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몸은 상태가 이상하지만 지난 주에도 석가 탄신일이라서 수업을 쉬었기 때문에 또 휴강을 하기엔 곤란하더군요.
그래서 몸이 이상하면 혼자서 집으로 들어오면 되니까 하는 마음을 먹고 수업을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마리포사님이
축의 시대를 제게 건네주네요. 아, 휴머니스트에서 이번에 번역이 나온 모양이구나, 두꺼워 보이는데 마침 그 책의 원서를 사서
읽는 중이라 아주 해석이 까다로운 부분은 도움을 받을 수 있겠네 이렇게 고마운 마음으로 선물받는 모드로 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제가 오래 전 사서 읽은 책이고 그녀가 빌려갔다가 반납하는 것이라고요.아이쿠 이럴 수가
순간 마음속에 묘한 느낌이 스멀스멀합니다. 본인이 사서 읽은 책도 기억 못하고, 원서 읽으면서 어라 이제는 웬만한 내용은
여기저기서 읽은 덕분인가, 책이 왜 이렇게 낯익지? 아무래도 그녀의 다른 책 신의 역사를 다 읽어서 그런가?
혼자서 별 별 상상을 다 하면서 읽던 시간이 기억나서 얼굴이 다 달아오르더라고요.
제가 너무나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자 다른 사람들은 위로를 해주느라 그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화가나 작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수준하고는 다른 문제가 발생한 셈이지요. 제겐
통째로 그 책을 사서 읽은 기억마저 잊고는 주인에게 돌아온 책을 선물로 착각하는 지경이라니 이상하게 몸이 아파서
그런지 그 일이 불어 수업 하는 내내 불쑥 불쑥 머릿속을 어지럽히더라고요.
그건 그렇다고 치고, 불어 수업에서 오늘부터 빈회의 이후의 유럽 역사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책은 새로운 어휘로 머릿속이 폭풍을 만난 격이지만 그렇게 한참 지나다보면 주제의 일관성으로 인해
조금은 익숙해지는 표현이 생기게 마련이지요. 공부를 하다가 다른 이야기로 새다가 다시 돌아오면서 이어지는 이 수업의 묘미는
참 놀랍습니다. 그래서 어렵지만 도망가지 않고 찬찬히 오래 계속하게 되는지도 몰라요.
오늘 감사한 일은 조르바님이 도서관에 걸어놓은 그녀의 그림, 이제는 계절에 맞는 그림으로 바꾸어 걸라고 산뜻한 풍광을 담은
그림을 한 점 더 선물해주신 점입니다. 그렇게까지 세심하게 마음쓰기 쉽지 않으련만 역시 공간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이런 기분좋은 선물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닐까 싶어서 만났을 때도 감사 인사를 드렸지만 글을 쓰고 있는 중에
다시 감사 인사를 하게 되네요. 조르바님, 정말 고맙습니다.
병원에 다녀와서 조금 쉬다가 기타소리와 더불어 바라보고 있는 그림은 모네입니다.
제겐 심경의 변화, 혹은 축하하고 싶은 날, 나를 격려하고 싶은 날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화가가 모네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오늘은 감사의 마음과 자신의 기억력에 자신이 없어져서 당황하고 있는 제 자신에게 격려를 담아서 골랐지요.
앞으로 이런 놀라운 상황이 조금은 더 빈번하게 일어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한 기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으면서 살아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