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년 에서 연희와 삼촌이 함께 살던 집으로 나오는 연희수퍼가 목포에서 촬영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인터넷을 검색 해보니
영화보다 시화가 있는 마을로 더 유명해
오늘 목포 서산동 시화마을을 찾았습니다.
서산동 시화마을을 찾아 처음 본 느낌은 "시간이 1960년대 초반 후로 시간이 멈춘 동네"라는 것이었으며
마치 60년 전으로 돌아온 느낌이었습니다.
사진에서 뒷모습을 보이는 아주머니는 제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분으로
어감이 마치 60년전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분이셨습니다.
어릴 때 이웃 아주머니 같은 정감이 가득한 말씨였습니다.
연희수퍼에서 언덕으로 오르는 시화마을의 입구입니다.
목포시 해안로 127번길
시화마을로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 공중전화부스
지금 이런 공중전화를 보기가 쉽지 않지요?
차는 물론 오토바이와 자전거도 갈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 입니다.
오늘 시화마을을 돌면서 느낀 점은
1964년 서울로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갔을 때 창신동 산꼭데기 같다는 것이었지만
그 때 보았던 창신동 산동네도 이보다는 험하지 않았습니다.
시화마을에 들어 가면서 처음 본 시
계단이 많이 가팔라 어린 아이들이나 노약자달은 오르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언덕을 오르는 길에 만들어진 간이화원(오른쪽 비닐)
광고를 위한 각종 스티커
사람이 살지 않아 비어 있는 집들고 간혹 눈에 띠었습니다.
이곳은 이사를 하려도 여희수퍼가 있는 곳 까지 사람이 일일이 이삿짐을 날라야 합니다.
비탈 한쪽에 설치된 간이화원
20여년 전에 내 적금 오백만원을 떼어 벅고 소식이 없던 고모를 보리마당식당에서 만났지만 끝내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첫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택했습니다.
옛날 도구통도 있고 다딤돌도 있고
기둥을 사이에 두고 도구통과 학독도 있었다.
어릴 때 6.25전쟁 후 봄이면 보릿고개를 맞아 청맥죽을 끓여 먹으려고 도구통에 보리방아를 지겹게도 찧었었으며
1960년 전후 학교를 마치고 졸아와서는 학독에 보리쌀을 갈아 저녁 밥을 하기도 많이 했었는데
내가 어릴 때 살던 곳은 깊은 산골이었지만 이처럼 언덕이 아닌 거의 평지였다.
그시절 대부분 시골 집들은 아들을 가르치려고 딸들을 희생시킨 집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하나뿐인 내 누이는 국민학교 때 전주 풍남국민학교로 전학가서 경기여중고를 나와 서울대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이후에 나오는 시들은 80대 할머님들께서 쓰신 시들입니다.
산동네의 텃밭에서는 각종 채소들이 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