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태생인 저는 어렸을 때 제주에 한번 가본 적이 있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고, 스물 넘어서 제주에 갔었는데, 며칠이 지난 어느날 갑자기 제주 말이 조금씩 되더라구요. 물론 억양도요.
참 신기한 일이죠? 평소에 제주말을 사용한 적도 없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어렸을 때 우리집에 와 있던 이모와 어머니가 나누는 얘기에서 제주말을 배운 듯 합니다.
어렸을 때 들었던 그 말들이 잠재되어 있다가, 제주말만 쓰는 동네에 오니까 툭 터졌는지 ...
그 이후로는 제주에 갈 때마다 의식적으로 제주말을 사용하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본토(?) 사람만은 못하겠지만, 억양이 제대로 되어서인지, 지금은 어디 가서 서울 사람 취급은 안받습니다.
보통, 제주말을 전혀 딴나라 말처럼 생각하는데("일본말 같다" "어원이 다른것 같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건 제주말을 전혀 모르는 소립니다.), 알고보면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습니다. 말 맛도 상당히 좋구요.
제가 느낀 점은, (조사 같은 것에서) 생략이 많고, 같은 조사를 이렇게도 쓰고 저렇게도 쓰는지라, 말보다는 말 할 때의 상황과 억양에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의사소통에 장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실 분이 있으실텐데,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서울말은 조사나 접속어 하나 잘못쓰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제주말로 대화할 때는 오히려 그럴 여지가 적습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과정을 보면 대략 [생각-말]-[들음-이해] 이런 변환 과정을 거치는데, 생각을 전하는 중간매체인 말이 세분화되면 될수록 오히려 부정확하게 사용될 소지가 많고, 따라서 오해의 여지도 많아지는 것이죠.
그에 비하면 어휘 수가 적은 제주도 말이 오히려 뜻을 전달하기에 좋습니다. 말에 묶이지 않고, 말 속의 뜻을 듣게 되니까요. 참 아이러니하죠?
진짜 어려운건 엔지니어님도 말씀하셨다시피 억양입니다. 이건 하루 이틀에 안되니까요.
저는 윗글 원문을 보면서, 일찍 돌아가신 외할머니 대신 어머니를 키워주신 이모할머니의 억양과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글자라는 제약 때문에 여러분께 제주말 특유의 억양을 들려드리지 못하는 게 참 안타깝습니다.
전라도 사투리 "워~매 징한 거"에서 억양을 빼고 "어머 징한거"로 바꾼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말도 시처럼 제 영역을 떠나서는 생명력을 잃는가 봅니다.
기왕 엔지니어님이 운을 떼셨으니, 이참에 제주말이 어떤가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대조해서 읽기 편하게 했고, 직역에 가깝게 번역했으며 어감을 더 살리려 했습니다.
어망 고향이 애월이난 호끔 허주게 (어머니 고향이 애월이라 저도 제주말을 쪼끔 하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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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이십오년 전 하르방 앞이 보내불고, 바닷바람 불민 하르방 허연 댓발이 누 위에 일렁여.
[번역] 이십오년전(에) 하르방을 앞에(먼저) 보내버리고, 바닷바람(만) 불면 하르방 허연 수염이 파도에 일렁여.
하르방 : 조사 "을"이 생략되었음. 제주 방언은 조사가 생략될 경우가 많음.
앞이 : 앞에
보내불고 : 보내놓고, 보내버리고. "보내불고 난"(보내버리고 나니까)을 그냥 "보내불고"로 줄여 말씀하신 듯.
[원문] 바람 불엉 바당에 누 일어나민 하르방 생각이 더 낭 눈물 흘리멍 코 씰당 보민, 북작북작 일던 배덜도 물질허던 해녀덜도 하나 엇고 가슴만 서넝허영.
[번역] 바람이 불어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면, 하르방 생각이 더 나서 눈물 흘리면서 코 쓸다 보면, 옹기종기 움직이던 배들도 물질하던 해녀들도 하나 없고 가슴만 서늘허이.
다음 말들은 연결형 어미 "엉", "앙"이 사용되었는데, 받침을 빼고 "ㅓ", "ㅏ"로 읽으면 이해하기 쉽다.
바람 불엉 : 바람이 불어서
생각이 더 낭 : 생각이 더 나서
눈물 흘리멍 : 눈물 흘리면서
코 씰당 보민 : 코 쓸다가 보면
북작북작 일던 : 정확한 직역을 몰라 엔지니어님의 번역("옹기종기 움직이던")을 그대로 가져왔음.
[원문] 마당 한쪽에 도새기 두어마리허고 강생일 키와신디 무사 그초록 속상허게 허는지 못 살커라.
[번역] 마당 한쪽에 돼지새끼 두어마리하고 강아지를 키웠는데 왜 그토록 속상하게 하는지 못 살겠더라구.
[원문] 자식키우는 거나 똑 닮쥬. 이젠 기운도 어성 그놈의 몽근것들도 다 보내부러쭈기.
