 아름다운것 없어요
    들꽃님 마음이 그러하실거여요~
    늘 감사~~~~

  • 6. 변인주
    '09.12.1 7:03 AM

    녜, 첫째그림과 둘째 사진의 이젠하임 제단화가 놓여 있는 방, 오른쪽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을 염려한 오지랍입니다. 저만 느꼈나요?

  • 7. wrtour
    '09.12.3 1:05 AM

    아~~
    지 생각입니다.
    빛에 대한 대비책은 있지않았을까요.^^

    그런데,
    음악에서 정격음악이 그러듯~
    재단화란게 빛하고는 불가분한지라 감상자 입장에선 빛이 꼭~~
    로마 바실리카를 이용한 초기 중세 교회부터,
    스테인드 그라스의 로마네스크,
    노트르담 성당 등처럼 높은 첨탑의 고딕 양식,
    그리고 르네상스 양식에 이르기 까지~
    교회의 건축 양식이 내리 비취는 채광창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된 사항이고~

    당연 재단화는 채광창에서의 빛의 효과를 고려했을거구요~
    이제하임 재단화도 그런 관점에서 그려졌으니 관람 효과도 빛이 들어왔을 때 최적일거구~
    이제하임 재단화 핵심인 '십자가 책형'도 자세히 보면
    배경은 칠흑이고 전경은 강한 광선이 정면으로 내리비치거든요.

    예를 들면,
    다빈치의 은 수도원 식당에 2층높이의 정면에 그려진 것인데
    양 옆으로 2층 채광창이 줄줄이 그것도 크게 나있거든요.
    수도승들이 식사중 빛을 받아 더욱 돋보이는 최후의 만찬을 보면 느낌이 특별했을거여요.
    다빈치는 당연 그런 효과를 노렸을 거구.

  • 8. 변인주
    '09.12.3 2:30 AM

    wrtour님의 댓글에
    다시 올라가
    금발머리에 마티스(H. Matisse)풍 드레스를 입은 여자분곁에 앉아 음악과함께 그림을 봅니다.
    언젠가는 재단화와 만날 수 있는 시절인연을 꿈꾸며......

    82덕분에 참 많이 배웁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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