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으면 모여서 시골에서 살지 않겠느냐고요.
시골요? 일산도 시골이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리고 저는
교보문고에서 더 멀어지면 곤란해서 시골에서 사는 일은 어려울 것 같아요.
교보문고에 갈 때마다 이번에는 어떤 새로운 책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하곤 하지요.
오늘은 일찍 나서서 경복궁을 한바퀴 둘러보고 제가 좋아하는 탑앞에서 오랫만에 인사를 나누고
갤러리 현대에 먼저 갔었습니다.
기억이 잘 못 되었는지 그곳에서 김종영의 조각전을 하는 줄 알고 갔는데
이왈종의 전시가 있더군요.
그래도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 기억속의 이왈종과는 달리 이미 서귀포에서 보내는 시간동안 작품경향이 많이 달라져서
놀랍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한 시간을 보냈지요.
좋아하는 색깔을 많이 만났고 이미 캔버스를 벗어나 다양한 시도를 하는
작가를 보는 기쁨도 느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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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와서 낮의 기쁨을 되돌려보느라 이왈종의 그림을 찾아보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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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원화를 보고 온 날에는 이렇게 스크린상에서 보는 그림의 맛은 훨씬 덜 하네요.
그의 전시를 못 본 사람들과 함께 나누려고 몇 점 더 찾아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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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중의 하나가 바로 아,대한민국 시리즈인데요
월드컵때의 레드의 물결을 나름대로 캔버스에 담은 것입니다.
우리가 레드 컴플렉스에 시달린 민족이었다는 사실을 말끔히 날렸던 시기의 감격
다시 캔버스에서 보고 있으려니 이제는 지나간 꿈이 되어버린 그 시절이 생각나네요.
삶에서 아주 가끔이라도 그런 순간적인 축제의 공간이 주어지고
모르는 사람들사이에 흐르는 공감이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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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을 둘러본 다음 갤러리의 숍에 들어가보았습니다.
눈에 띄는 그림이 있으면 마음에 담아두려고요.
서세옥의 그림이 있어서 값을 물어보니 700만원이라고 하더군요.
아니 포스터나 프린트된 그림은 없나요?
이제는 그런 그림은 취급을 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서세옥은 제가 좋아하는 화가라 그림이 좋아서 그 앞을 왔다갔다 했지만
정말 그림의 떡이란 말이 딱 들어맞은 순간이었습니다.
교보문고에 가면 순서대로 책을 보지요.
새로 나온 책이 무엇인가,사서 읽어야 할 책,빌려도 좋은 책
지금 당장은 읽을 수 없지만 언젠가는 꼭 읽어야 할 책순으로 메모하면서 보기도 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책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기도 하고요.
메모를 다 마치고 오늘 사고 싶은 책 두 권을 골라서 (책 한 권 들고 파리를 가다.생각하는 그림들)
계산을 마친 다음 외국어 서적부로 갔습니다.
그 곳에 가면 우선 소설중에서 읽고 싶으나 번역이 되지 않은 책을 눈여겨 봅니다.
오늘 눈에 띈 작품은 트레이시 슈발리에라고 진주 귀걸이 소녀의 작가인데요
falling angels를 읽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곤 새로 나온 화집을 봅니다.
예전에 비해서 얼마나 다양한 화집이 나오는지 정말 고맙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이지요.
오늘은 winslow homer의 수채화집과 처음 보는 화가 sean scully(그는 아일랜드 태생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현재 생존하고 있는 추상 표현주의 화가이더군요)의 그림에 매혹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화집을 선 채로 다 보고 나서 매대에서 팔고 있는 타센 출판사의 책들을 보았지요.
마침 마크 로스코의 화집도 있어서 보았고
클레의 그림도 보았습니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느낌이 절로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일부러 지하철을 타고 들고 나간 스페인 기행기를 보는데
가우디와 피카소, 후앙 미로 그리고 카잘스의 도시 바르셀로나에 대한 소개와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을 소개한 시인 김혜순의 글솜씨가 매력적이어서
스페인을 마음에 품고 들어오는 길
마치 짧은 휴가중에 망중한을 즐긴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오후에 시작한 수업이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 끝나는 날이라 몸은 참 피곤한데
오전 시간의 행복함이 이어져서 일까요?
sean scully를 조금만 더 보고 자야 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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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림을 보는가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색과 빛을 보고 싶어서라는 대답이지요.
오늘 책방에 서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좋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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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생활은 돈이 많이 들어서 곤란하다는 고정관념을 만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조금만 신경을 쓰면 거의 무료로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있지요.
교보문고에 가서 음반점에 들어가면 꼭 사지 않아도 들어볼 수 있는 음반이 무지하게 많고
화집도 다양하게 ,게다가 아주 질이 좋은 인쇄상태로 즐길 수 있습니다.
음악회라면 표가 비싸다고 하지만
갤러리는 무료로 혹은 거의 부담이 없는 표값으로 볼 수 있는 그림들이 많고요.
결국은 관심의 문제인데 혼자서 시작하기 어려우면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관심이 가는 전시회를 찾아가는 발걸음을 한 번만 시작할 수 있다면
그 다음에는 평생을 즐길 수 있는 길이 열리는 놀라움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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