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철학수업에 가는 길에 이화익 갤러리앞을 지났습니다.
어라,어디서 본 그림이네 하고 들여다보니 화가 김동유의 개인전을 알리는 포스터에 체게바라의 얼굴이
망점으로 찍혀 있네요.
이 화가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책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서 눈에 띄었습니다.
그렇다면 철학수업끝나고 내려오는 길에 들려야지 하고 기억속에 담아두고 조금 더 걸어올라가니
이번에는 아라리오 미술관앞에 다른 전시를 알리는 안내가 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화가이지만 역시 독특하다 싶어서 오늘은 이 두 전시장에 가보겠노라 마음을 먹었지요.
철학시간,사르트르에서 시작하여 러셀에 이르기까지 알듯 모를듯 복잡한 개념의 철학자들 이야기로
머릿속이 어수선하지만
그래도 좋은 보조자료를 만난 덕분에 이해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혹시 현대철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지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몰라 진입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면 강력추천할 수 있는 책이랍니다.
오늘은 바쁘다고 점심을 함께 하지 못하고 가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뒤 현승혜씨랑 둘이서 점심을 먹고
전시장에 함께 갔지요.
마침 그녀도 걸어오는 길에 김동유의 전시를 눈여겨보고 가보고 싶다고 생각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혼자서 미술관에 들어가는 일이 아직 익숙치 않아서 어쩔까 고민하던 중이었던 모양입니다.
아리리오에 먼저 갔는데요,너무 특이한 작품이라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미술관이 준비한 자료를 읽어보면서 아하 그래서 하고 다시 작품에 몰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술관이 준비한 설명인데요
한 번 읽어보고 나면 이 전시회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아서 옮겨놓습니다.
2009년 5월 26일부터 6월 21일까지 아라리오 서울 갤러리에서 켄트 헨릭슨의 첫 국내 개인전을 개최한다. 실크 스크린으로 인쇄된 린넨에 디지털 자수를 놓아 액자에 틀을 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제작된 그의 신작 15여 점과 조각 5여 점, 그리고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벽지가 설치된다. 현재 뉴욕에서 거주하며 도쿄, 토리노와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헨릭슨은 현대 사회의 딜레마와 문제점들을 전통적인 이미지와 매체로 풀어내는 연구 중에 있다.
켄트 헨릭슨이 직접 제작한 벽지 위에 걸린 작품들에게서 받게 되는 첫 느낌은 중세 시대 귀족 집안의 한 방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평화롭고 목가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액자 틀을 들여다보면 중세의 명화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작품들에게서 받았던 첫인상을 잠시 접어둔 채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림 안에 등장하는 만화와 같은, 얼핏 귀여워 보이기도 한 캐릭터들의 모습 때문이다. 부르주아계급 가정의 벽지나 소파커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온한 초원의 풍경이나 화려한 패턴이 인쇄된 배경 속에 후드와 마스크를 뒤집어 쓰고 관객을 위협하듯 날카로운 흉기를 휘두르고 있는 이들이 있다.
관객들은 켄트의 화면에 등장하는 마스크를 쓴 캐릭터를 보면서 강도, 암살, 테러와 같은 폭력과 관계된 온갖 단어들을 떠올린다. 이는 인류가 겪어오고 있는 폭력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켄트는 1970년대 스리랑카의 자살폭탄 테러집단인 타밀 호랑이(Tamil Tigers of Sri Lanka) 의 마스크 유니폼에서 처음 영감을 받았다. 이 단체는 후드와 눈 부위만 커다랗게 오려진 마스크를 쓰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투쟁하던 집단이다. 스리랑카 호랑이들의 마스크를 조금 변형시켜 흰색 실로 마스크를 자수 놓은 후 두 눈 구멍을 따로 오려내고 나니 KKK의 모습이 되었고, 여기서 조금 더 변형시켜 입 부분도 오려내니 스키 마스크를 뒤집어 쓴 구멍가게 좀도둑의 모습이 되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헨릭슨은 마스크의 구멍의 위치에 따라서 캐릭터의 아이덴티티가 변형됨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후드의 색감이나 구멍 사이로 비치는 피부의 색깔을 변형시켜 폭력과 충돌은 모든 문화와 사회에 존재함을 나타낸다.
켄트는 마스크를 쓴 캐릭터들이 상징하는 폭력과 파괴력을 자수라고 하는 지극히 여성적이고 가정적인 매체로 재탄생 시킨다. 전쟁, 테러, 강간과 같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허위의 유토피아의 풍경을 아름답게 수놓은 천에 새김으로써 작업의 아이러니가 완성된다. 교수형에 처하거나 악마에게 먹히거나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을 당하는 등의 모습을 섬세하고 화려하며 우리에게 너무나 친근한 자수라는 방식으로 제작함으로써, 이러한 공포들이 우리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 때 우리가 얼마나 수동적이고 무책임하게 되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끔 한다.
그림속 이미지들을 보고 있으려니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무감각하게 지나가는 것들속에 들어있는
폭력과 공포가 얼마나 뿌리 깊을 수 있는 것인가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화가는 그런 것을 환기시키기 위한 장치로 여러가지를 보여주고 있었는데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여기저기
등장하는 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습니다.
둘이서 작품을 보다가 서로 느끼는 점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고민하기도 하다가
이층에 올라가서 데스크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질문을 하기도 하다보니 벌써 전시가 끝났네요.

인물의 병치를 통해서 사람을 표현하는 방식과 유명한 그림을 구겨서 새롭게 보도록 만드는 것
두 가지 방법으로 작업을 한 작가의 그림들을 만났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오드리 헵번의 얼굴이 다 다르더군요.
사실 우리가 누구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늘 같은 것은 아니지요,한 사람을 구성하는 다양함에 대해서
작가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철학시간의 논의와도 맥락이 닿아서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구겨서 그린 것은 왜 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성시하는 것들이 과연 지금의 맥락에서도 그런 것일까?
이름때문에 매달려서 실제를 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아니면 그것이 당시에는 중요한 것이라고 해도
지금 우리와 무슨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일까,그러니 한 번 더 물러서서 생각해보라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림들을 보고 나니 이제야 일상으로 돌아오는 힘이 생겼구나 하는
실감이 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