[번역] 자식키우는 거나 똑 같아. 이젠 기운도 없어서 그 쪼끄만 것들도 다 보내버렸지 뭐(남에게 줬다는 뜻)
- 도새기 : 도야지(돼지)의 새끼. 병아리는 독(닭)새기
- 키와신디 : 키웠는데. 여기서 "시"는 원래 존칭형 어미인데, 제주말에는 말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이런 존칭을 쓰는 경우가 흔하다. 존칭을 쓰지 않으면 "키왔난디" 정도가 되겠지만 그렇게 쓰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굳이 존칭이라기 보다는 "그랬었다"는 과거형 어미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 무사 : 무슨, 왜, 뭘
- 살커라 : 살겠더라구, 살겠더라니까. "~커라"는 푸념의 뜻이 담긴 어미.
- 닮다 : 같다. 표준어의 닮다와 다른 말로 보라. 제주말에서는 "~같이"나 "~처럼"의 뜻을 지닌 부사로 더 많이 쓰인다. (예) 나 닮게 해보라 게(나처럼 해보라니까)
- 어성 : 없어서. "엉"은 앞에서 설명한 연결형 어미.
- 몽근 것 : 작은, 잘은. 제주방언이 아니고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일반어임.
- 보내부러쭈기 : 보내버렸주+기(강조형 어미). 경우에 따라 "게"나 "양" 등의 강조형 어미도 쓰인다.
[원문] 다섯 오누이 다 시집장개 보내난 어느 줘를에 날촐록 머리도 하양해 부렸져.
[번역] 다섯 오누이 다 시집장가 보내니까 (계들도) 어느 겨를(?)에 나처럼 머리도 하얗게 되 버렸어.
[원문] 맹질엔 손지들이영 찾아 왕 세배허민 꼬깃꼬깃 쥐맹이 돈이 나가도 하나도 아깝지 않주.
[번역] 명절엔 손자들이랑 찾아와서 세배하면 꼬깃꼬깃 주머니 돈이 나가도 하나도 아깝지 않지.
[원문] 신창으로 시집온지도 70년이 됨신게.
[번역] 신창으로 시집 온 지도 70년이 됐구만.
- 됨신게 : "게"는 강조형 어미. "됐쥬"(됐지)와 같은 뜻이지만 어감이 다르다.
[원문] 아기덜은 제주시에 왕 훤디 삽서 허여도 이제 살민 얼마나 살거랭 아기덜 못 젼디게 헐거라.
[번역] 아기(자식)들은 제주시에 와서 한군데(같이) 사십시다 해도 이제 살면 얼마나 살거라고 아기들 못 견디게 하겠어?
- 왕 : 와서. 와 + 앙(연결형 어미)
- 훤디 : 또는 헌디(한데, 한군데). 조사 "에"가 생략되었음.
- 못 젼디게 헐거라 : 못 견디게 하겠어?. 의문형을 강조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원문] 나 하나 줜뎌불민 우리 아기덜 다섯 오누이 팬안 헐건디.
[번역] 나 하나 괴로워 버리면 우리 자식들, 다섯 오누이 편안할건데.
줜뎌불민 : 일단 엔지니어님의 해석(괴로워 버리면)을 그대로 가져왔다.
엔지니어님께 질문 - 혹시 줜뎌불면 : 견뎌버리면 아닌가요?
[원문] 저 상코지여에 멍석 뭘아오듯이 몰려오는 누나 보멍 살쥬.
[번역] 저 상코지여에 멍석 말아오듯이 밀려오는 파도나 보면서 살지.
엔지니어님 제대로 됐나 모르겠네요.
개편이전의 자유게시판으로 열람만 가능합니다.
[주해]
무우꽃 조회수 : 925
작성일 : 2004-07-07 00:26:59
IP : 210.111.xxx.12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푸른잎새
'04.7.7 3:35 AM (220.79.xxx.205)짝짝짝! 무우꽃님 정말 모르시는 게 없군요.
저도 팔도 사투리에 관심이 많았었는데(대학 때 방언채집 다녔슴다)
제주 방언은 처음이고, 너무너무 재밌네요.
스무살 그 때로 돌아간 것 같아요.2. 피글렛
'04.7.7 4:11 AM (194.80.xxx.10)전직 국어 선생님 아니신가요?
3. engineer66
'04.7.7 5:31 AM (220.124.xxx.89)와, 대단하시네요.
제주에 사는 사람보다 더 자세하게 해석을 하셨네요.
'줜뎌불민' 은 '견뎌버리면' 맞습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 괴로움을 견디다라는
말이 그 말에 축약이 되기도 하지요.
암튼 대단하십니다.4. 무우꽃
'04.7.7 9:58 AM (210.111.xxx.12)에궁. 부끄~~ 으쓱^^
엔지니어님 께 질문.
"훤디"라고 쓰신 말요. 그게 "혼디"에 가까운 아래아 발음 아닌가요?
제 혀에는 그렇게 남아있어서 ... (제주 말 써본지가 십년이 넘었어요)5. engineer66
'04.7.7 10:50 AM (220.124.xxx.194)^^ 예, 아래아 발음 맞습니다.
발음에 가깝게 쓰다보니 그렇게 썼어요.
그래서 제주사투리를 글로 표현하는데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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