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역사모임 끝나고 점심도 맛있게 먹고 교보문고로 가던 길, 한 여성이 전화통화를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하고 가더군요. 그런데 신칸센이 멈추었대 친구에게서 연락이 와서 알았거든. 도쿄 동북지방에
지진이 난 모양이야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실제로 다음 날 아침 도코에서 인터뷰와 시험 일정이 잡혀있는 보람이가 바로 그 날 신탄센을 탄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말을 걸었습니다 ,죄송한데요 지금 한 말이 어디서 나온 소리인가요?
잘 모른다고 일본 사는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도코의 신칸센이 중도에 멈추었다는 소식만 들은 상태인데
도쿄는 큰 문제는 없는 모양이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사연인가 싶어서 보람이에게 국제 전화를 걸어도 계속 통화중, 누구와 이렇게 오래 통화하는
것일까, 평소라면 전화비 무서워서 엄마와의 통화도 가능하면 짧게 짧게를 고수하는 아이라서 조금 의외였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다면 내게 연락이 오겠지 그렇게 마음을 바꾸어 먹고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고른 다음
전시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훈데르트 바서전에서 그림과 건축 모형을 보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있던
중 울린 전화, 레몬 글라스님이 집에 가서 뉴스를 보았는데 보람이랑 연락은 되는가 하고 안부 전화를 했더군요.
왜요? 상황이 심각한가 물었더니 강도가 센 지진이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 때부터는 집중이 잘 되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서리고 있던 중 다시 아들이 연락을 해왔습니다. 엄마, 누나랑 전화해봐,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서 뉴스 보았는데 누나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라고 하는 겁니다.
이미 마음이 불안해서 결국은 전시장을 나와서 전화를 계속 걸었지만 통화중, 이렇게 장시간 통화중일리
없으니 전화선에 이상이 있는 것이란 판단이 들더군요. 아무런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이란 처음 겪는 일이라서
당황하게 되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밤에 마침 음악회가 있는 날이라서 미야님, 캘리님 만났는데 둘 다 만나자 마자 보람이 소식을 물어보는데
마침 캘리님은 티브이에서 지진 현장을 보고 와서 더욱 걱정을 하더군요.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서만 들은 것이라 아무래도 현실감이 덜 했는지도 모릅니다.
서울 시향의 그 날 공연이 참 좋았지만 역시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하니 때때로 집중력이 흩어져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잘 하는 일인가, 고민이 되는 시간이 끝나고 집에 오는 도중에도 계속 전화 연락을 시도했지요.

불안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와서 인터넷 기사를 검색해보니 상상을 초월한 재난이 일어났네요.
보람이도 걱정이지만 순식간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사연이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잠 못 이루도 있던 새벽 한 시 정도에 드디어 전화가 울리고, 엄마 우리 식구들은 나를 걱정하지 않는거야?
하는 소리를 하는 겁니다. 무슨 소리야? 연락을 계속 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는 중인데
그래? 전화기에 하나도 찍히지 않았던데

마침 그 날이 친구 생일이라 싸이월드에서 만나서 상황을 전해주고 이모가 보낸 메세지, 지진이 났으니
취직 활동 그만하고 들어오는 것이 어떤가 하는 걱정에 자신은 문제없다고 친구를 통해 연락 부탁하고는
이 소식이 당연히 엄마에게도 전해졌다고 생각한 보람이와 보람이가 보낸 메세지가 언니에게도 당연히
전해졌을 거라고 믿은 동생, 그 오해의 사이에서 저는 소식을 모르고 계속 불안해하고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다음 날의 약속은 취소되었지만 월요일에 다시 가야 한다고 ,그런데 현지에서는 바로 그 곳 이외에는 그렇게
상황이 급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오히려 너무 태연한 보람이가 이상하더군요. 이 곳에서는 너무
걱정을 하고 있는 중인데 말입니다. 그 곳에서 취직 활동하는 것 그만두고 한국에 들어오는 것이 어떤가 물어도
걱정할 것 없다고, 그냥 계획했던 대로 4월말까지는 해보고 싶다는 아이의 담담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비현실감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그런데 문제는 다음 날 아침부터 전화가 또 불통이 되었고 인터넷으로 메일을 주고 받는 것으로 소식을 알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오늘 아침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방사능 걱정, 그리고 앞으로의 여진 걱정, 이런 저런
걱정으로 속이 타지만 정작 본인이 그것에 대해서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엄마가 걱정하고 친구들이 걱정하니까
오히려 더 불안하고 무섭게 느껴진다고 하는 반응에 더 이상 다른 말을 하기도 어렵고요.
그렇다면 나도 일상으로 돌아가서 제대로 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마음 졸이던 것에서 조금은 벗어나서
다시 평소에 하던 일들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함께 걱정해주고, 전화로, 메일로, 쪽지로 문자로 여러가지로 마음을 모아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일이 이름을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드리고 싶어요.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한 시간이기도 했고요, 지금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을 했습니다.
지진의 피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문제, 그들의 트라우마, 그리고 현실적인 삶,이런 것들이 더 문제가
아닐까, 죽은 사람들의 문제보다 제겐 그렇게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문제가 자꾸 생각이 나네요.
자연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을 자꾸 하게 되고요.
일상의 감각으로 돌아가자고 해도 그것이 쉽지 않다는 느낌이기도 하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