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간의 고전읽기 목록을 짜는 중에 고백록을 넣을까 말까 망서렸던 기억이 나는군요. 창조주로서의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저로서는 단지 여러 책에서 자주 인용되는 저자라는 이유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리스트 작성은 제 개인의 호, 불호에 의한 것이 아니라
2500년에 걸친 서양 사상사를 공부하자는 것이니 이런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싶어서 과감하게 고백록을 리스트에 넣었고 드디어 7월 고전읽기 시간에 고백록을 읽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시험을 앞둔 학생처럼 고백록이 아니라 다른 책을 자꾸 뒤적이게 되더라고요. 400년대의 로마역사라거나
수도원의 역사, 수도원의 탄생에 관한 것,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향을 준 마니교, 신플라톤주의에 관한 것,
아니 그것과 전혀 다른 예를 들어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란 책을 읽기도 하고, 아이들과 시작하기로 한 고전읽기
첫 번째 주니어 클래식의 논어를 조금 더 깊이 읽기 위해서 논어를 풀어서 쓴 다양한 저자의 해설을 읽기도 하고요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점점 고백록 읽는 금요일이 다가옵니다.
수요일 밤부터 마음을 다잡고 읽기 시작했는데 첫 장이 제일 진입이 어렵더군요. 하나님에 대한 열렬한 감정의
표현이 마음속에 구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주지 않아서 더 힘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일단 거리를 두고
텍스트로 읽자고 마음을 바꾸어 먹었지요. 그런 거리감을 확보하고 나니 한 인간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으로도
의미가 있었지요. 금요일, 한 나절을 통째로 9장까지 읽는 시간으로 보내고 나니 어느새 아하 이래서 이 책이
이렇게 다양하게 인용되는구나 , 데카르트보다 훨씬 먼저 의심하는 자아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 점, 인간의 습성에
관한 것, 예를 들어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돈수, 돈오점수의 이야기가 여기에서도 이미 드러나고 있다는 점
공동체를 꾸리는 일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일까,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과의 만남이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어머니란 존재의 힘, 한 사상을 익히고 그것을 변형시켜서 자신만의 독특한 사고구조로 바꾸어내는 힘, 성경의
구석구석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방식,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고백록을 읽고 만난 사람들, 다른 시간과는 달리 아무래도 신앙이 있는가, 없는가 우선 그런 점부터 시작해서
자신에게 신은 어떤 의미인가, 신앙과 교회는 같은 것인가, 신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있다고 믿고 싶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의식이 신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아니 잘 모르겠다는 불가지론에 이르기까지
일상적인 수업에서는 나오기 어려운 발언들이 서슴없이 오고가는 것을 보면서 그동안의 쌓인 시간을 느끼게 되는
날이었습니다.
한 달에 두번씩 벌써 7개월째 함께 모이는 멤버들에 대해서 어제는 조금 더 깊이 다가가게 되는 느낌이 든
것은 저 혼자만의 느낌이 아니었겠지요?
이구동성으로 이야기가 나온 것은 이렇게 함께 읽는 기회가 없었더라면 이 책을 읽어볼 엄두를 못 냈을 것이란 점
그래서 함께 하는 것의 힘을 더 실감한 날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도 개인적으로 읽으려고 고백록을 일부러 구할
일은 아마 없었을 것 같은 사람축에 속하는 편이니까요.
12월까지의 책 목록도 마저 확정지은 날입니다.
8월 첫 주 - 고백록 나머지
8월 세번째 주- 단테의 신곡중 지옥편
9월 첫 주 -단테의 신곡중 연옥, 천국편
9월 세번째주가 추석연휴라서 쉬고 이번만 네 번째 주 단테 신곡연구
10월 첫 주 세번 째주 장미의 이름, 소설과 장미의 이름읽기- 강유원
11월 첫 째 셋째 주 치즈와 구더기 대신에 야콥 브루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
12월 세익스피어 작품읽기
이렇게 텍스트를 확정했습니다.
치즈와 구더기를 뺀 사연은 이렇습니다. 제가 헌책방에서 구한 책중에 같은 저자의 실과 흔적이 있었지요.
어제 한의원에 들고 가서 읽던 중 물론 그 공간에서 계속 이야기를 하던 두 여성으로 인해 신경이 분산된 것도
있지만 문제는 도대체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었습니다. 정말 당황했지요. 어떻게 이렇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책이 있단 말인가!!
한의원에서 나와서 집에 들어오던 중, 오랫만에 들른 빵집에서 빙수를 하나 시켜놓고 계속 책을 읽었지요. 혹시나
문이 열리는가 싶어서요. 한의원에서보다는 조금 더 이해가 갔지만 그래도 역시 장벽이 높아서 당황했습니다.
이럴 수가, 그래서 치즈와 구더기는 어떤가 조혜숙씨에게 물었더니 그녀도 역시 어렵더라고, 그러니 아무래도
이 책은 목록에서 빼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합의를 보게 되었는데요 아직도 이상하게 씁쓸한 기분이네요.
그래도 이 경험이 제게 준 깨달음은 아이들과 시작하는 고전읽기에 이 마음을 잊지 않고 적용해보자는 것입니다.
제게 재미있는 책이라도 아이들에겐 벽이 높아서 마음이 열리지 않는 수도 많을 수 있겠구나, 그러니 수시로
그런 벽이 있는지 그것이 함께 읽으면서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는지 아니면 그대로 굳어져 있는 상태인지 마음으로
살피면서 가지 않으면 오히려 읽는 행위가 고통으로만 끝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점을 헤아리게 된 것이
소득이라고 할까요?
어제에 이어서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듣고 있습니다. 아마 제게 고백록은 브루크너와 더불어 기억될 책이 될 것 같은 예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