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에는 바람의 소리가 구석구석 들린다.
귀가 밝아지기 때문이 아니라 바람이 맑아지기 때문이다.
바람이 숲을 흔들 때, 소리를 내고 있는 쪽이 바람인지 숲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이런 분별은 대체로 무가치하다.
그것을 굳이 분별하지 않은 채로, 사람들은 바람이 숲을 흔드는 소리를 바람소리라고 한다.
바람소리는 바람의 소리가 아니라, 바람이 세상을 스치는 소리다.
맑은 가을날, 소리를 낼 수 없는 이 세상의 사물들이 바람에 스치어 소리를 낸다.
그 난해한 소리를 해독하려는 허영심이 나에게는 있다.
습기가 빠진 바람은 가볍게 바스락거리고 그 마른 바람이 몰려가면서 세상을 스치는 소리는 투명하다.
태풍이 몰고 오는 여름의 바람은 강과 산맥을 휩쓸고 가지만,
그 압도적인 바람은 세상의 깊이를 드러내지 못한다.
바람 부는 가을날, 모든 잎맥이 바람에 스쳐서 떨릴 때,
나는 내 몸 속의 바람을 가을의 바람에 포개며 스스로 풍화를 예비한다.
김훈........두 번째 [밥벌이의 지겨움] 중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