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공연장에 다녀왔습니다.
spring in my heart라는 부제로 브람스와 드보르작의
연주를 들었지요.
아무래도 교향곡을 집에서 제대로 듣기는 어려운지라
이렇게 무대에서 공연되는 교향곡을 듣게 되면
집에서와는 전혀 다른 곡을 듣고 있는 기분이 됩니다.
더구나 이층에서 내려다보는 자리에서 오케스트라의 배열
언제 어떤 악기가 연주되고 어떤 악기가 쉬는가
단원들의 표정,지휘자의 모습을 동시에 보면서 음을
듣는 일은 그 곡에 생명을 불어넣어
종이위의 음표에 불과하던 것들이 살아서 음악을 이루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지요.
덕분에 오늘 아침,이제 어린아이들이 없어서
어린이날이 그냥 휴일이 된 집에서
조용하게 브람스의 음악,어제 연주장에서 들은 음악을
블로그에서 찾아서 다시 들어보고 있습니다.
아 여기는 바로 그 곳이네 하는 감흥이 일어서
재미있습니다,음에 귀가 열리고 있는 중이라고 할까요?
음악과 더불어 찾아보는 화가는 역시 세잔입니다.
지난번부터 읽고 있는 조광제님의 책에서 다루고 있는 세잔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머릿속에 화가 세잔이 남아 있어서요,


제목을 보니 닥터 가세의 집이라고 되어 있네요.
닥터 가쉐라면 고흐의 생애 마지막 기간에 그를 돌보았던
의사인데 고흐의 작품에 가쉐의 초상화도 있고
그의 딸을 좋아해서 피아노 치는 그녀를 그린 것도 있었는데
세잔도 그를 알고 지냈나봅니다.
같은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서로 인연을 맺고
살면서 영향을 주고 받고 상처도 주고 받고
새로운 그림세계를 열기도 했던 그 시기,갑자기 지나간 그
시기를 연상하게 되는군요.

살인의 해석에서도 주인공 영거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다가 하는 대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책 이후로 다시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그런 만남이 있다는 것을 (아주 드물지만) 느낍니다.
그 만남이후로 나는 그 이전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어떤 때는 그것이 긍정적인 것일 수 있고
어떤 때는 부정적이어서 피흘리는 경험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그래도 어느 하나 버리기 어려운 ,그래서 안고 살아가야 하는
그런 경험들의 축적이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


위 작품을 위한 습작입니다.
물른 이 한 점의 스케치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릇에 담긴 사과 한 개 한 개의 색이 얼마나 다른지
눈길이 오래 오래 머뭅니다.
사과뿐만이 아니라 배경색에도 다른 형태에도 시선을 주다보니
오늘은 이 그림까지로 충분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베토벤의 교향곡처럼 전원교향곡이란 부제가 붙은
브람스의 교향곡 2번도 클라이맥스에 올라서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막 조율을 끝낸 피아노,
우리집의 피아노가 이렇게 소리가 좋았었나 놀라고
기뻐서 요즘 자주 피아노를 치게 되는데
남의 소리만 듣지 말고 우리 집 피아노를 치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