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오전 고토미술관의 정원에서 시간을 많이 써서 아침에 생각한 일정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국립박물관은 시간적으로 무리다싶더라고요. 그러니 보려면 어느 날 하루를 통으로 내서
시간을 썼어야 하는데 보고 싶은 전시가 너무 많아서 미루다보니 이런 상황이 되었고 이왕 그렇게 되었으니
느긋하게 다른 대책을 생각해보고 싶어지네요. 그렇다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고픈 배를 해결하고 다음
볼 곳을 정해야겠다 싶었습니다. 우에노로 일단 가서 점심을 먹고나니 루브르 여신이 왔다고 광고하던 미술관의
전시가 궁금해졌습니다. 또 루브르의 여신인가 하던 바로 그 곳에 가보니 아니 이럴 수가, 지중해 4천년전이라고
써있더라고요. 처음에는 왜 그 글씨가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요?
마음을 바꾸고 나니 우에노 공원을 잠시 산책할 여유가 생겼습니다. 내일 아침 마지막 날이니 서둘러서 짐을 들고
나오면 국립 박물관에서 4시간 정도는 관람이 가능하겠지? 그런데 여행가방을 넣을 공간이 비어있지 않을 경우는
어떻게 하나 이런 궁리 저런 궁리를 해가면서 산책을 했습니다. 그 때 깨달은 것 중의 하나가 하고 싶은 것은
미리 순위를 정해서 하자는 것, 이렇게 미루다보니 결국 잘 못 하면 못하고 끝나게 되는 사태가 생긴다는 것.
우에노를 지나다닐때마다 눈에 띄지만 아직 못 가본 미술관, 이번의 전시도 그다지 마음에 끌리지 않아서 패스했습니다.
그러나 전시를 알리는 포스터가 눈길을 끌어서 사진기를 저절로 꺼내게 되었지요.
물론 이 전시도 사진이 허용되지 않고 그 대신 전시장 안에서 영상을 볼 수 있게 해놓았네요. 지중해 4천년전
상상을 넘는 전시였습니다. 루브르에 이상하게도 인연이 있어서 여러 차례 가보았는데 그 동안 거의 본 적이 없는
유물이 주로 전시되었고 지중해를 둘러싼 4천년 흔적을 그 자리에서 맛 볼 수 있게 한 기획이라서 내년에
가려고 예상하고 있는 그리스 여행의 전초전을 연 격이라고 할까요? 국력의 차이인가, 아니면 미술관의 기획력의
차이인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부럽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한 마음이 여행기간내내 마음속을 힘들게 하고 있네요.
지중해하면 그리스를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은 더 큰 개념이지요. 지중해를 둘러싼 문명의 탄생, 그리고 이어지는
나라들, 대서양에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는 문명의 선두주자 역할을 했지만 그 뒤에도 그들의 삶은 지속되었지요
그래도 세계사 책에서는 세계사를 주도하던 시기의 역사위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후에 대해선 깜깜하기
십상이라서 이번 전시가 제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안겨주었습니다.
집에 돌아가면 지중해의 기억을 시대순으로 다시 한 번 읽어야지 마음속으로 꼽아 두었는데 막상 돌아오니
해야 할 일,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아서 지중해의 기억은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마음 먹는 순간의
간절함과 실제의 간극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3층에 걸쳐서 전시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엄청 많이 소요되더군요. 아마 전시가 막바지라서 그런지
평일인데도 관람객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보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꾀를 내어 일단 간단히 본 다음 다시
내려와보니 그 때에야 조금 한가한 상황,그래서 두 번째 오히려 제대로 볼 수 있었지요. 다양한 연령대의 관람객
그들이 나누는 소근소근 대화, 그런 것들이 배경이 되어서 귀동냥을 하기도 하면서 전시를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되었고요.
지중해 4천년사, 그러니 얼마나 다양한 형태의 삶이 있었을까요? 덕분에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과 갑작스럽게
만나는 순간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스크린에 비친 영상을 소개하자면 한이 없겠군요. 그렇게 생생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이것을 못 보았으면 얼마나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었을꼬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더라고요. 그렇지만 실제로 못 보았더라면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니 사실은 그런 생각이 들리 없겠지요. 그래도 역시 이 전시는 정말 좋았습니다. 덕분에 새롭게 시야가 열린
것도 있고 함께 여행하기로 한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들도 있고요.
곧 폐관한다고 알리는 방송을 듣고는 마지막으로 더 보고 싶은 것을 집중적으로 본 다음 밖으로 나오니
차선의 선택이었지만 좋았다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들어갈 때에는 마음이 급해서 보이지 않던 조각이 눈에 들어오네요.
그 때 그 때의 시간이 다 매력으로 가득찬 그런 여행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아침에 도쿄대학내의 스타벅스에서 받았던 티켓이 생각나길래 100엔으로 커피 한 잔 시켜서 마시고 있는 중
옆 자리의 여성분이 말을 겁니다. 무엇을 보러 왔는가 하고요. 그래서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습니다.그녀는 치바에서
전시회를 보러 왔다고 하더군요. 무슨 전시인가 물었더니 서예선생님이라고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하는 전시가
있어서 보러 왔다고 하면서 제게는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여러가지 묻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아주 솔직하게 여러가지를 묻네요. 해외 여행이라면 돈이 드는데 실제로 경제생활을 하는가, 어느 정도 드는가
이런 식의 질문을 받은 것은 처음이어서 신선하기도 하고 의외이기도 하더라고요.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녀가
제게 글씨의 가미사마에 대해서 아느냐고 합니다. 글씨의 가미사마? 누구 이야기인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왕희지에 대한 것입니다. 왕희지를 일본어로 어떻게 발음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들고 있던 팜플렛에서 발견한
이름으로 우리는 한참을 이야기했습니다 .우에노 공원에 앉아서 일본인과 중국의 글씨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아침 숙소의 방송에서 본 붓만드는 고장의 이야기가 있어서 그 이야기도 겸해서 하게
되었지요. 쓸데 없는 경험이란 없는 것이로구나 놀랍게 느낀 날, 그녀가 들고 있던 팜플랫을 제게 주고 싶다고
해서 받고 헤어졌지요. 어두워진 우에노 공원을 떠나 마지막 밤, 드디어 서점에 갑니다. 무엇을 만나게 될지
설레는 마음을 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