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죽었다 .
아버지는 자신이 가정을 건사한다고 생각해왔지만 아니였다 .
몸이 부서져라 살림에 농사에 공장일까지 거들던 엄마가 돌아가신 후
풍성하던 식탁은 상한 반찬과 스팸으로 채워지고
아버지와 삼남매가 모두 함께 집안을 쓸고 닦아도 엄마의 빈 자리는 여전하다 .
엄마의 부재는 가족들을 다투게 한다 .
그렇게 다투던 어느 저녁 ,
갑자기 “ 달그락 ” 거리는 소리에
가족들은 동시에 유골함을 처다본다 .
그렇게 싸우던 가족들에게 엄마의 함성이 들린 것이다 .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서 밤낮으로 움직이다 인공관절을 삽입한 무릎 .
쭈그려 앉아 대파 뽑고 등갈비를 조리고 고구마대 껍질을 까던 무릎이 지르는 함성 .
그녀는 보증 잘 못 서서 생긴 빚을 갚고 가정을 건사하느라
아이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들여다 보지는 못한 엄마였다 .
그러나 모를 수 없다 .
결국 엄마를 죽게 만든 그 분주한 날들 , 거기에 담긴 진심을 .
이런 게 존재감인가보다 .
사람은 이렇게 죽어서도 말한다 .
그리고 그 빈자리에서 가족들은 성장하기 시작한다 .
기정은 집안일을 주도하고
창희는 아버지에게 정성껏 사랑을 표현하며
아버지는 이제 창희의 말을 귀담아 듣기 시작한다 .
그들은 차를 산다 . 처음으로 함께 바다도 간다 .
과묵한 아버지는 말 많은 아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
엄마는 미정이를 사랑했지만 딸의 내면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
기정이는 보수적이고 답답한 집구석이 싫었다 .
그러고 보면 창희는 성건지고 부지런한 엄마를 닮았고 미정이는 말 없고 성실한 아빠를 닮았다 .
기정이는 고모다 . 하지만 돈 욕심 없는 성정에 성실하기 짝이 없는 부모 밑에서 자라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진 않을 것이다 .
좋은 사람들이었던 그들은
자기 기준의 열심을 시전하느라 지쳐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
부모는 자식을 건사한다고 뼈빠지게 일했지만
아이들은 우리들이 언제 부모한테 지지받은 적이 있었냐고 말한다 .
둘 다 사실이다 .
매일 서울로 출퇴근하느라 , 씽크대 만드느라 , 고추 따고 오이 소박이 담느라
자신만의 분주한 진실에 갇혀
상대의 진심을 살피지 못했다 .
그런데 엄마의 죽음이 가져온 생활의 공백은
그들이 공통의 필요를 채우게 하고 서로의 진실과 진실 사이를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
그들은 자주 다투었지만
슬픔을 공유한 공동체로
계란 후라이를 하고 , 빨래를 널고 청소기를 돌리며
공통의 일상을 작은 구원들로 채워나간다 .
그런데 구 씨가 돌아간 산포의 겨울은 너무 신산하다 .
그 사이 재혼한 아버지는 다리를 절고 아이들은 서울로 떠났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해방일지는 자주 그런 방식으로 서사를 전달해 왔다 .
시간 순서대로 A-B-C 라는 장면이 있다면
C 부터 맞닥뜨려 시청자를 충격에 빠트린 뒤
A 와 B 장면을 뒤에 이어 붙여 설명하는 식이다 .
10 화 마지막 백사장의 업소에 가 찾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날
미정이와 달달한 데이트까지 하고 난 뒤
갑자기 2022 년 업소로 돌아간 구 씨의 모습을 표현한다든지 ,
2 화의 뜬금없는 미정이의 추앙 요구도 3 화 이후 구 씨의 과거 회상 장면을 통해 개연성을 갖는다.
심지어 미정이와 가족들이 그리워 산포로 돌아온 구 씨는
재혼한 새 어머니부터 맞닥트려야 했다. ( 어머니의 죽음도 묘사되지 않은 시점에서 말이다 . 14 화가 끝났지만 재혼의 경위는 아직 묘사되지 않는다.)
14 화 마지막,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재회한다 .
처음에는 두 사람이 만난다는 것만으로 감격해서 나 또한 행복했다 .
그런데 너무 팬시하다 .
그래서 불안하다 .
마치 풋풋한 20 대 동네 오빠 같은 얼굴로 미정이를 기다렸다가
무진장 보고 싶었다 , 주물러 터트려 먹고 싶다며 갈고 닦은 추앙을 하는 구 씨라니 ...
그런데 이 해사한 구 씨는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잠시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손을 벌벌 떠는 알콜 중독에 ,
우울증에 빠져 하나도 슬프지 않는데 그냥 눈물이 나는 상태였다 .
미정이가 절실했지만 자기 삶이 부조리하여 다가갈 수 없었던 그는
2 년을 술에 절어 살았다 .
이러다 죽을 것 같아 , 그는 살아보려고 전화했을 것이다 .
이것은 그냥 연인들끼의 만남이 아닌 생존의 행위이다 .
그 순간이 유쾌할 수만 있을까...
봄인지 가을인지도 불분명하며 일상적인 공간이지만 어디인지는 알 수 없는 그곳은
과연 현실에 존재할까 ?
그래서 영화 ‘ 어톤먼트 ’ 가 떠오른다 .
두 연인을 불행에 빠트린 여동생이
소설 속에서나마 그리워하던 두 사람의 재회를 그리는 것으로
그들의 삶에 속죄한다는 .
그리고 절실해진다 .
추앙하다 보면 봄에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확신한 미정이의 말이 .
진짜 봄이다 .
그동안 시청자를 낚는데 도가 튼 해방일지 예고를 또 한 번 지고지순하게 믿어보자.
열심히 병원도 다니고
자신을 옥죄던 악의 세계도 폭파하고
미정이 알바도 시키고, 오뎅도 같이 먹고!
구자경은 어서어서 가열차게 추앙하라 .
당신과 그녀의 확실한 봄을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