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귀가 밝아서 심부름 척척 잘해주던 마타하리 니치,
늘 그랬던 것은 아니랍니다.
한국에 살 때의 일인데
거의 대문을 잠그지 않고 네집 내집 없이 동네 아이들이 드나들고,
점심은 이웃들끼리 한 집에 모여 해결하기도 하고,
일요일 아침엔 잠옷 바람의 동네 아이들이 눈꼽 주렁주렁 달고 저희집 거실에 모여서
동물농장을 함께 보면서 아침밥을 함께 먹기도 하구요.^^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니치도 걸핏하면 방충망 쓰윽 밀고 나가
옆집에 들어가서 재활용 쓰레기 모아 놓은 것 중에 만만한 펫트병도 물어오고,
동네 아이들 간식도 슬쩍 해드시고, 엄마한테 야단이라도 맞은 날은 가출 겸, 셀프 산책 겸,
마실을 다니곤 했는데, 사람 좋은 이웃분들이 털 날린다 잔소리 안하시고
간식 하나라도 꼭 챙겨주곤 하셔서 단단히 맛이 들렸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이웃 아저씨가 2층 화장실에 앉아 있다가 둘러 보니 휴지가 없더랍니다.
부인을 불러도 대답이 없고, (저희집에서 커피 마시며 수다 떨던 중이었음)
산으로 전쟁놀이하러 가버린 아이들도 당연히 아무 소리가 없고..
최후의 수단들을 궁리하고 있던 중 누군가 처벅처벅 쿵쿵쿵 계단을 올라오더래요.
이웃이라면 아무개야 하고 부르거나 했을텐데 거침없이 올라오는 것이
아들놈인가 보다 하고 화장실 문을 살짝 열고 내다보니 니치! 였답니다.
평소 니치가 영리하다고 늘 칭찬해 마지 않던 아저씨..
남의 집에 와서 킁킁킁 기웃거리고 다니는 니치를 다정하게 불렀다고 해요.
만나면 간식도 잘 주고, 잘 놀아주며 이쁘다 해주시는 아저씨가 부르니 니치는 신나게 꼬리를 치며
살짝 열린 화장실 문을 코로 확 제끼고 들어가서 가만히 앉아 있는 아저씨한테 손을 막 주면서 인사를 하는데,
"니치야, 휴지 좀 가져다 줘."
"휴지 휴지"
"응? 응?" ..하고는..
니치가 문제없다는 듯이 씩씩하게 나가는 것을 보고 잠시 희망에 부풀었던 아저씨.
돌아온 니치가 펫트병 하나를 물어다 아저씨 앞에 턱 내려놓더니 앉아서 또 손을 막 주자..
다시 간곡하게..
"아니, 휴지 휴지 갖다 줘. 저어기 저 박스 갖다 줘"
니치가 벌떡 일어나서 크리넥스 박스 쪽으로 가자 '니치 진짜 똑똑하구나' 하며 아저씨가 속으로 감탄을 했는데
갑자기 홱 돌더니 1층까지 내려가서 큼지막한 공을 물어다 주고는 기대에 찬 눈을 깜박거리며
꼬리를 흔들더랍니다...
다리도 저리고, 점점 절망적이 된 아저씨가,
계속해서 "휴지 휴지 휴지 휴지...갖다 줘 니치야" 라고 하는데
니치는,
뭔가를 자꾸 가져다 줘도 간식도 안 주고,
꼼짝 않고 앉아서 놀아주지도 않는 아저씨가 재미 없어 졌는지
턱을 치켜들고, 콧방귀를 풍풍 날리면서
화장실 문부터 대문까지 모든 문을 최대한 활짝 열어젖혀놓고는 사라져 버렸답니다...
그날 밤, 가양주가 잘 익었다는 이유였던가?
암튼 백만 스물 두가지 술 핑계 중의 하나를 구실로 모여서 술을 마시는 데 아저씨가 그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사태를 어찌 수습했는지 차마 물어보지 못했는데,
얼큰하게 취한 아저씨가 엉거주춤 변기에 앉은 폼으로 니치에게 애걸하는 모습을 재현해 주셔서
모두 배를 쥐고 웃었던 기억이 나요.
그 날 일을 적어 내려가다 보니, 그 이웃들이 그리워지네요.
이사를 많이도 했지만 매번 이웃복이 넘쳤던 것 같아요.
그래서 떠나는 발걸음이 언제나 더 무겁기도 했었던 것 같구요.
몇해 전보다 훨씬 더 팍팍해진 세상 ..다들 잘 지내고 있으리라..믿어봅니다.
이하 짤방^^
동물농장과 함께 했던 유로 투어, 저기는 로마의 서커스 막시무스
영국, 집 앞 ^^
집에 돈 떨어져서 니치가 대표로 은행을 털기로.
아무도 못 알아봤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