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이 혹시 우울증이 아니야? 이렇게 의심이 갈 정도로 눈의 피로가 함께 시작한
마음속의 무기력이 상당히 오래 가서 힘이 들었습니다.
눈의 피로가 집중을 흐트리고,그것으로 인해서 하루 하루가 뭔가 제대로 살지 못하고 마지 못해서
살아내는 기분으로 지내는 것은 제겐 참 낯선 경험이었거든요.
그러다가 어느 날 대화도서관에서 갑자기 눈길을 끄는 제목의 소설을 만났습니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지만 누구인지 가물가물한 이름,샤라쿠
그래서 책을 빼들고 읽어보니 우키요에 화가인데,딱 일년정도 활동을 맹렬히 하고 갑자기 자취를 감춘
인물이라고요,그리고 그의 그림이 고흐나 로트랙에게 강렬한 영향을 준 화가이기도 하고
일본에서 잊혀졌으나 독일인 우키요에 전문가가 세계 3대 초상화가로 벨라스케스에 견줄만한 화가라고
칭송하자 갑자기 일본으로 역수입되어 연구되기 시작한 화가라는 소개글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소설을 쓴 작가가 우키요에 연구가이기도 하고 이 소설이 그의 첫 소설이나 에드가와 란포상
수상작이라고 하니 흥미가 생겨서 빌려 읽었지요.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동네 서점에 갔습니다.역시나 가물가물하던 기억이 되살아나서 두 권의 책을
그 자리에 앉아서 조금 읽으면서 비교해보니 둘 다 팩션이지만 색 샤라쿠가 에도에서의 샤라쿠,즉 신윤복과
그가 일하던 일종의 출판사인 타츠야,그 곳에서 함께 일하던 호쿠사이의 젊은 시절등을 엿볼 수 있고
서술의 탄탄함이 더 와닿아서 색 샤라쿠를 사들고 들어왔습니다.
어제까지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역시 내겐 마음속의 혼란이 있거나 무력증에 빠지게 되었을 때
나를 일으켜세우는 것은 소설의 힘이 크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지요.
그런 점에서 소설가들에게 경의를 ! 하는 마음이 절로 생겼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저절로 우키요에에 손이 갔으나 정작 찾으려던 샤라쿠의 그림을 구해서 보긴 어렵네요,.
덕분에 호쿠사이의 그림을 찾아서 보고 있습니다.


첫 그림은 눈에 설어도 두 번째 그림은 아하 소리가 절로 나오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군요.
소설속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샤라쿠로 개명한 신윤복이 에도에서 목판화로 같은 그림이 여러 장
팔리는 것을 보면서 그림의 유일성이 무너지는 것을 마음아파하면서도 동시에 동네 조무라기들도
용돈을 아껴서 그림을 사러 오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가부키좌에서 공연하는 배우들의 특징을 잡아서 그린 그림이나 게이샤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들이
팔려나가게 되는 배경에는 조닌문화라고 해서 무사들보다 계급은 아래지만 상업으로 부를 이룬 계층들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는데 시대를 바꾸게 되는 상공업의 힘이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단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부를 이루고 자신들에게도 정치적인 영향력,신분의 속박을 벗어나고 싶은 열망이 있던
그 계층이 일단 지배층이 되고 나면 그 아래의 계층이 자신들과 함께 누리고 싶은 권리를 갖으려고 하는
운동에 적대적이 된다는 점인데요,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고 (되지 않는다는 말로는 모자라겠지요?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점점 더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의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점이기도 합니다.


이 판화의 제목을 읽어보니 요시츠네가 말을 씻었던 폭포라고 되어 있네요.
요시츠네는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사람의 이복형제인데 나중에 둘 사이의 의견차이로 결국 형에게
살해당한 인물인데요,NHK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대하역사극을 방영한 덕분에 그 사람과 그 시대에
대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덕분에 가마쿠라 막부가 세워지기까지의 역사를 읽을 때 현장감있게 접근할 수 있어서 신기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두 권의 소설로 우키요에에 대한 관심이 생겼으니 이번에는 이론서를 조금 더 볼 수 있을 것 같고
그 시기의 조선,그리고 일본의 교류 특히 문화적인 교류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을까에 대한 연구기록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습니다.
그러니 제겐 역시 소설은 힘이 세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아침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