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수요일 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목요일 오전은 참 괴로운 시간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으로 출발한 날이었습니다.
보람이가 수요일에 상경학회에서 발표가 있다고
며칠 전부터 원고 준비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자더니
수요일 마무리를 잘 하고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목요일 아침까지 내야 하는 리포트가 있는데
초고 메모만 완성된 상태로 글을 써야 한다고 하면서도
너무 졸려하는 바람에
방을 들락거리면서 깨워 놓으면 다시 잠들고 하는 바람에
결국 저는 새벽 다섯시에 잠들었다가 다시 일곱시에 일어나야
하는 참 힘든 밤을 보낸 상태였거든요.
그래도 개인사정으로 목요일 수업을 쉴 쉬도 없어서
어떻게든 수업을 하고 들어와서 잠을 보충해야지
그렇게 마음먹고 나간 도서관
오늘따라 이런 저런 사정으로 결석한 사람들이 많아서
저까지 딱 네 명이 모였네요.
오늘 수업쉬고 헤이리가면 어떤가 하는 의견을 내놓았더니
다 좋다고 해서 갑자기 헤이리의 까메라타에 갔지요.
모과차 한 잔 시켜놓고 신청곡 명단을 내민 다음에
넷이서 이야기하면서 소리에 기울이던 시간의
바깥 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도 좋았고
물론 음악도 좋았습니다.
제가 신청한 곡은 브람스곡이 나오고
백명자씨의 모짜르트 레퀴엠,그리고 모르는 다른 테이블의
신청곡 라흐마니노프가 흐르던 중
벌써 한시가 넘었네요.
역시 아쉽다 하면서 일어선 길
집에 들어와서 라흐마니노프의 첼로소나타 찾아서
크게 틀어놓고
보일러틀어서 따뜻한 느낌의 방바닥에 그냥 누워서
4악장을 다 듣고 일어서니
몸도 많이 풀렸습니다.
블로그에서 찾아듣는 음악은 악장마다
다시 작업을 해서 들어야 하는 것이 번거롭긴 해도
그것은 그것나름으로 악장을 반복해서 들을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라흐마니노프가 조금 더 친해진 시간을 보냈지요.

원래 점심을 먹고 나서 피아노 연습을 해야 하는 시간이지만
음악의 여운이 남아서일까요?
오늘은 이래 저래 일탈의 즐거움을 누려보자 싶어서
골라본 화가가 코로입니다.

역사책에서 아비뇽의 유수라는 사건의 현장으로만 들었던
곳,바로 그 아비뇽을 그린 그림이라고 하네요.

제네바와 알프스 사이의 호수라고 되어 있네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지만
언젠가 직접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지요.

지금은 라흐마니노프가 끝나고 꽃별의 해금연주를 듣고
있는 중인데요,흐르는 해금소리와 코로의 나무가
참 잘 어울리는 기분입니다.

미술사책에서 그림을 볼 때는 그렇게 감동을 받지 못했던
코로의 그림,그러나 오르세에서 그의 은색을 보는 순간
매료된 화가중의 한 명이지요.
그런 화가중에 르동도 있는데 르동 그림을 한국에서
제대로 만나긴 아직은 어려운 것 같아요.


이 그림은 낭뜨 근처에서 만난 나뭇잎을 그린 그림이라고
제목이 올라와 있네요.
낭뜨라니,그러면 낭뜨 칙령의 장소 낭뜨란 말이지
갑자기 화가가 프랑스 사람이라 그가 잘 아는 지역을 그린
것이지만 제겐 글씨로만 존재하던 지명이 갑자기
가깝게 느껴지는 기분이 들어서 신기합니다.

어제 수요일 수업에서 루이 14세 시대를 이야기했습니다.
정원문화가 어떻게 프랑스에 유입되었나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는데 오늘 코로의 그림에서 보볼리 정원을 보게
되네요.
코로는 살아생전에 그림도 많이 팔리고
기본적으로 재산도 많이 물려 받아서 경제적인
곤란이 전혀 없었던 화가라고 하더군요.
그 덕분일까요? 외국여행도 여러 차례 다녀와서
그의 그림에서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이태리 여행의 흔적이 바로 이 그림이기도 하네요.

그가 그린 퐁텐블로 숲 그림중의 한 점입니다.

이 그림도 역시 퐁텐블로 숲인데요
얼마나 다른 이미지인지요.

곰브리치 책에서는 코로 설명하면서 이 그림을 도판으로
썼는데 같은 작품인가 싶을 정도로 느낌이 다르네요.
그러니 도판에 따라 같은 그림이라도 얼마나 다른
느낌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상스 대성당의 내부입니다.
사진으로 보는 성당의 내부와 그림으로 보는 성당의
내부는 같은 공간이라도 역시 느낌이 다르지요?


음악과 더불어 그림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어딘가 여행을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이는
시간이지만 현실에서는 다시 일어나
도서관에 가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래도 마음 가득 즐거움을 안고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이
고마운 시간이기도 하고요.