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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토크

즐겁고 맛있는 우리집 밥상이야기

이건 내 도시락이 아니다

| 조회수 : 16,333 | 추천수 : 244
작성일 : 2010-05-19 13:03:50
이건 내 도시락이 아니다.

토요일 오후면 고등학교 2학년인 아이는 학원에 간다.
놀토인 둘째, 넷째 주야 집에서 밥을 먹지만 학교 가는 주는 도시락을 챙겨야 한다.

계란말이 밥이다. 보기도 많이 보았고 먹어도 본 것 같은데 이거 말며 욕 나올 뻔했다.
아침에 김밥을 해먹은 지난 토요일, 김밥 재료 중 남은 당근, 시금치 따위를 넣고
최대한 얇게 부친 계란 지단으로 돌돌돌 말아가는 순간.
‘근데 끝단은 어떻게 붙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나름 모양 좋게 말리긴 했으나 계란지단의 끝처리는 대략난감…….

“이걸 뭘로 붙이지? 김밥처럼 지들끼리 붙는 것도 아니고 밥풀로 할 수도 없고…….”
“파 같은 걸로 묶을까? 아니 묶은 건 별로 본 기억이 없는데…….” 하며
쪽파나 미나리 있나 냉장고 뒤지다 괜한 일거리 더 만들 것 같아 포기했다.

이럴 땐 어머니  생각이 더 난다. 비록 “썩을 놈, 니가 그걸 왜 물어!”하고 욕부터 한 자락 하셨겠지만,
아니 “손녀 먹을 거다.”했으면 눈 정도 살짝 흘기고 마셨을까.

유부는 끓는 물에 살짝 데쳐 기름기 좀 빼고 식초와 간장으로 주물주물 해 놓고
식초와 소금, 당근 따위를 섞은 밥을 채웠다.
모양은 그럭저럭 흉내를 냈는데 간장을 덜 넣었는지 유부간이 좀 심심하다.
그 순간 생각났다. ‘앗~ 유부는 내 입맛이다!’ 딸내미는 초밥은 잘 먹어도 유부는 아니다.

할 수 없이 나머지 밥은 그냥 주먹밥으로 뭉쳤다. 계란말이 밥 한줄, 유부초밥으로 또 한 줄,
주먹밥은 상추에 싸 한 줄씩 유리 반찬통에 담았다. 그럴싸하다.


담아 놓고 보니 양이 작은 것도 같고 왠지 유부는 손도 안댈 것 같고 ‘아무래도 뭘 좀 더 해야겠다.’
상추 부침개를 하기로 했다. 급히 상추 두어 장 씻어 잘게 찢어 밀가루와 버무렸다.
반죽해 놓고 보니 딱 한 장 나오겠다. 상추전은 먹기 좋게 가위로 잘라 담았다.

마실 거리로 제 어미가 만든 블루베리 즙까지 챙기니 아이 데리러 갈 시간이다.

어버이날 즈음, 술자리에서 어떤 얘기 끝에 “효라는 게 사람에게만 있는 것 같다. 동물의 왕국을 봐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새끼 챙기는 건 그냥 다 한다.” “그러게 동물이 어미 챙기는 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농경사회에서 가부장적인 질서나 이데올로기로서의 측면이 있지만 자식사랑과 다른, 사람관계에서만 볼 수 있는 고도의 뭐???인거 같다”  그때 어떤이 휴대폰으로 뭔가를 보는 듯하더니 “영어로는 duty 정도인데……. 인간의 보편적 뭐라기보다 동양적인 뭐 아닐까?” 하는 말들이 오갔다.

사랑은 아무리 내리 사랑이라지만 새끼 챙기는 건 왜 이리 신경이 더 가는지... 주말에도 동동거리며 학원가는 아이가 안쓰럽다거나 하는 이유만으론 내 도시락과 비교할 때 설명되지 않는 게 너무 많다.
그만큼 어머니가 보고 싶어진다. 아버지의 삶이 이해된다.

“엄마 미안해! 사랑해요.” “아버지 그땐 제가 어렸어요. 죄송해요.” 이 말을 나는 온전히 하지 못했다.
두 분을 위해 도시락 준비한 기억도 없다. 그래서 더 그립다.
1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순덕이엄마
    '10.5.19 2:44 PM

    이 옵하 은근 솜씨 좋으신듯^^

  • 2. 고독은 나의 힘
    '10.5.19 3:15 PM

    그러게요.. 무슨 옵하가 이렇게 솜씨가 정갈하대요!!

    같이 사시는 마눌님은 스트레스 완전 받으시던가 아니면 완전 초고수이시던가 둘중에 하나이실듯..

  • 3. T
    '10.5.19 3:58 PM - 삭제된댓글

    아무 생각없이 읽다가..
    마지막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어요.
    나도 울엄마,아빠 도시락 한번 싸드린적이 없네요.

  • 4. 가을비
    '10.5.19 9:25 PM

    인생사 새옹지마.-- 천만번 지당한 말씀.

  • 5. momo
    '10.5.19 9:44 PM

    흑~
    눈물이 났습니다.

    요리솜씨와 더불어 글솜씨도 너무 좋으셔요.

  • 6. B
    '10.5.19 9:58 PM

    솜씨가 멋있으시네요.
    아이를 키우다 보니, 자식이 뭘까? 부모는 뭘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 답은 부모는 죄인이고 자식은 기쁨인가 보다...싶은데,
    이제 백일된 아기 키우면서 할 소리는 아니네요^^;;

  • 7. 여인2
    '10.5.20 9:49 AM

    아... 정녕... 요리하는 남편 정말 멋져요~!!

  • 8. 프라하
    '10.5.20 11:20 AM

    요리하는 남편 위에도 계시더니 여기도...쩝...
    코끝이 찡...
    왜 그러죠?

  • 9. 올망졸망
    '10.5.20 11:44 AM

    술자리에서의 대화가 참 와닿습니다.
    멋지셔요~~~

  • 10. 쎄뇨라팍
    '10.5.20 2:00 PM

    완전 반성합니다 ㅠㅠ

    덕분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게 되네요

    팬카페 회원되고프네요 ㅎ

  • 11. 완이
    '10.5.20 9:51 PM

    어머 남자분? 솜씨가 뺨을 치고 갈듯하시네요~ (이게 되는 문장인감?ㅎ)
    읽다가 울컥 눈물날뻔 했잖아요.

  • 12. 페스토
    '10.5.20 11:50 PM

    영화 제목이나 소설 제목으로도 괜찮을 듯 하네요.
    이제 곧 고3이 되고 대학을 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어느 순간 뼈저리게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느꼈던 가끔은
    싫을 만큼 부담스러웠던 그 손길이 얼마나 깊은 사랑이었는지
    깨달으면서 폭풍우같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그런 행운을 누리는 자녀분처럼 저도 우리 딸을 키워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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