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상(喪)가가 있었다.
분당 집에 들려 옷 갈아입고 가려고 조퇴했다. 생각보다 빨리 집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집은 어수선하다.
개수대엔 그릇이 쌓여 있고 거실 탁자, 식탁, 책상 가리지 않고 여기 저기 컵들이 저마다의 흔적을 담은 채 늘어져 있다. 식구 숫자와 상관없이 있는 대로 쓰이는 게 컵인 듯하다. 다섯 개면 다섯 개 다 돌아다니고, 열이면 열 개 다 써야 설거지 하는 게 컵이란 물건이지 싶다.
집안 정리할 때 나는 설거지부터 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일단 설거지 하며 손에 물을 묻혀야 기꺼이 청소기 돌리고 걸레질 할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설거지 하는데 밥솥은 깨끗이 씻겨 있다. ‘밥은 언제 해 먹은 거야?’ 냉장고 열어보니 찬밥 한 덩이 있다. 급히 쌀 씻어 밥부터 앉혔다. 혹 입맛 없으면 먹으라고 쌀 위에 감자 세 개 같이 앉혔다. 국거리 찾으니 시금치 눈에 띈다. ‘시금치 국 끓여야겠다.’ 냄비에 물부터 앉히고 시금치 헹궈 넣었다.
압력밥솥 돌기 시작한다. 불 줄여 놓고 청소기 꺼냈다. 후다닥, 대충 청소 해 놓고 시금치 국에 된장 풀고 다진 마늘 좀 넣어 중간 불로 낮췄다.
맛이 영 밍밍하다. ‘맹물에 끓여서 그런가? 다시마라도 넣을 걸…….’ ‘시금치 우러나면 나아지겠지.’ 하며 좀 더 끓였으나 역시 국물 맛이 시원치 않다.
‘할 수 없다. 이럴 땐 조미료의 힘을 빌릴 수밖에!’ 말린 버섯 따위로 만들었다는 채식 조미료 조금 넣었다. 국물 맛이 좀 낫다. 그런데 단맛이 있다. ‘조미료는 이놈의 단맛이 꽝이다.’
아무튼 국도 끓였고 뜸 다 들어 김빠진 압력밥솥 열고 밥 한번 휘 저어 놓았다.
국에 밥 냄새에 배가 고파진다. 6시 조금 넘은 시간 애매하다. 상(喪)가 가면서 밥 먹고 가기도 그렇고 안 먹자니 아쉽고……. 국만 한 그릇 먹고 가기로 했다. 시금치 국 한 대접 떠, 혼자 훌훌 마시고 옷 갈아입고 나가려는데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우렁각시 놀이 들켰다!’
“어~ 어떻게 왔어요?”
“서울에 상가가 있어서……. 저녁은? 밥 해 놨어요. 시금치 국이랑.”
H씨 옷 갈아입는 동안, 감자 한 알 얹은 거친 밥, 시금치 국, 열무김치만으로 가난한 밥상을 차렸다.
문상 가는 길, “국이 짜다!” 문자 왔다. ‘나는 괜찮던데…….’ 나도 내 입맛을 모르겠다.
본래 입맛은 간사한 것이니, 내 솜씨가 아닌 그대와 나의 혀를 탓하시라.
키친토크
즐겁고 맛있는 우리집 밥상이야기
가난한 밥상 - 우렁각시 놀이
오후에 |
조회수 : 7,515 |
추천수 : 194
작성일 : 2010-05-24 11:3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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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미모로 애국
'10.5.24 1:22 PMH씨는 누구에용?
저희집에서도 우렁각시놀이 하러 한번만 와주십사~~~.2. elgatoazul
'10.5.24 1:51 PM오후에님 글은 하나 같이 좋네요.
컵 이야기에 맞아! 맞아! 연발하며 아주 재미나게 읽었어요.
요즘 저도 시금치국을 자주 끓이는데
의외로 끓이기는 쉬운데 맛내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바지락도 넣고 멸치 육수도 내보고 하는데 뭔가 부족한 맛이에요. ㅠㅠ3. 사과나무
'10.5.24 2:34 PM오후에 님 글읽으면 마음이 참 푸근해 집니다..
저 가난한 밥상 ..
저에게도 허락해 주시길..4. 고독은 나의 힘
'10.5.24 10:38 PM저희 집에도 좀~~
H씨도 전생에 나라를 구하신듯^^5. 오후에
'10.5.25 12:56 PM미모로 애국님 /사과나무님
감사... 아무래도 제가 식당을 차려야 두분께 밥을 대접할 듯 ㅎㅎ
엘가님 댁 컵도 있는데로 굴러다니나 보네요 ㅋㅋ
시금치국의 뭔가 부족한 맛은 아무래도 된장 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2% 부족한 맛에 익숙해지면 그대로 괜찮지 않을까요?
고독님
마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H씨는 전생에 분명 나라를 구했거나 우리집 소였을 거라고^^ *6. 보니타
'10.5.26 2:39 AM이건 그냥 제가 하는 방법인데요 ..
미소된장과 반 섞어서 넣어보시면 좀 다른것 같은데요...
국간장도 쬐금 넣고요..이미 알고 계시는거라면 괜히 아는 척해서 죄송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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