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오전에 파워 오브 아트를 읽는 시간,오늘로 두 번째 렘브란트를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베르니니 끝나고 약간 남은 시간에 맛보기로 읽은 것이라 그림을 다시 찾아서 볼 만큼
유혹을 느낀 시간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읽게 된 오늘은 책에는 설명으로만 나왔지만
사실 도판을 보면 이해가 빠를 그림들이 몇 점 있어서 찾아보고 싶어집니다.
인터넷을 켜고 요즘 새로 해야 될 일중의 하나가 보람이의 싸이월드에 들어가서 글을 검색하는 것인데
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 이래 가장 자주,그리고 많이 글을 주고 받고 있는 셈이로군요.
혹시나 해서 영어로 글을 써보라고 권했는데 의외로 선선히 그렇게 글을 보내고 있더군요.
아무래도 영어를 쓰는 환경이라 그럴 수도 있고,한 번 시작허고 나니 계속 조금은 글도 길어지고
내용에 문법적인 실수도 덜한 글을 받아보고 있자니 신기한 생각이 드는군요.
일본어나 불어에 비해서 영어를 즐기지 않아서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한 고비를 넘기려나
하는 생각도 들고,딸의 일상을 곁에서 살 때보다 더 자세히 듣는 일이 재미있기도 해서
사는 동안 인생에서 새롭다고 느끼는 일들을 얼마나 더 경험하면서 살게 될 것인가 궁금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군요.

우리에게 야경꾼이란 잘못된 제목으로 알려진 집단 초상화 이전에도 렘브란트의 명성을 알린
집단 초상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위의 그림인데요 툴프 교수의 해부학 시간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해부장면보다도 제겐 이 사람들의 표정으로 인해서 더 기억에 남아 있는 작품인데요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는 군의관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다른 책에서 보니 상인들이 당시에 해부학 교실에
들어가 청강을 하거나,아니면 그림속에 자신들이 그 장면을 보고 있는 참여자로 집단 초상화를 그렸다는
일화도 있어서 어느 것이 더 맞는 설명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림속의 성취겠지요?
서로 다른 시선의 ,다른 표정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화가가 빛과 그림자로 표현한 현장에 함께
참여하는 기분으로 바라보는 그림 감상의 시간,그것이 제겐 더 중요한 느낌이네요.

메노나이트파 목사가 아내와 대화하는 장면인데요,책에서 저자는 이런 류의 그림에서 남녀관계가
마치 상하의 서열을 보여주는 것처럼 대화라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목사가 그의 아내에게 말을 하고
그녀는 다소곳이 듣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그가 사스키아를 (그의 아내) 그린 그림을 보면
그런 틀을 벗어난 파격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고 여러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고 있더군요.

뒷시간에 반룬의 역사를 읽다가 재미있으면서도 찔리는 대목을 만났습니다.
관용이란 사실은 먼 곳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겐 보여주기 쉬우나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이야기였는데요,이 그림을 보다가 보니
평등한 관계란 말은 아름답지만 현실에서 실천하면서 사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림과 말이 오버랩되면서 생각을 하게 되는군요.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장면중에 실내에서 모자를 쓴 남자들에게 주목하게 됩니다.한 명만 빼고는
모조리 모자를 쓰고 있네요.베르메르의 모자를 읽고 나서 그림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는군요.
그림자체도 그렇지만 그림안에서 만나는 소품들을 통해 그 시대를 느껴보려는 시도라고 할까요?

야경꾼이란 제목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화승총 부대의 출전장면을 그린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사실은 이 그림속의 주인공들은 시민들이고,시민들은 실제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용병을 고용했지
실전에 참여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다만 나라가 위태로울 때 우리도 참전할 수 있다는 기상을 그린 것이라고
하는데요,이 그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읽으니 그림보기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혼자서 보는 그림도 좋지만 ,이렇게 자세한 설명을 읽은 다음,찬찬히 다시 보는 그림보기도
역시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설명에만 사로잡혀서 내 생각을 넓히지 못하는 것도 곤란하지만 내가 보는 것으로 끝난다도 역시 아니니
두 가지 사이의 조화가 필요한 것이겠지요?

검정색 옷을 입은 바닝 코트 옆에 우리쪽에서 보자면 왼쪽에 투구만 보이는 인물이 있습니다.그가 총을 겨냥하고
있는데 만약 쏜 상태라면 사단이 났겠지요?
그러니 이 그림은 실제 상황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하는 네덜란드에 대한 감정을 극화한 내용이라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 관습을 뒤집어서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냈는가를 조목조목 저자가 책에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집단초상화라면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만을 그것도 나란히 고르게 배열해던 것에 비해서
렘브란트는 그런 구성을 파괴하고,거기에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노란 옷의 여인을 등장시킵니다.
이것이 이 그림에서의 최대의 파격이겠지요?

이렇게 그림을 보고 있으니 언젠가 서울에서 렘브란트의 그림만을 모아서 전시가 열리는 어떨까
공연히 공상에 돌입하게 되는군요.이제까지 렘브란트의 이름을 살짝 도용한 이상한 형태의 전시에
속아서 마음 아팠던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그런 fake가 아니라 진짜 렘브란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전시,마음속으로 꿈꾸는 사람들이 많으면 언젠가 그런 전시가 열려서 마음 설레면서 보러 가는
날을 기대하게 되는 오후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